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62화 (362/365)

362화. 엮인 것

“베르긴 경, 이쪽으로!”

리케니엔 외곽,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는 작은 대장간.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안에서 하릴없이 파이프를 물고 있던 늙은 대장장이가 반응했다.

“무슨 일이라도 났나?”

바깥에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 하여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닫혀 있던 문을 열자,

“비키시오!”

불쑥, 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병사가 대장장이를 다그쳤다.

“어어?!”

제대로 놀란 대장장이가 펄쩍 뛰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자 병사는 부축하고 있던 기사를 대장간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 기사의 모습을 확인한 대장장이는,

직전의 놀람은 어디 갔는지 날카롭게 뜬 눈으로 기사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기사를 모루 옆 작은 의자에 앉힌 병사, 아니 종자는 이제 뒤돌아 대장장이에게 물었다.

“갑옷이 일그러져 벗을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종자의 물음에 대장장이는 이미 거뭇한 소가죽 장갑을 제 손에 끼우고 있었다.

“바깥 전쟁이 있었다 들었는데, 끝난 거요?”

“끝났습니다.”

계속해서 눈치를 살피는 대장장이에게, 종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치열했으나 끝내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죠.”

종자의 말을 들은 대장장이는 그제야 널브러지듯 어색하게 앉아 있는 기사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천한 쇤네가 경을 뵙습니다.”

어색하게나마 한쪽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예를 보인 대장장이는 다시 종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보다시피 작은 대장간이라 큰 작업에 무리가 있습니다, 손을 좀 보태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종자는 혼자서 걸쳤던 사슬 갑옷을 훌렁 벗어버린 뒤 땀에 찌든 린넨 소매를 걷었다.

“물론입니다.”

* * *

“셋 하면 당기는 겁니다!”

“예!”

땀으로 범벅이 된 대장장이의 말에 바로 뒤에 있던 종자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석상처럼 앉아있는 베르긴의 투구, 안면 가리개에 걸어놓은 지렛대를 붙들고 있었다.

베르긴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 뒤쪽, 철제 막대기 따위로 만든 뼈대를 땜질해놓은 상태였기에 지렛대를 붙든 둘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하나…!”

“둘…!”

“셋!”

셋과 동시에 온 힘을 쥐어짜 안면 가리개에 껴놓은 지렛대를 잡아당겼다.

끼기긱!

난쟁이제 갑옷답게 안면 가리개조차 터무니없이 묵직하다.

그러나 둘의 치열한 협업 앞에 그 묵직함도 별수 없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사출된 안면 가리개.

그리고 그 안면 가리개를 따라 나온 핏줄기.

“허어…!”

동시에 투구 속에서 들려오는 숨고팠던 자의 한숨.

“경…!”

드러난 베르긴의 얼굴에 종자는 헐레벌떡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옆에 있던 대장장이는 덩달아 저도 모르게 종자를 따라 허겁지겁 한쪽 무릎을 꿇어야 했다.

“… 이제 좀 살 것 같군.”

이어지는 베르긴의 심심한 한 마디에, 종자는 씁쓸하면서도 끝내 기쁜 미소를 지었다.

직후 대장장이와 종자는 다시 베르긴의 남은 갑옷을 벗기기 위해 두 시간을 내리 낑낑거려야 했다.

그 난쟁이제 갑옷 곳곳에 새겨진 일그러짐을 보고 있자면, 대체 어떤 격전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대장장이는 갑옷 해체 작업 내내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리고 끝에 가선 기사를 향한 경의밖에 남지 않았다.

“베나즈 가문 덕에 제 고향이 번성했습니다, 덕분에 작긴 하지만 터전 하나를 손에 넣었고…, 요즘은 이것조차 버거운 사치라는 걸 생각하면 그저 고맙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군요. 고맙습니다.”

작업을 마친 뒤, 소가죽 장갑을 벗은 채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대장장이는 피로 범벅이 된 베르긴 앞에서 담담히 고백하듯 말했다.

그러자 베르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옷의 수리는 언제까지로 알고 있으면 됩니까?”

그의 물음에 대장장이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에 종자가 대장장이에게 눈치를 준다.

“경께서 묻고 계시지 않습니까.”

놀란 대장장이가 황급히 눈썹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머릿속 오래된 계산기를 두들겨 본다.

무려 기사 갑옷의 수리다.

그 의뢰비만도 작은 대장간으로 벌어들이는 수입과는 비교가 불허할 정도.

“난쟁이제 갑옷이나 수리할 여건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손이 부족해 꽤 많은 시간이…,”

부연을 늘어놓던 대장장이에게 종자는 다시 한번 눈썹을 치켜뜨며 눈치를 주었다.

그러면 대장장이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본론만을 대답했다.

“두 달은 걸릴 겁니다.”

“그럼 그때 찾으러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베르긴은 그대로 대장간 밖을 나섰다.

종자는 대장장이를 바라보며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곤 베르긴의 뒤를 바짝 따라나섰다.

이에 뒤늦게 지금 자신에게 떨어진 의뢰를 실감한 대장장이는 인사라도 한 번 더 보태기 위해 황급히 밖으로 뛰쳐 나왔지만…,

“어…?!”

대장간 밖으로 나간 대장장이의 눈앞엔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그 베르긴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무릎 꿇은 베르긴을 바라보고 있던 대장장이는 베르긴의 앞,

잿빛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말 위 남자의 얼굴을 채 확인하기도 전,

“귀공께 예를 갖춰라.”

그 옆에서 들려오는 근엄하고 묵직한 목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귀공이라면…,

디안 베나즈…!

대장장이는 전율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으나, 그의 삶의 전반적 반석이 되어주었던 이름이다.

곧 대장장이의 귀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일어나세요.”

그러자 베르긴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공, 어찌 이곳까지…?”

“경을 맞이하기 위해서지요, 지금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더군요.”

감미로움에 씁쓸함까지 덧대어지니 대장장이는 어느 달변가의 구슬픈 시조를 듣는 것 같은 기분까지 느꼈다.

“공께서 이렇게 맞이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명 받들겠습니다.”

건실한 두 젊음의 대화에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던 대장장이는 본인의 피가 끓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리케니엔의 박동을 책임지는 심장은.

그 심장의 성장은 아직 시작점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으니까.

“고개를 드십시오.”

이어지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대장장이의 두 귀가 쫑긋 섰다.

뒤이어 움찔거리며 고개를 조금씩 들춘 대장장이는 곧 본인에게 그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게,

대장장이는 드디어 말 위 남자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참으로 영롱하구나.

유리병 안에 담은, 청춘으로 만든 향수를 보는 것만 같다.

뭔지 모를 애틋함이 감상으로 내려앉음에 대장장이는 숨죽여 연신 감탄했다.

그런 그를 꼿꼿이 내려다보던 귀공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두들김이 이곳에 있어 다행입니다.”

직후 고개를 작게 숙인 디안 베나즈는 우아한 자태로 말 머리를 돌렸다.

* * *

“어떻게 보십니까?”

11인회의 일원, 드레마가 헐떡거리는 숨과 함께 묻는다.

그 물음이 향한 쪽엔 무심한 표정의 기지어가 있었다.

묵묵부답인 기지어에게 드레마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재차 물었다.

“공께서 베르긴 경을 직접 배웅하신 것을 보면, 이번 전투 최고의 공적은 베르긴 경 쪽으로 돌려지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그의 말에 기지어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떠졌다.

그 반응에 드레마는 펑퍼짐한 얼굴로 제법 냉철함을 드러내며 재차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들 차선으로 대승을 거둔 가버트 경도 있으니…,”

이어지는 침묵에 드레마는 본인의 발언에 무게가 실린다고 착각했는지 더욱 신난 모습으로 쉬지 않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엠프리오의 본대를 직접 타격해 큰 피해를 준 에커즈 기사단의 공적 역시 무시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아리나 경의 그 모호한 입장 말입…,”

그리고 그의 독주가 절정에 이르기 직전,

쾅!

기지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 위를 내리쳤다.

그제야 눈치를 챈 드레마는 저도 모르게 땀에 젖은 손수건을 입에 물어버렸다.

곧,

기지어가 한 치도 변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드레마를 노려보았다.

“허…억…!”

그것만으로 숨이 막힌 것인지,

아니면 본래 턱살에 짓눌려 버거워진 숨인지.

드레마는 처진 볼살을 흔들며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지어의 입이 움찔거리려는 순간, 그 둘 사이에 한 고개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깁슨,

그가 기지어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깁슨의 행동에 기지어는 한숨을 푹 내쉰 뒤 곧장 등받이에 몸을 쏟아버렸다.

여기서 드레마는 입에 물었던 손수건을 꺼내며 또 다른 착각을 했다.

무려 깁슨이 자신을 변호해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착각은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했다.

깁슨이 매서운 얼굴로 드레마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깁슨…님…?”

“드레마, 아까 그게 보기 좋았소. 그 손수건으로 아가리 틀어막는 거.”

아가리란다.

깁슨의 입에서 저런 단어가 나올 거란 것을 그 기지어조차 예상하지 못했는지,

썩 놀란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한바탕 드레마를 쏘아붙인 깁슨은 갑자기 두통을 느꼈는지 고통을 호소하며 머리를 짚어야 했다.

그의 그 모습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수석 경호원, 제이가 조용히 다가와 그에게 약과 물을 손수 건네주었다.

그렇게 약을 들이켜 두통에서 벗어난 깁슨이 자연스레 늘 그랬던 것처럼 대화의 주체가 되었다.

“공께선 엠프리오와의 회담에 직접 나설 것입니다.”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드레마는 다시 손수건을 입에 물어야 했다.

전쟁 후 공적에만 매몰되어 정말 주시해야 할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티르 론바즈.

그 테티르 경이 지금 엠프리오 측에 포로로 잡혀 있다.

그리고 그 포로를 돌려받기 위해 지금 베나즈 측에서 움직여야 하는 상황임을 아예 간과하고 있었다.

드레마는 아이베리아 출신이 아니다.

더군다나 기사를 위시한 전쟁이란 주제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그저 자본이 꽤 많은 일개 사업가에 불과했기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 집중했던 거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기업가인 드레마의 변명 사항일 뿐.

베나즈 가문의 재상, 그 재상의 기구인 11인회 중 한 명으로서 그는 마땅히 해야 할 고민을 저버린 것이다.

“엠프리오와의 협상이 어떤 방식으로 끝이 나든, 그에 대한 합당한 지불은 우리 쪽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깁슨의 말에 손가락으로 탁상을 두들기던 기지어는,

“아니, 본분을 지키다 포로로 잡힌 기사를 내세워 어떤 정치적 이득을 볼 분이 아니네.”

고개를 가로저으며 깁슨의 의견을 단번에 부정했다.

이에 깁슨은 순응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테티르 론바즈, 그의 마음이야. 우리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렇게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바깥소식을 들고 온 전령이 찾아왔다.

그는 직통으로 기지어에게 소식을 전했고, 그 소식을 전달받은 기지어는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자리에 있는 11인회 모두에게 말했다.

“회담 일자가 잡혔네, 시간은 사흘 후 장소는 베나즈령과 엠프리오령 사이 중립지역.”

과연 어떤 또 다른 엮임이 만들어질 것인가?

그 엮임은 단단한 매듭으로 지어질 수 있을까?

속으로 고뇌를 거듭하던 기지어는 끝내 한 가지 의문을 더 보태었다.

만약,

엮임도, 그로 인한 매듭도 없이 그저 잘라내고자 한다면?

하지만 그 의문은 곧 사그라들었다.

베나즈에서 그런 강경을 내놓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지,

기지어는 슬슬 베나즈라는 이름에 종속되었을 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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