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60화 (360/365)

360화. 강렬과 강력

에커즈 기사단의 주력 부대는 단연 기마대다.

이들이 기마로 운용하는 말은 웬만한 짐말보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 역시 발군이지만,

특유의 덩치로 인한 느린 속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돌격을 감행한 기마대가 그 느린 속도를 극복하고 끝내 적에게 닿는 데에 성공했을 땐,

누구도 부정 못 할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지금의 에커즈를 만든 것도, 그 높은 위상의 반열에 오른 것도 바로 이 파괴적인 기마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에커즈가 그려낸 파괴가 쏟아지고 있다.

검은 암반으로 빚은 듯 두껍고 윤택한 말들, 그 위에서 연신 고삐를 치대며 전력으로 본인을 투신하는 병사들.

이런 병사들의 맨 앞,

잡은 깃대를 높이 치켜든 채 파괴의 선두에 서 있는 기사.

투구 끝에 드러난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아가는 그 기사의 이름은,

아리나 에커즈.

그녀가 다른 한 손으로 품에 있던 아밍 소드를 뽑아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뒤편으로부터 불현듯 엄습한 그림자.

그것이 곧 아니라 그녀가 있는 곳까지 뒤덮어 버렸다.

휘이익 ──── !

맹금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폭음과 함께.

아니, 그녀를 뒤덮었던 그림자는 그대로 미끄러지듯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그림자에서 벗어난 아리나가 넌지시 전방 하늘을 주시했다.

그 하늘엔,

한낱 화살이라기엔 너무나 거대한.

철제 장대 수백이 포물선을 그리며 적 진영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퍼버벅 ──── !

공성 병기에서나 들릴 법한 묵직한 파괴음.

건축 따위에나 쓰일 법한 골조, 그 급 정도 되는 창을 비 맞듯 맞아버린 적 전열은 문자 그대로 여러 파편을 토해내며 나둥그러졌다.

그리고 이 무겁고 자비 없는 소나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듯 다시 한번,

휘이익 ──── !

아리나의 뒤쪽에서 벌 때처럼 날아올랐다.

엠프리오 군은 부랴부랴 측면을 보강한 채 기마대를 향해 응사했다.

하지만 에커즈 측에서 불어오는, 저 장대를 실어다 나르는 상승기류에 가로막힌 화살은 허공에서 힘없이 수직으로 추락하길 반복할 뿐이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에커즈의 기마병은.

그 절대적 파괴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다급함이 느껴지던 엠프리오 측 군에서 또 다른 방안을 찾아냈는지, 상승기류를 씹어먹을 묵직한 병기들을 전방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멀리서 보기에도 윤곽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발리스타였다.

이윽고 그 발리스타에 달라붙은 장정들이 도르래를 돌려 현을 당기고 재빨리 대형 볼트를 장전했지만,

이에 맞춰 아리나의 오른편 선두 기수이자 기사.

그녀의 품에서 황금빛 세이버가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뽑혔다.

에커즈 기사단의 2번 기수, 마리아 에커즈.

그녀가 품은 인챈트가 막 황금빛 세이버 끝에 맺혀.

12년, 프 템프레

밤을 속인 간헐적 아침 ‘빛나는 소나기’

한줄기 섬광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동시에 색칠된 듯 환해진 하늘.

그리고 다시 급격히 어두워진 하늘이 내뱉은 것은,

쿠르릉 ──── !

간담을 울리는 그르렁거림.

이내 그르렁거림 속에서 드러낸 허옇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콰릉 ──── !

추락해 땅에 박힌다.

쾅, 쾅 ──── !

연이어 우수수 떨어지는 줄 벼락.

그것이 겨우 가다듬은 엠프리오 군의 측방을 제대로 강타했다.

벼락 자체의 직격까지는 감당할 수 있었던 엠프리오 군이었지만,

그 벼락으로 인한 후폭풍까지는 감당하지 못했다.

이미 근처에 수없이 쏟아져 박힌 장대,

그것들이 쏟아지는 벼락에 감응해 거미줄처럼 촘촘한 자기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엠프리오 군 측방 전열이 불바다가 되었다.

불붙은 발리스타 한 대가 중심을 잃고 고개를 튼 채 물려 있던 볼트를 내뱉어 같은 아군을 관통했고,

방패 벽의 뒤에서 부대의 이빨이 되어줘야 할 창병들은 발밑의 불을 끄기 위해 가진 수통을 비우면서까지 발악했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 바깥,

에커즈의 기마대는 이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까지 도달해 있다.

* * *

엠프리오 다르가는 수비에 특화된 병종들을 에커즈가 다가오는 측방에 모두 집중시킨 뒤,

곧장 정예병들을 대동해 정면에 있는 테티르에게 돌격했다.

엠프리오는 이미 에커즈 기사단이 가진 파괴력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애써 시선을 돌려 맞서는 것보단 본론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 역시 자신의 기반이나 다름없는 병사들의 손실이 뼈아프게 느껴졌지만,

그렇기에 이 손실을 메꿀만한 당위성을 무조건 쟁취해야만 했다.

거기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자신의 진영에 적을 불러들이는 쪽이 더 유리하다.

본인 진영에 적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그녀가 가진 인챈트의 위력이 극대화될 테니까.

거기다 국면적으로 나쁘지 않다.

이쯤이면 케린과 이투가 복귀할 것이고, 안개가 사라짐에 따라 이란 역시 예정된 대로 본군에 합류할 것이다.

베실이 이끄는 군 역시 어쨌든 테티르 쪽 후방에 존재하는 이상.

시간은 무조건 우리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

“테티르!”

원통형 베서닛을 뒤집어쓴 엠프리오가 다가오는 테티르에게 목청껏 소리쳤다.

자신이 여기에 있으니 이쪽으로 오라 대놓고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애초에 테티르 론바즈의 성격상 다가오는 결투를 거부할 리가 없을 테니까!

“엠프리오!”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을 텐데도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한 테티르가 메이스를 붕붕 휘두르며 달려왔다.

그 모습을 재빨리 훑던 엠프리오는,

그의 그리브즈가 등자와 완벽히 체결된 것을 확인하곤 곧장 여유로움을 내비쳤다.

등자에 발을 올려놓을 힘조차 아껴야 할 정도로 테티르의 상태가 여의치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스윽 ─

다가오는 테티르에 맞춰 엠프리오는 등에 교차 된 채 매어져 있던 두 자루의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그것은 렘, 룸.

각각 고유의 이름이 붙은 명품 중의 명품이자,

칠기사 엠프리오라는 위용을 써 내려간 잉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두 자루의 초승달이 엠프리오의 비전과 만나 펼쳐지는 검술은,

적들에겐 거둬지지 않는 밤과 같은 암울한 것이었으리라.

카각 ── !

테티르의 메이스와 엠프리오의 두 시미터가 정면으로 맞물린다.

역시나 힘으로는 테티르에게 한참 밀렸던지라 엠프리오는 박차를 가해 말을 뒷걸음질 치게 해야 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메이스에 짓눌려 말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경, 아직도 그럴 힘이 있다는 게 놀랍군요.”

“엠프리오, 그러는 자넨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이는군!”

둘이 다시 교차한다.

그러나 이번엔 두 자루의 시미터가 사선을 그리며 테티르의 내려 찍히는 메이스를 교묘히 빗겨 갔다.

그녀의 비전,

‘포더그마’

무게 중심에 대한 천부적 감각으로 빚어진 그 검술은 말 그대로 본인에게서 상대가 내미는 무게 부담을 박탈시키는 신기.

그것을 증명하듯, 엠프리오는 테티르의 공격을 비스듬히 흘려 쳐 그대로 흘려보낸 뒤 여유롭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분명 부딪힌 감각은 있으나 끝내 물이나 구름 따위를 내리친 것만 같은,

그런 허무함을 느낀 테티르는.

“쯧…!”

혀를 차며 재차 엠프리오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바람을 짓이기며 묵직하게 휘둘러진 메이스,

그리고 그 메이스에 자리잡힌 무게 균형을 완벽히 파악한 엠프리오가 빗겨 세운 두 자루의 시미터로 흘려 쳐낸다.

끼이익 ──── !

마치 낡은 문에서나 나올 법한 가느다란 쇳소리와 함께 두 공격의 교차는 그렇게 또 끝이 났다.

“예전에 겪었던 것보다 더 교묘해졌군.”

“그렇지 않으면 높이 올라갈 수 없으니까요.”

“시간을 끌 셈인가?”

“시간이 나의 편은 맞지만, 언제까지 나의 편일 진 모르니 슬슬 교착을 지어볼까 합니다.”

“와라…!”

“그럼.”

둘의 대화를 끝으로, 엠프리오는 두 시미터를 머리 위로 교차해 들었다.

마찬가지로 테티르 역시 인챈트에 담긴 바람을 펼쳐 자신의 전신을 분쇄할 요량으로 밀어붙일 준비를 끝마쳤다.

그렇게 둘이 한 점을 향해 치달은 순간.

“쿠훅…!”

인챈트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테티르에게서 격한 기침이 한 번 흘러나왔고,

이에 무너진 그의 중심을 놓치지 않은 엠프리오의 시미터가 정확히 테티르의 옆구리를 스쳤다.

이윽고 안장 위에서 축 늘어진 테티르를 확인한 엠프리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어야 했다.

“확실히…,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겪는 게 더 실감이 가는군.”

본 군이 쑥대밭으로 변해 있다.

에커즈 기마대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트리기는커녕 담담히 주위 정예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테티르 경을 모셔라, 전군 퇴각한다.”

그렇게 명령을 떨어트리기 무섭게 그녀는 오른손에 쥐어진 시미터, 렘을 번쩍 들어 주위에 안개를 살포했다.

일대는 금새 짙은 안개로 뒤덮였고,

엠프리오는 그 속에서 유유히 퇴각을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짙은 안개를 뚫고 들어온 한 기사.

그 기사로부터 가시처럼 뛰쳐나온 클레이모어가 정확히 엠프리오의 베서닛 헬름을 스쳤다.

“흣…!”

둔탁한 충격에 상체가 뒤로 꺾인 엠프리오, 그 무게 중심에 놀란 말이 앞발을 들고 휘청거린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기어이 중심을 잡은 엠프리오가 자신 앞에 날아든 기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명성으로만 접했었는데, 이거 영광이오. 아리나 에커즈.”

“엠프리오 경,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여기까지, 나는 이제 마침표를 찍고 돌아가던 참인데.”

아리나는 클레이모어를 고쳐잡은 채 무덤덤이 답했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일 텐데요.”

이에 엠프리오가 고개를 까딱거린 채 웃었다.

서로 투구를 쓰고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왜인지 그 둘은 서로의 표정을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한 번…, 볼까.”

그 말을 끝으로 말머리를 측면으로 돌림과 동시에 클레이모어로 거대한 횡 베기를 펼친 아리나,

그리고 그에 맞춰 말의 앞발을 들게 해 회피한 엠프리오.

둘의 맞물리지 못한 첫 합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뒤편에서 또 다른 기사가 맹렬한 기세를 내뿜으며 등장한다.

“음…!”

이 안개 속에서, 그저 기류에 묻은 기척을 간파해낼 기사가 또 있었나?

살짝 당황한 엠프리오에게,

막 나타난 기사는 금빛 세이버를 내질렀다.

카각 ─── !

금빛 불똥과 함께 가로막힌 세이버.

엠프리오의 교차 된 두 시미터에 기사의 공격은 완벽히 가로막혔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약속이라도 한 듯 시작된 2대 1의 전투.

──── !

두 기사의 맹렬한 공격,

그리고 그것을 다 받아치며 뒤로 물러나는 엠프리오.

그사이에 피어난, 한순간만 뜨거울 꽃다발.

이윽고 자연스레 안개 속으로 자신을 묻는 데 성공한 엠프리오는 두 기사의 방향 잃은 시선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에커즈, 곧 다시 봅시다. 얽힌 상태에서.”

* * *

에커즈 기사단은 반쯤 붕괴한 테티르 군을 수습하기 위해 퇴각이 불가피했다.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간 베나즈령 쪽에 침투한 군이 언제든 이쪽을 칠 가능성이 있었고,

앞쪽에는 아직 베실이 이끄는 군이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적들의 아가리 속에서 자리를 버티고 있는 것은 무의미한 짓인 것이다.

이로써 한바탕 펼쳐진 안개 속의 전투가 막을 내렸다.

아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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