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양심이 있으면
그러나 황녀의 대답은 다시 한번 내 예상을 빗나갔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네. 그저 본녀의 호의였을 뿐이니, 마음 깊이 감사하도록.”
남들이 들으면 굉장히 생색을 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도움을 받아놓고 별다른 보답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감사로 충분하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가?
내 안에서 황녀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점점 상승했다.
“그러면, 이 은혜 각골난망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다른 보답 없이 말로 때울 수 있다니, 절대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황녀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역시,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다르군.”
“그거 혹시 제가 사양 없이 넙죽 받아들였다고 돌려까시는 겁니까?”
“…그런 의미도 약간은 있다. 그대는 신기하다. 다른 이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기 바쁜데, 겨우 백작가의 자제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 말이야.”
방금 건 절대 비꼬는 게 아니었다며, 그녀가 덧붙인다.
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던 내 기준에서는 오히려 이 세계의 사람들이 더 이상했다.
그들이 황족에게 보이는 충성심 따위,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아무튼, 그대와는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좋겠군. 이번 일은 그러기 위한 내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도록.”
“회장님께서 어째서 저와 친해지려고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야 영광입니다.”
진심이었다.
영광이라는 부분이 진심이 아니라, 어째서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부분이.
내가 평범한 귀족가의 자제였다면, 그녀가 나를 자기 파벌에 들이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귀족 자제들로 자신의 파벌을 형성하는 것은, 그녀와 황위 경쟁을 벌이는 황자도 이미 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몇 번이고 말했다시피, 나는 발렌슈타인이다.
발렌슈타인 가문을 파벌에 들이는 것은 황녀의 이미지에 큰 손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왜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어려웠다.
“그런데 어째서 회장님이 저 같은 것과 친해지고 싶어 하시는지…”
“친해지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
뭐,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다.
내가 다음 말을 고르고 있던 중,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아니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대가 나를 위해 할 일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게 뭡니까?”
“…앞으로는 내 말을 무시하지 말도록. 저번처럼 먼저 일어선다든가, 말이지.”
잠시 망설이던 황녀가 그리 말했다.
나는 새삼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이 황녀, 아무래도 그저께의 일을 많이 신경 쓰고 있었나 보네.
아무래도 황녀의 지위이니 그런 황당한 일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으려나?
물론 그렇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내 속마음과는 달리.
내 얼굴은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크윽…! 웃지 말고, 대답이나 하거라!”
“아, 네… 크흣!”
“이, 이게 진짜로!”
황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황녀는 내게 말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군. 그대가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예? 그건 무슨 의미이신지.”
“아니, 영상으로 본 그대의 모습은… 늘 찡그리고 있고, 입에는 욕설을 달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야, 그 개 같은 년들이랑 있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황녀와 대화하는 지금의 모습이 내 원래 성격이란 말이다.
아마 그렇게 욕으로라도 풀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몇 달 전에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졌으리라.
그치만, 황녀의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대신에 화제를 돌렸다.
“근데 제가 나오는 영상을 전부 확인하신 겁니까? 어째 말하시는 걸 들으면 그런 것 같은데…”
“시, 신경 꺼라.”
그렇게 말하고서 재빨리 사라지는 황녀였다.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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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수업도 오전과 마찬가지로, 집중을 하기에는 글렀다.
오전에는 펠리체였다면, 오후에는 황녀가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녀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도와준 이유가, 나와 친해지고 싶은 그녀의 호의라는 것은 이해했다.
그러나 어째서 제국의 황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를?
발렌슈타인 가문이 가진 막대한 영지와 재산은 대부분 몰수당했고.
황제를 도와 제국을 세운 세 공작가 중 하나라는 명성은, 이미 반역자라는 오명으로 뒤덮였다.
이전의 발렌슈타인 공작가라면 몰라도.
지금의 발렌슈타인 백작가를 그녀의 파벌로 끌어들이는 것은 명백한 악수다.
‘뭐, 황녀도 어련히 생각이 있겠지.’
그게 나와 내 계획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충분하다.
이 세계에서의 행복한 삶을 누리겠다는 내 계획 말이다.
그렇게 황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오후의 수업도 전부 끝났다.
주변에서는 나를 힐끔거리며 수군대는 소리가 대놓고 들렸다.
아마 오늘 식당에서 황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 때문이겠지.
하, 이래서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한 거였는데.
평소처럼 그냥 무시하려고 했으나.
오늘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진짜 사람을 앞에 두고서 단체로 저러다니, 이건 당해보면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예의 없는 족속들.
심지어는 내가 황녀 파벌에 들고 싶어 그녀에게 알랑거린다느니, 그딴 소리도 지껄인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인성 파탄자로 소문이 날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아니, 잠깐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여기에서 더 떨어질 평판이 있나?
그래서, 그냥 소리쳤다.
“다 닥쳐라!”
“히익!”
순식간에 수군거리던 놈들이 입을 다물었다.
근데 방금 ‘히익!’은 누구였지.
분명 남자 목소리였는데, 사내새끼가 ‘히익’이 뭐냐 ‘히익’이.
내가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방금 그 새된 비명의 주인공.
레오 엡실트가 있었다.
뒤에는 내 이전 파티원들을 거느리고 말이다.
“큭!”
내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내가 소리 지른 거에 놀란 거냐?
병신 같은 새끼.
내 비웃음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레오.
그가 내게 나지막이 말한다.
“루이 발렌슈타인, 따라와라.”
그러고서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를 돌아 걸어간다.
나는 보란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내게 와서는 으르렁거린다.
“따라오라고 했다, 루이 발렌슈타인. 할 말이 있다.”
뭐, 이 정도 놀렸으면 충분하다.
무슨 일인지는 충분히 예상이 간다.
과연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일지 궁금했기에, 나는 그를 따라 교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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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엡실트와 내 이전 파티원들은 나를 교사 뒤편으로 데리고 갔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가 내 멱살을 잡는다.
“루이 발렌슈타인!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야, 지금 누구 몸에 손을 대. 또 바닥에서 구르고 싶어?”
“비열한 수로 이겨 놓고서는, 부끄럽지도 않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며시 내 멱살을 놓는 레오 엡실트였다.
“우리가 파티에서 추방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
“그래요! 당장 취소하세요!”
악을 써 대는 레오 엡실트와, 그 옆에서 앵앵거리는 성녀.
나를 진심으로 빡치게 만드는 조합이었다.
평소처럼 욕을 박을까 했지만, 아까 있었던 황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도 영상에서 내가 입만 열면 욕이라고 지적했었고.
실제로 그녀와 대화하는 중에도 몇 번 실수할 뻔했다.
지금 눈앞의 이것들과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험해진 입이었으나.
생각해 보면, 이딴 것들 때문에 내 어투가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욕설 없던 이전의 말투로 돌아가려 노력했다.
“무슨 말이냐니? 이 파티의 핵심도 나고, 계획을 짜던 것도, 전투를 하던 것도 전부 내가 중심이었는데. 나가려면 니들이 나가야지.”
“헛소리하지 마라! 전투는 전부 이 몸의 몫이었건만! 네 놈은 파티의 성장을 방해하는 짐덩이, 그뿐이었다!”
“그래요! 다른 파티원들에게 묻어가기만 하던 당신이었는데, 양심이 있으면 그런 소리는 하면 안 되죠!”
레오와 성녀의 완벽한 콤보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저것들은 용사 성녀가 아니라 탱커를 해야 한다, 저렇게 완벽한 도발이라니.
양심? 양시임?
“세상에, 나처럼 양심 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그래? 가진 양심이라고는 죄다 교단 헌금함에 처박아둔 썩어빠진 사제 놈들보다도 못한 년이.”
내가 한껏 비꼬아 말하자, 에스더의 기세가 무섭게 변한다.
“당신, 지금 교단을 모욕한 건가요?”
“그거 알아들을 머리는 있어서 다행이네.”
“이건 정식으로 교의 사제들에게 알려서…”
“사제가 아니라 니들 여신한테라도 알리시든가. 근데, 가능은 하냐?”
내 입에서 여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에스더는 진심으로 분노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건 내가 원했던 것이다.
항상 나만 빡쳤으니, 이제는 내 기분도 조금 느꼈으면 좋겠다.
“난 항상 너처럼 남자한테 앵앵거리는 년이 성녀라는 게 안 믿겼거든?”
내가 늘 레오의 곁에 붙어있던 그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디 오늘 한번 확인해 보자고. 사실 성녀가 아니었으면 여신이랑 대화도 못할 테고, 대화가 가능하다면 너 같은 창녀를 성녀로 뽑은 교단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내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 말에.
마침내, 분노한 에스더가 성력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