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검은 고양이 네로
“후우…”
나는 힘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오늘 일이 잔뜩 있었는데, 그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버렸다.
“아아악, 진짜!”
나는 혼자서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니, 혼자인 줄 알았는데.
“히익!”
누가 있었나 보다.
‘아, 쪽팔려.’
나는 다급하게 얼굴을 가렸다.
힐끔 보니, 깜짝 놀란 여생도 하나가 도망치고 있었다.
백발의 여생도 하나가…
‘잠깐, 익숙한 뒷모습인데?’
생각해 보면, 아이네도 백발이었다.
머리카락의 길이라든지, 아니면 체구도 비슷한 것 같고…
아니, 착각이겠지.
아이네는 아까 레오 놈을 따라 갔으니까.
판타지 게임이 현실이 된 세계 아니랄까 봐, 총천연색의 머리칼들을 가지고 있는 생도들이다.
백발이나 은발도 제법 흔했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베로니카한테 화를 내면서 온몸의 기운이 전부 빠져버렸다.
분명 소리를 지르고 그녀를 때릴 때에는 더없이 후련한 기분이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이제 남은 것은 허탈감.
그리고, 다시 우울감.
기숙사로 돌아가 쉬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 그냥 모든 것을 잊고 잠들고 싶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내게 그런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휴식이 아니라, 레오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레오 엡실트이다.
그가 나와의 결투를 대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아무리 시도해도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놈이 숨기고 있는 음습하고 비밀스러운 계략을 알아내야만 한다.
레오 엡실트를 믿지 않는 나였기에.
아니지, 그가 무언가 비열한 짓을 하리라고 분명 신뢰하고 있는 나였기에.
그걸 기본 전제로 깔고서 나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놈이 언제 움직일지 모른다.
그게 당장 오늘 저녁일 수도 있다.
지쳐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자꾸만 기숙사 쪽으로 향하는 다리를 이끌고 나는 아카데미의 매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천천히 먹으려고 했는데.’
아직까지는 딱히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또, 지금 당장 먹기에는 어려운 기연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놔두고 있었는데, 레오의 계획을 밝히는 데에는 유용한 물건이다.
“하아…”
나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한숨.
‘또 돈 깨지겠네.’
헬론 아카데미는 굉장히 거대했기에, 아카데미 내에 매점도 여럿 있었다.
당장 아카데미 내에 우체국도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간단하게 음료나 간식 정도만 파는 작은 매점부터.
수업에 쓰일 도구나 재료부터 각종 장비, 심지어는 책이나 장난감까지 파는 매점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방문할 곳은, 후자였다.
‘분명 이걸 얻는 게 2학년 여름축제 때였지?’
이번 기연은 아이템.
나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기연이란 기연은 거의 다 쓸어모으는 중이었다.
우선, 이 루이 발렌슈타인의 신체가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그랬으니까 마기 같은 거에 손을 대서 타락하지.
아무튼, 나는 기연을 이용해서라도 강해져야만 했다.
물론 노력도 엄청나게 했지만.
둘째로, 기연을 뺏길 위험도 있었다.
레오 엡실트야 워낙 병신이라 별 걱정은 없지만.
이 세계가 이제 현실이 되었으니, NPC들도 실제 인물이 되었고 말이다.
그러나 이건 전투에 관련된 것도 아니었고, 얻을 수 있는 것도 2학년 때였다.
그러니 굳이 나서서 먼저 얻을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는 다르다.
여름축제 즈음에 얻을 수 있는 물건이지만, 여름축제 자체는 스토리에 별 상관이 없었다.
이건 그 후에 올 암흑가 스토리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
여름축제야 뭐, 히로인들의 서비스신을 위한 이벤트였다.
아, 여름축제를 생각하니 또 기분이 가라앉는다.
1학년 여름축제는, 베로니카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녀와 함께 즐겼었다.
당시에는 참 즐거웠었는데.
뭐, 이제야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일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축제의 마지막, 불꽃놀이를 보며 웬일로 툴툴대지 않는 그녀와 약속을 했었다.
내년에도 꼭 같이 축제에 오자고.
하, 그딴 약속 따위 베로니카는 진작에 머릿속에서 지웠을 텐데.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게 기분이 나쁘다.
아무튼, 그런 쓸데없이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매점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축 처지는 목소리의 환영이 카운터로부터 흘러나온다.
듣는 사람까지 기운 빠지게 하는 목소리였다.
어차피 방금까지의 일로 내 기분은 이미 바닥이었다만.
나는 매점 전체를 훑었다.
역시, 원하는 물건은 진열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게임에서는 몇 번째 선반 옆에서 몇 번째인지 확실하게 나오는데.
그러니까, 그때 구하면 돈도 아낄 수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여름축제 기간이 아니라 진열도 되어있지 않았으나, 나름의 추측을 통해 이 매점에 있으리라 확신한 나였다.
나는 카운터에 늘어져 있는 점원에게 향했다.
“에… 무슨 일이십니까…”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다가오는 나를 향해, 점원이 귀찮다는 듯이 말한다.
“찾는 물건이 없어서요.”
“진열대에 없으면 다 나간 겁니다…”
그럴 리가.
“여름축제 가면을 사려고 하는데요.”
“……”
점원이 느릿느릿하게 일어난다.
“아니, 여름축제 가면을 왜 겨울에 찾고 있어…”
작게 궁시렁대는 점원.
창고로 보이는 문을 향해 움직이는 그녀를 나는 따라갔다.
“뭐로 드릴까요… 독수리? 아니면 사자? 그것도 아니면…”
“고양이로 부탁드립니다.”
“고양이…? 거 취향 참 특이하시네…”
잠깐 멈칫한 그녀였지만, 이윽고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끄응… 하나면 충분하시죠…”
창고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설마 내가 가면 하나 살 돈이 없어서 고민했을 리가.’
그리 생각하며, 창고 안에도 들리도록 크게 외쳤다.
“매점에 있는 거 전부 주세요!”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전부 말입니까…?”
“예!”
점원이 매점 안에서 박스를 하나 들고 나온다.
음, 박스 하나면 뭐…
그러나, 그녀가 다시 들어가 꽉 찬 박스를 또 들고 나온다.
생각보다 돈이 더 깨지겠지만, 아직까지는 괜찮…
다시 창고로 들어가, 박스를 들고 나오는 점원.
제발 그만 좀…
그렇게 두 번을 더 왔다 갔다 하고서야, 그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매점 바닥에는 무려 다섯 박스나 되는 고양이 가면이 쌓였다.
“……”
피눈물을 삼키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돈을 내고.
나는 다섯 박스나 되는 가면을 들고 매점을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오…!”
여전히 기운은 없었지만, 기뻐 보이는 목소리다.
가지고 있는 돈이 아슬아슬해서, 한 박스만 더 있었어도 다 못 살 뻔했다.
예상 외의 지출로 손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린다.
빌어먹을 레오 새끼 때문에…
‘2학년 여름 축제 때 샀으면 하나로 충분한데.’
나는 비틀거리며 박스 다섯 개를 든 채로 기숙사에 들어왔다.
쾅!
박스들을 내던지듯이 내려놓고.
나는 재빨리 가면을 하나하나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건 평범한 거고. 이것도…’
그렇게 네 박스를 허무하게 보내고, 마지막 박스.
나도 지칠 때쯤에, 손에 특이한 느낌의 가면이 하나 잡혔다.
느낌이 왔다.
‘이거다.’
가면을 쓰자, 이전의 딱딱한 가면들과는 달리 내 얼굴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착용자에게 은밀함을 더해주고, 소음 차단은 물론 약한 수준의 인식 저해 마법까지 걸려있는 아이템.
실수로 벗겨져 정체가 밝혀진다든가 하는 일 따위도 없다.
아이템의 이름이…
‘뭐였더라? 네로 가면? 플루토 가면이었나?’
게임에 떨어지고 몇 년이 지났기에, 이런 사소한 건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전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누군가를 미행하거나, 정체를 숨기거나, 어딘가에 잠입하는 데에는 참 좋은 아이템이다.
예를 들자면, 원작 게임에서처럼 아카데미 생도가 암흑가에 방문한다든가.
‘아니면, 나처럼 공작가 자제를 미행한다든가 말이지.’
내가 레오의 뒤를 캐고 있다는 것을 레오가 눈치챈다면, 그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결투 예정 상대를 미행하는 것을 교수님들에게 들킨다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고.
반역자 발렌슈타인이 엡실트 가문의 후계자를 미행하는 것을 다른 생도에게 들켜도 큰일이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상황.
그걸 피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이 아이템을 손에 넣은 것이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레오 엡실트는 당장 오늘 밤에라도 움직일 수 있다.
나는 가면을 착용한 채로, 조심스레 복도로 나왔다.
인식 저해 마법이라도, 복도에서 빤히 마주치면 별다른 소용이 없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기숙사 내 레오 엡실트의 방으로 조심스레 향했다.
운이 좋게도, 기숙사 복도에는 지금 아무도 다니고 있지 않았다.
내가 잠시 안심했을 무렵.
모퉁이 너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냥 지금 가면을 벗으면, 평범하게 기숙사 복도를 다니는 생도가 된다.
그러나, 나는 대신에 아이템의 성능도 확인할 겸.
재빨리 발을 움직여 복도에 놓인 화분 뒤로 숨었다.
그리고, 내 판단이 맞았다.
모퉁이로부터 등장한 것은, 레오 엡실트였으니까.
심지어,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포착한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렸다.
“운이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