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64화 (364/365)

364화. 침묵의 회담

“홀로 회담장으로 가셨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베나즈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이른 아침, 불쑥 찾아온 기지어의 날 선 외침에 마주 서 있던 바돈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결정이 났네.”

“결정? 공께서 그리 결정하셨다?”

“그래.”

“공을 보좌하는 기사들은 뭘 한 건가!”

“그들이 뭘 한다고 해서 공께서 하신 선택이 바뀌는 건 아니지.”

“그런 위험한 단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지 말게, 시종장인 자네에게 더 큰 실망을 느끼기 전에.”

기지어는 기가 찼는지 뒤돌아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금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했다.

“나는 재상이야, 시종장! 깃발의 중요한 결정이 맺어지는 그 과정에서 어찌 내가 배제되었냔 말이야!”

“재상, 주변에 보는 눈이 많네…, 안으로 들지.”

기지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다가 마지못해 바돈의 안내에 따랐다.

집사부는 엄연히 베나즈 내 권력 서열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조직이다.

그런 집사부의 수장인 바돈이 같은 권력 최상위권인 재상 기지어와 대외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기지어는 일반인이라면 쉬이 진정하지 못할 분노를 차갑게 식힌 것이다.

그렇게 접견실로 들어선 기지어는,

이미 그곳에 자리한 조이와 베르융을 발견하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기지어가 찾아올 것을 알았다는 듯, 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상 재상에게 하는 예를 갖춘 뒤 자리를 권했다.

다리 한쪽이 불편함에도 성큼성큼 다가와 빈자리에 앉은 기지어는 이제 따지는 듯한 태도로 둘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입을 열지 않자,

기지어는 냉정한 표정으로 둘을 향해 쏘아붙였다.

“재상의 직권적 권한으로서 묻겠소, 거부한다면 모든 기관의 참관이 가능한 청문회를 열 거요.”

그러자 이마를 짚고 있던 베르융이 입을 열었다.

“회담 일자가 정해진 순간부터 이미 공께서는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무슨 결정을 말하는 거요?”

“회담에 홀로 나서는 것 말입니다.”

기지어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거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회담이 어디 시장바닥에서 벌어지는 회담이었던 겁니까?”

이에 옆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조이가 막 접견실 문을 닫으며 들어오는 바돈을 확인하곤,

낀 팔짱을 푼 채 상체를 기지어쪽으로 기울였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고.”

“그건 또 대체 뭔 소립니까?”

기지어의 신경질이 이어지는 와중, 바돈이 마지막 빈자리를 채웠다.

“재상, 이건 베나즈 가문과 관련된 일입니다.”

이어지는 조이의 말에 기지어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문의 일…?”

베르융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전쟁이 가문의 일과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기지어의 계속된 물음에 바돈이 즉답했다.

“전쟁을 일으킨 주체 쪽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엠프리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뭔지 모를,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기지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공께선 무엇을…?”

기지어의 물음에,

베르융은 자세를 고쳐 앉곤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답했다.

“재상, 공께서는 회담이 아니라 처형을 하러 가신 거요.”

* * *

기지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한동안 침묵했다.

바돈, 조이, 베르융.

이들은 모두 과거부터 베나즈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인사들이다.

그렇기에 그들 사이에 조성된 감성은,

냉정히 따지면 철저한 외부인인 기지어가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 해도 개입할 틈조차 없다.

그렇기에 저 셋으로부터 형성된 공감이란 벽 앞에 기지어는 할 말을 잃은 것이다.

대국적인 관점,

그 전에 가문의 관점이라.

기지어는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저 셋은 기지어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기지어였기에 우선 그가 바라보고 있는 대국적인 관점부터 저들에게 짚어주기로 했다.

“테티르 경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테티르는 베나즈의 기사들 가운데서도 그 입지가 대단한 존재다.

동시에 기사로서 재상의 세력, 그 선두에 서 있는 자이기도 하다.

가문의 일로 대국적인 관점에서 쓰여야 할 말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 후폭풍은 앞으로 계속해서 험난하게 불어닥칠 것이다.

정치적으로 내부에 적을 만들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한 행위로 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로,

베나즈 측 인사들이 그저 강력으로 밀어붙인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전자와는 달리 더욱 치열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서로의 피를 봐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

기지어의 질문에 세 사람은 모두 장고를 거듭했다.

그에 대한 답은 구했으나, 그 답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끝내 베르융이 입을 열었다.

“처형이 끝난 직후 엠프리오 쪽 내부의 모든 결정순위는 엉키게 될 겁니다, 그 가운데 우리 측과 우호적인 기사 하나와 접촉해 테티르를 빼 올 생각입니다.”

“그럼 실각한 엠프리오를 대신해 그 기사가 영지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베나즈 가문이 지지를 해주겠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그로 인해 발생할 또 다른 적에 대해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기지어의 물음에 조이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상, 그 어떤 길로 가든 적은 계속해서 생길 뿐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차선의 차선을 선택해 나아갈 뿐이지요.”

“그래서, 미지수로 가득한 그 회담장에 공을 홀로 보낸 겁니까? 가장 가까이서 수행을 해야 할 기사들이?”

기지어의 반발에 베르융의 언성이 높아졌다.

“기사의 일이니까요, 기지어.”

“기사의 일…?”

“조이 경이 말 한대로, 재상은 이해하지 못할, 이해할 필요 없는 영역을 말하는 겁니다.”

“허…!”

기지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재차 입을 열 찰나,

베르융이 그를 올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재상, 재상은 디안 공에게서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그 말에,

기지어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제풀에 쓰러지듯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기지어에게 베르융은 재차 물었다.

“재상, 재상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 대국적인 관점을 절대로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극히 기사 적 관점이 필요한 이 상황에서도 그것을 고집한다면…,”

아니, 기지어가 오히려 되물었다.

“그럼 베르융 경은 디안 공에게서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언제까지 무책임하게 기사적 관점으로만 그분을 바라보실 거냔 말입니다. 그 이후는? 모든 상황이 끝난 그다음은?”

아니다, 베르융이 질문한다.

“그다음은? 재상, 그다음으로 뭡니까? 디안 공에게서 뭘 본 겁니까?”

기지어는 담대하게 답했다.

“왕조.”

그러자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바돈과 조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끝내 흔들림 없는 반응으로 일관한 베르융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답했다.

“그렇다면 더욱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그다음이란 국면이 올 때까지.”

베르융의 그 석상과도 같은 굳건함에,

기지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과연,

만만치 않은 자로다.

“그전까지, 그러니까 지금 기사로서 이 땅을 밟으신 디안 공께서는 베나즈 가문의 후계로서 마땅히 가문이 해소하지 못한 일을 위해 움직이실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기지어는 머리를 매만지며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디안…, 아니 맥레인 베나즈…, 그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겁니까.”

그러자 조이가 이를 갈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것은,

다섯 이름이었다.

‘레버드’

‘잘란’

‘엠프리오’

‘가헨’

‘프리메’

* * *

엠프리오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건너편,

무심히 앉아 있는 베나즈는 마치 인형처럼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압박감 또한 엄청났다.

그저 관심 종자로 치부할 게 아니다, 저 베나즈는.

지금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베나즈는.

가지고 있는 저 특유의 기세만큼은 진짜다.

그것을 실감한 엠프리오는 바싹 마른 입을 축이기 위해 탁상 위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었다.

맥레인, 그의 대를 정식으로 이어받은 것으론 보이지 않아.

그 지옥과도 같은 상실의 낭떠러지 속에서 대를 잇기 위해 움직였을 리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저 빚은 듯한 아름다움은…,

그래, 베나즈의 씨를 품은 그 여자에게서 나올 법한 것이긴 하지만 그녀와 태중의 씨는 완벽히 제거했다.

고로 저자는 베나즈의 피를 이어받은 적장자는 아니다.

물잔을 내려놓은 엠프리오는 그러나 당당한 자세를 꼿꼿이 유지한 채,

여유로움을 뽐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르가, 엠프리오요.”

이에 베나즈는 넌지시 엠프리오를 노려보았다.

“뭐, 굳이 통성명을 나눌 필요는 없겠지요. 특히나 이런 회담 자리에서는.”

엠프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원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전쟁의 과실을 따지면 선공을 한 우리 쪽이 큰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만, 그쪽의 기사 테티르 경이 우리의 포로인 이상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하지요. 이견, 없습니까?”

그녀의 물음에도 베나즈는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디안 베나즈, 그 침묵이 나중에 무겁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그녀의 날 선 경고에도,

베나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엠프리오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알았다는 듯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아 뭐 테티르 경의 석방이겠지만은…, 그럼 이편이 쉽겠군요. 제가 원하는 것은…,”

“레버드”

디안의 입에서 처음으로 맺힌 말.

그 말은,

엠프리오의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잘란”

“…그건!”

“가헨, 프리메.”

“하, 알고 있었나.”

모호함에 건 기대가 저버려진 것에 대해,

엠프리오는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맥레인의 부러짐, 그 과정을 모두 알고 있었던 거야.

“…엠프리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이 회담이 마련되어야 했던 이유, 지금의 덩치를 가진 너로서는 나와의 엮임으로써 헤쳐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자신감으로 엠프리오는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 판단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디안의 말은,

그녀의 그 어떤 예상도 철저히 부숴버렸다.

“그 다섯 가운데 하나가 비로소 오늘 죽는다.”

“자루에 손을 대는 순간 테티르는 죽어.”

“그리고 너도 죽겠지.”

디안은 조용히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에 맞춰 엠프리오 역시 의자 옆에 기대놓은 두 자루의 검을 재빨리 뽑아 들었다.

글라디움은 죽었다.

설령 그가 베나즈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한들 그 말도 안 되는 재능을 완벽히 개화시켰을 리도 없다.

해볼 만한 싸움일지도…,

…,

…!

엠프리오는 자신의 고개가 꺼져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푹 꺼진 상체, 그리고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안면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핏줄기.

버거운 기분에 숨을 들이켜 보면,

코에서 낯선 위화감이 느껴진다.

아,

코가 베였다.

엠프리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

본능적으로 두 칼을 교차하여 든 엠프리오가 본인의 비전을 펼치려는 찰나,

그녀의 눈앞에 은빛 섬광이 한 차례 터져 나왔다.

“…으…악!”

그렇게 뒤늦게 충격을 받고 비틀거린 엠프리오, 그녀 앞 탁상 위엔 막 베여 떨어진 본인의 손가락 세 개가 나뒹굴었다.

글라디움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맥레인 베나즈 그 아래 있는 강함이지만, 그 결은 그가 내뿜는 것과는 정반대에 위치 해있다.

같은 이름에서 이리도 모순적인 상극이 어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윽고 다시 은빛 섬광이 번뜩이자 이번엔 엠프리오의 왼쪽 팔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그녀가 들고 있던 검 역시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아.”

단말마를 내뱉은 그녀가 중심을 잃고 상체를 탁상 위에 쏟는다.

“실패네, 도박.”

짧은 말을 내뱉은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던 디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새비안을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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