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엮인 것 (2)
모든 것이 불확실한, 도박에 가까운 수들이었다.
지금까지 수놓았던 모든 것들이 말이야.
그리고 그 수들을 통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최초의 시작점은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였다.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천애고아는 길거리에서 먹고 살기 위해 자연스레 창부가 되었고,
그렇게 창부 짓을 하던 중 어느 도 넘는 손님을 만나 홧김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고아는 창부이자 살인자가 되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죽인 손님의 주머니에서 빼앗은 돈이 훨씬 중요했으니까.
그것이 내가 둔 첫 도박 수였다.
그다음은 살인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나온 조사관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도박이란 건 아주 명확하거나 아예 불투명한 것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적당한 모호함.
뭔가 펼쳐져 있을 것 같은 안개 너머로 발을 디디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나 도박은 통용될 수 있다.
그래서 조사관을 피해 도망쳤다.
그건 도박을 걸어볼 수조차 없는 불투명한 상대였으니까.
살인자가 된 고아는 창부 일을 더는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직전 도박으로 얻어낸 돈이 지금껏 창부 질을 하며 벌었던 것보다 많았음을 깨달은 고아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먼저 고아이자 소녀였던 그녀는 길었던 머리를 박박 밀었다.
창부였던 고아에게 머리카락은 아픔과 굴욕이었다, 고아를 찾는 손님 모두가 손잡이로 썼으니까.
그 굴레를 스스로 벗겨낸 고아는 이제 살인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천부적이었다.
고아의 재능은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상상 그 이상이었다.
피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증인,
어느 재판을 앞둔 법관.
이름 모를 부동산 주인.
의뢰로 들어온 그들이 누구든 고아의 재능에서 빗겨나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결정적인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
고아에게 있어 불확실한 부분이었던, 기사와 관련된 의뢰였다.
고아도 알건 알았다.
아이베리아에서 기사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천문학적인 액수를 제안받은 고아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의뢰를 받아들기 무섭게 고아는 목표 대상인 기사를 대놓고 찾아가 일련의 일들을 모두 고했다.
그래, 고아는 불투명한 것이 아닌 모호함에 도박을 건 것이다.
그리고 그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기사는 자신을 암살하란 의뢰를 받은 암살자의 이러한 행동과 포부를 맘에 들어 했다.
그렇게 기사는 고아이자 암살자였던 그녀를 종자로 거둬들였다.
그러면서 고아에게 이름이 생겼다.
출신조차 알 수 없던 고아에게 드디어 이름이란 것이 생긴 것이다.
그 이름,
엠프리오 다르가.
안개의 기사 날라스 다르가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그 이름은 그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었다.
새롭게 태어난 그녀에게 이제 돈은 차선에 불과했다.
이름을 가져보니 돈보다 더 비싼 것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지워줄 인정이 바로 그것이었고,
상관없이 자신을 드높이는 명예가 그러했다.
그것은 보이진 않지만 두 발 걷는 자들 사이에서 가장 찬란한 보석 같은 것이었다.
욕심이 났다.
그녀는 이제 기사라는 존재가 되어보고 싶어졌다.
어느 날,
평소처럼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그간 날라스에게 두터운 신뢰를 쌓아왔던 엠프리오는 그의 무기를 직접 관리하기까지 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날라스의 무기 운반을 하던 엠프리오는,
바로 지금임을 깨달았다.
도박을 걸 순간을.
날라스의 무기를 직접 관리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인챈트의 시동 권한까지 공유받은 엠프리오는,
결심을 굳힌 채 움직였다.
작은 전투, 약간의 소요를 거쳐 당연한 승리를 가져갈 줄만 알았던 날라스는 그렇게.
묘령의 전사에게 기습을 당해 허무한 죽임을 당했다.
기사의 죽음으로 당연한 승리에 패색이 짙어지고, 병사들의 낯빛이 밤보다 어두워질 때쯤.
엠프리오가 나타났다.
눈물을 흘리며 개선한 엠프리오는 날라스의 죽음에 분노하며 그를 기리듯 그의 인챈트를 발휘해 전장을 휩쓸었다.
이제 엠프리오는 기사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에 늘 그렇듯 또 다른 깃발이 나타났다.
깃발의 선두는 기사였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이름을 달고 있었다.
‘글라디움’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마주칠 일 없는 불투명함이었다.
그녀는 철저히 패배했다.
하지만 거기서 또 다른 국면이 찾아왔다.
글라디움의 뒤로 등장한 그는 마치 신과 같은 모습으로 그녀 앞에 다가왔다.
기사왕,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엠프리오에게 칠기사는 종착역이었다.
그 이상의 것들은 그녀가 극복할 수 없는, 수조차 던져볼 수 없는 불투명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 정도라면,
그래 이 정도면.
이 정도의 인정과 명예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을 보란 듯이 부정하는 이가 나타났다.
…,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이 찾아오면서 그녀는 불투명할 줄만 알았던 그 위의 것들이 어느 순간 모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
더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히 도박을 걸었다.
늘 그래왔듯.
판 위에 걸린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같은 도박을 걸려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도 대부분 그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도박판에 올랐을 것이다.
해서 끝내 마주한 글라디움은,
약했다.
터무니없이.
그때 그의 모습은 도박에 실패한 자의 말로 같았다.
그 대단한 수단이 담겨있던 두 팔을, 그간의 경험이 녹아들었을 두 팔의 피를 끓여 누적해놨던 궁극의 경험치들을 휘발시킨 글라디움은 이제 더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와 같은 자들이 넷이나 더 모여 있었으니,
글라디움에게 남은 것은 패배뿐이었으리라.
그렇게 글라디움을 부러트린 다섯은 겨울이 지나간 자리를 묵묵히 나눠 가졌다.
* * *
나는 아이베리아의 중심,
굵직한 세력 가운데 일 분의 정수 위에 서 있다.
나를 따르는 기사들 모두 아이베리아의 기사 가운데서도 대명사에 속하는 자들이며 아우르는 병사의 수만도 수천에 달한다.
수많은 깃발이 엠프리오의 상징 아래 휘날리고,
기업과 조합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들, 그들이 속한 대지는 끝없이 성장했다.
그렇게 한 지점을 선택해 세력의 번짐만을 꾀하면 될 시기에,
0이 나타났다.
돌아올 것 같지 않던 이름이 이 아이베리아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처음에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도 오래가진 못했다.
0이 보란 듯 하늘 가운데 눈을 떠 증명했으니까.
순식간에 서쪽 구석을 시작으로 범람하듯 번지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아이베리아의 중앙, 굵직한 세력을 나눠 가진 나를 비롯한 경쟁자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아니, 꿈적도 할 수 없었다.
서로가 틈이 생기면 언제든 그곳을 들쑤실 자들이었으니까.
그 경쟁이 불러온 공동의 부동이,
결과적으로 베나즈의 이름을 점점 비대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중앙의 균형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벨리반즈,
그의 깃발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공백을,
그와 인접해 있던 나로선 가만히 방치할 수 없었기에 자연히 흘러 들어가 대부분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경쟁 세력이 움직일까 노심초사하며 던진 도박 수였으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확실했다.
베나즈와 0이라는 변수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 변수 앞에 부동 대신, 도박을 걸기로 했다.
늘 그랬듯이!
그리고 결국 피해는 막심했으나 이번 전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쟁취해냈다.
테티르,
그를 포로로 잡음으로서 베나즈와의 엮임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 엮임이란 건 참 무서운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도박을 건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0과 베나즈는 지금 당장 불투명한 것에 속해있지만,
그 외의 것은 모호하니까.
첫째, 지금의 베나즈가 과거의 모든 일을 알고 있을까?
0의 찬탈이란 오명을 벗기 위해 나타난 베나즈다.
그 대목적으로 일어선 베나즈는 명확한 출신도 태생도 불분명한,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다.
그런 그가 베나즈에 얽혀있는, 아니 글라디움이 얽혀있는 사정들을 알고 있을까?
그를 무너트린 다섯 비수를 아느냐 이 말이다.
둘째, 지금 일어선 베나즈는 정말 베나즈가 맞는가?
이 모든 것이 그저 운 좋게 0을 손에 넣은 관심 종자가 벌인 일이라면?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직접 두 손으로 죽였다.
베나즈의 유일한 씨앗을.
그리고 그 씨앗을 품을 땅까지도.
이 선명한 증거는 나 말고도 다른 네 명이 기억이란 이름 안에 간직하고 있다.
부러져 절망한 베나즈가 기꺼이 발정해 씨를 뿌렸을까?
그렇게까지 추해져서라도 오명을 벗고 싶었을까?
아니!
지금의 베나즈는 글라디옴의 씨가 아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듯이 그는 베나즈의 사정과는 거리가 먼 존재.
이로써 나타난 모호함에 난,
도박을 걸 것이다.
해서 또 성공할 거다.
지금까지 증명해왔으니까.
셋째, 그래도 결국 우리에겐 패가 있다.
테티르, 그를 포로로 잡은 이상 베나즈는 우리와 협상이란 주젤 탁상 위에 올려놓고 대화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베나즈 역시 그 비대해진 세력만큼이나 내부적으로 엉킨 이해관계가 아주 많을 것이다.
테티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와 연관되어있을 이해관계의 실타래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엉키게 될 테지.
해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예상한, 또 원하는 대로.
베나즈여,
나와 불편한 엮임으로 풀리지 않는 매듭을 지어보자.
* * *
“이투,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한쪽 팔을 잃었음에도 벌써 회복을 마친 이투가 씩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팔을,
그것도 갑옷째로 잘라낼 줄이야.
베커드…,
그런 이름을 가진 기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이여, 지금까지 그런 괴물을 잘도 감춰놓았구나.
“케린, 준비는 다 되었나.”
“예.”
케린은 엠프리오 군에게 있어서 핵심이라 불릴 정도로 귀한 인재다.
그 희귀한 인챈트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전술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니까.
“회담장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걸릴 겁니다.”
케린의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참, 이란의 자리는?”
깜빡하고 넘어갔을 부분을 짚었다.
이란,
나쁘지 않은 자였는데.
뭐, 잃은 것에 언제까지고 매몰될 순 없지.
내 물음에 이투가 덤덤한 말투로 답했다.
“두 기사가 물망에 올라와 있습니다, 회담을 마친 뒤에 그 둘을 가려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지.”
인재야 아이베리아에서 가장 찾기 쉬운 것이니까.
나는 경쾌히 박차를 가해 앞으로 나아갔다.
이에 이투와 케린, 두 기사가 내 양옆을 바짝 따랐다.
베나즈,
곧 그와 있을 대망의 회담장을 향해서.
* * *
광활한 평야.
그 가운데 단출하게 차려진 개방형 천막.
안엔 작은 탁상과 의자 두 개.
그리고 각 의자 뒤쪽에 깃발이 박혀 있었다.
상호 간의 긴장 속에서 설치된 그 회담장 주위, 아니 일대엔 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정상의 회담인 이상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철저한 보안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저한 통제 속에 놓인 회담장은,
분명 자연 한가운데 박혀 있었으나 그 모습만큼은 인위적인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점점 긴장감으로 기류가 무거워지는 가운데,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엠프리오령 쪽이었다.
이투와 케린을 대기시킨 뒤, 홀로 유유히 천막을 향해 걸어온 엠프리오는 아직 오지 않은 베나즈의 공석을 한참 내려다보곤 여유롭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반대편, 베나즈령 쪽에서 한 사람이 회담장을 향해 걸어온다.
대기하는 호위도 없는 것을 보니,
“하…, 단신으로 온 건가?”
엠프리오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피식 웃었다.
만일 그가 한낱 관심 종자라고 해도 그 포부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그렇게 점점 다가오는 베나즈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선명해질수록.
엠프리오는 자신의 말라가는 입술을 바삐 적셔야만 했다.
제일 먼저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엠프리오, 그녀는 다가오는 베나즈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타구니에 근질거림을 느꼈다.
그만큼 베나즈의 외모는 생리적 파괴력이 엄청났다.
그렇게 비어있는 본인의 자리 앞에 우뚝 선 베나즈는,
엠프리오를 빤히 바라보면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회담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