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노래는 절정으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일이었건만,
두 기사는 마치 신기루를 보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뭐가…?”
이어 뒤늦게 케린이 이투에게 따지듯 물었지만,
“어….”
이투 역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떤 말도 쉽사리 내놓지 못했다.
회담장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붉음의 출처는…,
엠프리오.
비록 그녀가 선행된 전설에 가려진 후발 세대였다곤 하나, 엄연히 칠기사 중 하나였던 이다.
만, 아니 십만 가운데서도 꼽기 힘들 그런 재능의 영역에 발을 걸친 이란 말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재능을 가진 기사가,
방금 도륙당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엠프리오의 곁에서 그 재능을 절절히 느껴왔던 두 기사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장면이 지금 펼쳐진 것이다.
이투는 반사적으로 안장 가방에 채워져 있는 워 해머 자루에 손을 얹었다.
감정적 영역 그 이전에 발휘된 생리적인 반사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을,
케린이 단호히 틀어막았다.
“이투…!”
결연하기까지 한 그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투가 고개를 움직인다.
그렇게 이투가 바라보는 케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모습이었다.
“가야 해, 아니…,”
그녀는 바짝 마른 입술로 자신이 했던 말을 정정했다.
“도망쳐야 해.”
케린의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회담장 쪽을 응시했다.
…,
어느새 베나즈는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다.
기민한 쥐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맹금의 시선을 느끼듯, 두 기사는 베나즈의 시선에 온몸이 바짝 곤두서버렸다.
잡아먹힌다.
그 압도적인 공포감, 무력감에 가뜩이나 한쪽 팔이 없는 이투는 균형을 잃고 한바탕 상체가 기울어지기까지 했다.
“… 지금!”
케린은 신호와 동시에 말머리를 돌렸다.
이투 역시 한 박자 늦게 그녀를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이 정도 거리 차라면 절대로 추월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 수준의 명마라는 것.
이대로 엠프리오령에 다다른다면 제아무리 베나즈라도 추격을 이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박차를 가해 순간 전속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는 둘.
이 중 후미를 자처한 케린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둘러 뒤를 바라보았다.
“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별안간 베나즈는 바로 뒤에 있었다.
그것도 바짝 따라붙은 채 언제라도 추월할 수 있다는 듯 한참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케린!”
뒤이어 앞에서 이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 듯 보였다.
이를 안 케린은 뒤를 돌아본 그 상태로 이투에게 소리쳤다.
“이투! 앞으로 계속 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말없이 안장에 채워져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동쪽 바다를 건너온 외날 검.
그리고 그 외날 검의 기술적 정수로 벼려진 그녀의 검술.
‘금막’
그 첫 번째 수가 막 그녀의 손에 일발 장전되었다.
언제든, 베나즈가 치달아 올라오는 그 상황에 맞춰 휘두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베나즈는 고삐를 두어 번 치대는 것으로 너무나 쉽게 케린과 나란히 섰다.
대체 저 말의 씨앗은 무엇이기에 바람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인가!
하지만 이미 추월 된 것, 눈앞에 맹수를 두고 그것에 매몰되는 것은 사치다.
금막 1장,
베 오르기.
초심으로 돌아간 양, 속으로 자세 이름을 외친 케린은 베나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 맺히는 그 동작은 금막이란 검술이 가진 특유의 유려함을 증명하는 어떤 증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유려하고도 변덕스러운 궤적은 선공을 가져갔을 때 절륜한 위력을 발휘한다.
제아무리 베나즈의 후손이라고 해도…!
“흠!”
케린은 기합과 동시에 손목에 힘을 주어 더욱 속도를 높여 휘둘렀다.
그리고 이내 해당 동작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두 눈은 휘둥그레져 있었다.
검 끝,
그 끝에 보기만 해도 동공이 오므라들 정도로 시린 칼날이 얹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무게감도, 반발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야말로 위에 구름이 포개어진 듯한 가벼움, 고요함.
이윽고,
그녀의 검 끝에 얹어진 베나즈의 검이 길로틴의 그것처럼 그녀의 칼날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휙 ──── !
귀를 찢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이투는 그것을 분명히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
그 소리에 홀린 이투는 직전 케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문 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두 눈에 들어온 광경은.
“아…!”
말끔히 잘린 케린의 머리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이건,
도축이다.
이투는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바로 뒤에,
그 유명한 아이베리아의 한시적 절대가 있다.
극복할 수 없음을 느낀 이투는 죽음 앞에서 초연한 난쟁이들 특유의 종족적 감성을 내뿜으며 조용히 잡았던 고삐를 놓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로 옆까지 다가와 나란히 달리고 있던 베나즈는 망설임 없이 이투가 타고 있던 말의 앞발을 검으로 후려쳤다.
날이 아닌 면으로 두들겨 그대로 안장 위에 있던 이투를 쏟게 한 베나즈는,
조용히 멈춘 뒤 말에서 내렸다.
한바탕 바닥을 나뒹군 이투는 먼지 속에서,
“커헉… 헉!”
거친 기침을 내뱉으며 겨우 몸을 추슬렀다.
그렇게 엎드린 채 주변 상황을 살피던 이투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면,
“헉…!”
태양을 등진 거목 하나가 조용히 서 있다.
그림자에 드리워 베나즈의 정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던 이투는 그 때문에 더욱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제,
이투는 고개를 떨군 채 다가올 상황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런 그의 앞에,
슥 ─
작은 움직임만으로 바람을 가르는 검날이 내밀어졌다.
그러나 베나즈가 내민 검의 모습은 이투를 베기 위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저 보라는 듯,
엠프리오와 케린의 피로 얼룩진 검을 내민 것이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이투가 다시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태양을 등진 채 서 있던 베나즈는 이투에게 명령했다.
“닦아.”
그 말 속에 무슨 뜻이 들어 있는지,
이투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본인이 모셨던, 또 본인과 나란히 했던 것들의 피를 스스로 닦아 충성을 보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투는 다시 고개를 떨궜다.
“굴욕 대신 죽음을 주시오.”
그리고 의연한 마음으로 결심을 내뱉자 베나즈는 고민 없이 검을 치켜든다.
이건 아닌데.
중간에 조금이라도 다른 기류가 흐르길 바랐는데.
이투는 순간 아연실색한 채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그런 고개를 든 이투에게, 사신처럼 검을 치켜든 베나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려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몸에 피가 튄다.”
“말 해 보시오.”
“뭐를?”
“그 검에 묻은 피를 닦는다면, 엠프리오령에 있는 식구들은, 자유민들의 안전은 보전되는 것이오?”
간절한 이투의 물음에 베나즈는 고민했다.
진정 다 죽여버릴 속셈이었나 싶을 정도로 베나즈의 그 잠깐의 침묵은 이투에겐 아주 두려운 것이었다.
“엠프리오를 부정한다면.”
“부정한다면…?”
“없던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리하겠다.”
“제아무리 베나즈라 해도 기록 말살이란 불명예를 그리 쉽게 줄 수 있을 줄 아시오?”
“그걸 하기 위해 지금 내가 이곳에 왔지.”
“…,”
“가문의 일이다, 너희 같은 놈들이 중간에 낄 자린 없어.”
“우린 기사요.”
“기사였나, 너희가?”
이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베나즈의 그 비아냥은, 곧 실현될 거란 믿음으로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것이 부정 당한다.
그는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투 가르크란 기사는 애초에 아이베리아에 없었다고, 엠프리오란 깃발은 일어선 적조차 없으며 케린이란 여인은 그저 야생에서 개죽음을 당해버렸다고…,
마침표를 찍어버릴 것이다.
이투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살핀 베나즈는 들었던 칼을 조용히 내렸다.
그리고 다시 이투에게 내밀었다.
“닦아.”
이투는 이제 굶주린 개처럼 재빨리 기어 그 검에 다가갔다.
그리곤 소매로 드러난 사슬 갑옷을 거두고 안의 린넨을 끄집어 검을 닦기 시작했다.
검의 날카롭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린넨이 그대로 베어 갈라져 버렸다.
심지어는 이투의 손 곳곳에 베어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했다.
결국엔 닦기는커녕 본인의 피까지 묻혀버린 꼴이 되었지만 그러한 이투의 행동에 베나즈는 내밀었던 검을 잠자코 거두었다.
“내일이다, 9시까지 테티르 론바즈를 석방해라. 그 시간에 테티르 론바즈가 베나즈령에 없다면 전군을 이끌고 섬멸전을 시작할 것이다.”
이투는 엎드린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새벽.
석방된 테티르는 티히트라로 복귀했다.
엠프리오라는 이름 아래 규합되었던 네 개의 깃발은 자연스레 분열되었지만,
그 가운데 기사 베실이 이끄는 세력만은 건재한 모습으로 독립했다.
사흘 뒤,
테티르 군과 가버트 경이 엠프리오령에 들어서며 공식적 함락을 선언했으며.
불과 이툴 만에 엠프리오 다르가는 해당 땅의 금지어로 굳어졌다.
점령 7일 차,
엠프리오와 네 기둥이 쌓아놓았던 모든 역사적 기록들을 불태워 이제 그 흔적은 아이베리아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과거,
맥레인이 겪었던 것처럼.
* * *
“엠프리오가 패배했다…?!”
가헨 레바르도는 병사의 보고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직전, 벨리반즈의 휘하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베나즈는 자신의 가문 선에서 도모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부턴 얘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커도 너무 커졌다.
엠프리오가 무너졌다면 베나즈가 서쪽 전반을 아울렀다는 소리.
그 말은 즉…,
이제 언제든 성지를 탈환하려 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만약 베나즈가 성지를 탈환하고, 아이베리아 중앙의 실세가 되어 가문에 얽힌 일을 공표한다면.
그 기정사실 급의 공표로 벌어지는 파장은 실로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파급력이 클 것이다.
한때 앙 실러 데우스에 의해 벌어졌던 1차 마녀사냥과 같이,
베나즈에 오명을 덧씌운 자들을 대상으로 한 2차 마녀사냥이 벌어질지도…!
“허…,”
이젠,
숨어야 한다.
저 거대해진 베나즈로부터 레바르도 가문은,
숨죽인 채 살아가야 하는 신세에 놓인 것이다.
* * *
북쪽, 리시론.
거대한 황금 깃발 하나가 펄럭인다.
그 아래엔 수십 개의 각기 다른 깃발이 춤을 췄다.
춤추는 깃발들은 하나하나가 리시론 내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상징들이었다.
그런 상징들을 보란 듯 아우른 황금 깃발 아래엔,
어두운 금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 있다.
그의 시선은 남쪽.
아이베리아 중심을 향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뒤쪽에서 한 기사가 다가왔다.
“공, 겨울을 작심하신 겁니까?”
그럼 어두운 황금 갑옷을 입은 이는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 본다.
“내린 겨울에 시르아가 가만히 있을까.”
“빌 경을 내리시면 어떠실지요.”
기사의 조언에 황금 갑옷을 입은 이가 작게 웃는다.
“빌이라…, 나쁘지 않지.”
겨울,
앵거스.
그는 그렇게 뒤쪽에 도열한 8만의 대군을 가르며 더욱 차가운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 거대한 움직임은 단지,
겨울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민 것에 불과한 것이었으리라.
-4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