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61화 (361/365)

361화. 불씨 품은 재

안개 속,

양복을 입은 자들이 모여 연초를 태우고 있다.

그들은 모두 초조한 표정이었다.

값비싼 회중시계나 손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면서도 연초를 태울 때만큼은 버릇처럼 밴 기품을 드러내는 그들은 모두 11인회 일원들이다.

베나즈 저택, 정원으로 향하는 외곽 길목에 선 그들은 형형색색의 연기를 내뿜은 채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베르긴 경 쪽에 전투가 일어날 것 같다는 예상 뒤로는 뭐 들려오는 게 없으니…!”

그들 중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마주 서서 두꺼운 연초를 피고 있던 노인이 즉답했다.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휴식 시간을 가지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테티르 경이라면 분명 커다란 승전보를 갖고 오시겠지요.”

약간의 기대를 품은 남자의 말에 노인은 말없이 들고 있던 연초를 입에 물었다.

이어 연초를 한가득 빨아들인 노인이 거나한 연기와 함께 나지막이 남자에게 충고했다.

“좀 가려가며 말하게, 우리끼리여도 조심해야 할 판에 이곳은 공이 계신 저택이야. 그런 노골적인 발언은 애초에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러나 남자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뭐 어떻습니까, 이리 짙은 안개가 깔려 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남자의 그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짙게 깔려 있던 안개는 거짓말처럼 슬슬 걷히기 시작했다.

이에 연초를 태우고 있던 그들 모두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잠시 후 노인이 가장 먼저 연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모두에게 말했다.

“어서 들어갑시다, 곧 전서구 수백이 이곳에 들이닥칠 테니.”

그의 말에 나머지 넷이 황급히 연초를 비벼 끈다.

그 시점에 안개는 이미 마치 물로 씻겨 내려간 듯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없어진 뒤였다.

그렇게 앞서 노골적인 발언으로 핀잔을 들었던 사내가 노인을 따라 뒤를 도는 순간,

정원 복도에서 대기하던 집사부와 눈을 마주쳤다.

“엇…!”

미처 앞에 있는 기둥을 보지 못해 부딪힌 것처럼, 펄쩍 뛰며 놀란 사내는 금세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사부 일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언제부터…?”

그러자 앳된 집사부 일원은 친절히 답해주었다.

“이곳에 상주하며 근무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그의 대답에 남자는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적셔야 했다.

직전 노인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핀잔은 곧 피와 살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끝끝내 그 어린 집사부 일원의 눈치를 살피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회의실을 향해 도망치듯 내뺐다.

* * *

안개가 걷히기 무섭게 사방에서 전서구들이 날아들었다.

이에 맞춰 저택 안에서 대기하던 집사부 전원이 뛰쳐나갔고 얼마 안 가 밑에서 한바탕 소란스러움이 일어났다.

또 밖에 나가 있던 몇몇 11인회 일원들이 부랴부랴 들어왔고,

그들의 뒤를 이어 집사부들이 볼록한 베나즈 인장으로 봉해진 서신들을 내게 직접 전달했다.

그것들은 전부 스텔라스로 명명된 기사 본인의 명의로 직접 써 내려간 것들이었다.

아직 펼쳐 보지 못해 그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단지 그들이 직접 봉인해 보냈을 것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모두 열렬히 싸워주었구나, 하는 고마움과 함께.

이후 스텔라스 명의의 서신을 제외한 통상 서신들은 재상 기지어와 서기관인 조이, 공식적으로 임시 의전관인 베르융을 비롯해 11인회 전원에게 분배되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냉철한 표정으로 전달받은 서신들을 재차 펼쳐가며 내용을 빠짐없이 담았고,

각자의 정보를 토대로 서로 귓속말을 나누며 핵심적인 정보들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창밖엔 때아닌 전서구들로 인한 날갯짓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곧 시종장이자 집사부의 수장인 바돈이 내 눈치를 보았다.

이는 본격적으로 회의를 진행해도 되는지, 그 동의를 암묵적으로 구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눈빛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바돈은 품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회의실 곳곳에서 둥둥 떠다니던 속닥거림이 일거에 소거됐다.

이어 정밀한 기계를 조작한 듯, 날카롭고 이지적인 눈빛들이 모두 나를 향했다.

“준비되었다면 즉시 공께 보고하시기 바랍니다.”

바돈의 말에 깁슨이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그는 이미 11인회 전체가 받은 보고를 통합, 간추리는 것까지 마친 듯 보였다.

“총 2회로 진행된 엠프리오 군의 파상 공세가 있었으나, 베르긴 경이 이를 완벽히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첫 문단이 그의 입에 맺히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안심과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베르융이 가장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회전 개시 후 크녹스 군의 지원이 적들의 퇴각에 특히 큰 역할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직전까지 탄성이 흘러나오던 좌중을 침묵시켰다.

크녹스는 딱 그런 존재였다.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어있지 않은 사람.

그렇기에 중도의 기준에서 모두에게 견제가 되는 이.

모두가 저울의 무게를 담는 접시가 되고자 한다면 그 저울이 제시하는 무게가 과연 맞는 것인지.

그에 대한 기준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저울의 접시가 아닌 중심 기둥, 저울이 제시한 기울어짐이 누가 봐도 정당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기준.

그것이 바로 크녹스다.

그것을 위해 나는 스텔라스에 그를 내정한 것이다.

스텔라스 내부 파벌화의 견제,

물론 크녹스라는 인물 그 자체 뒤에 따라오는 부담은 적잖게 클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감당할 각오 없이 스텔라스라는 조직을 만들어 운용하려는 건,

그것이야말로 지나친 오만이 아닐까.

곧바로 시선을 아래로 내린 깁슨이 다음 문단을 입에 담았다.

“베나즈령 외곽, 적들의 전진 거점을 타격하기 위해 움직인 테티르 군 역시 엠프리오 군과 격돌하였으나…,”

잠시 뜸을 들인 깁슨은 그러나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내용을 마저 읽었다.

“끝내 테티르 경이 엠프리오 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순간 높은 산이 이고 있던 한기가 이 가운데 뚝 떨어진 듯.

주위 공기는 급격히 차가워졌다.

이는 자리에 있는 그 누구의 심정이 만들어낸 냉소가 아니었다.

오롯이 나로 인한,

그로 인해 피어난 냉소였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모두가 내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으니까.

그 와중에도 깁슨은 조용히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에커즈 기사단의 지원으로 남아있던 테티르 군을 모두 구원하고 적 본대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만…,”

이어 뒤늦게 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말끝을 흐린 채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살짝 내려놓았다.

엠프리오 다르가.

베나즈 가문을 처참히 도륙한 5인방 중 하나이자, 맥레인을 믿고 이어가길 작심한 내게 있어 절대적 원수.

오롯이 제거해야 할 그 원인과 협상을 주제로 같은 책상 위에 마주 앉아야 한다.

그것만큼 분노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아니, 아니다.

순간 냉랭해졌던 내 마음은 오히려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상, 바로 포로 협상과 관련하여 엠프리오 측에 사람을 보내십시오.”

이런 돌변한 내 반응에 기지어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오히려 잘됐다.

엠프리오,

내 손으로 널 직접 쳐죽일 수 있게 됐으니까.

* * *

테티르는 매스꺼운 표정으로 고급스러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온갖 호화스러운 가구들이 정렬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햇살을 담은 조명이, 방 안엔 유순한 봄바람이 돌았다.

이윽고 화려한 방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평상복으로 보이는 가죽옷을 입은 엠프리오가 들어왔다.

“경, 몸은 좀 어떠십니까?”

“모욕을 주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포로에 대한 예우를 갖췄을 뿐입니다.”

엠프리오의 능글맞은 대답에 테티르는 조용히 어금니를 씹어야 했다.

그렇게 태연한 모습으로 테티르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은 엠프리오는,

“이제 남은 건 매듭을 어떤 모양으로 묶느냐겠지요.”

턱을 괸 채 보란 듯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포로 협상은 내가 거절할 것이다, 공께서 아주 쉬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말이지!”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건만,

테티르는 펄펄 날뛰며 윽박질렀다.

그러나 엠프리오는 그저 뱀눈을 뜬 채 실실 웃을 뿐이다.

“베나즈가, 그것도 과거 칠기사였던 기사를 버릴 거라 보십니까? 그것도 베나즈를 위해 끝까지 싸웠던 기사를?”

그녀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손뼉을 치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티르 경이 지금 하신 그 말씀조차 베나즈에겐 불충이라 이 말입니다.”

“불충…? 네년이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 거라…!”

“피차 같은 것 묻은 사람끼리 그러지 맙시다.”

엠프리오,

직전까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딱딱히 굳는다.

거기서 드러난 흉흉한 살기는 그 테티르가 내뿜는 기세를 순식간에 역전시켰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잖습니까? 베나즈를 고립시키기 위해 몸소 서쪽, 후줄근한 깃발 아래 들어가셨던 때가.”

테티르는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어찌나 이를 꽉 물었는지, 입안 상처가 다 터져 입술 밖으로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뭐, 그런 전적이 있으니 그렇게 쉽게 본인 목숨을 걸고 충성을 부르짖을 수 있는 거라 생각은 합니다.”

“너…!”

“하지만 테티르 경, 당신이 그러면 그럴수록 베나즈에겐 손해라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냥 수단으로서 행동하란 말이야. 모르겠어?”

엠프리오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겨울이 옵니다, 그것도 그냥 겨울이 아니지.”

이어지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테티르가 튀어 오르듯 따라 일어섰다.

“뭐…?!”

“앵거스, 그의 겨울이 올 거란 말입니다.”

절뚝거리며 달려든 테티르가 엠프리오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그러자 곳곳에 은밀히 산개해 있던 호위병 수십이 테티르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이에 엠프리오는 시시한 표정으로 한쪽 손을 살짝 들어 올렸고 그 신호와 동시에 호위병들은 다시금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겨울 같이 좀 지내봅시다. 우리 베나즈 가문의 귀공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차차 볼 겸.”

“전쟁은 이걸 위함이었나? 그보다…, 이번 겨울을 같이 보내자니 대체…!”

“예, 원래 큰 것에 얽히려면 그만큼 큰 것을 걸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망연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테티르를 뒤로한 채,

엠프리오는 채 답을 끝마치지 않고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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