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얄팍해진 도덕관념
설마 이렇게 바로 만나게 될 줄이야.
레오 놈도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하긴, 검을 뺏기기 싫다면 열심히 움직여야겠지.
‘그래봤자 소용은 없겠다만.’
나는 조심스레 화분 뒤편에서 나왔다.
놈은 계속해서 불안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꼭,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놈이 지금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내 확신은 공고해져만 갔다.
“암영신보.”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내 몸이 복도의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뭐, 비유였지만.
처음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판타지 세계관에 무슨 무협에 나올 법한 스킬이냐 했었지만.
이게 현실이 되고 나니, 참 편리한 기연이었다.
거기에 방금 얻은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이제 복도에서 내 기척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참, 스승님도 보러 가야 하는데.’
나는 조심스레 레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놈은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나를 간파할 수 없다.
기숙사 건물에서 나오고 나면, 이제 들킬 위험은 전혀 없었다.
어두운 교정을 밝히는 가로등이 곳곳에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숨어들 어둠은 여전히 충분했으니 말이다.
레오 엡실트는 뛰지만 않았을 뿐, 누가 봐도 다급한 걸음걸이로 어딘가 걸어갔다.
‘어디지? 뭘 노리고 있는 것이지?’
손에 종이봉투로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있다.
혹시 이 아카데미 안에 가문의 협력자가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우선 그걸 의심했다.
그러나, 레오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가는 방향은, 나도 익숙한 길이었다.
내가 가고일 토벌 직후에 편지를 작성해서 가던 방향.
‘여기는 우체국 쪽인데?’
내 예상이 맞았다.
레오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우체국이었다.
손에 든 것은, 편지였나.
그가 우체국으로 들어간 후에, 나는 밖에서 잠시 고민을 했다.
그가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든 내 알 바도 아니고, 애초에 알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결투를 신청한 직후에 작성해서, 저렇게 경계하는 모습으로 부치는 편지라면 말이 다르지.
나는 결심했다.
저걸 확인해야겠다.
적어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놈의 수에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저게 별다른 문제 없는 개인적인 편지였다고 해도, 뭐.
나는 나를 공격하던 놈에게 죄책감을 가질 만큼 착하지는 않으니까 상관없다.
내가 잠시 고민을 하던 사이, 어느새 레오는 일을 끝마치고 우체국을 나왔다.
그의 손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어차피, 우체국은 곧 문을 닫는다.
그의 편지를 오늘 곧바로 발송하지는 않을 터.
굳이 사람이 남아있는 우체국에 잠입하기보다, 나는 우선 레오의 뒤를 밟기로 결정했다.
무언가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레오는 그대로 얌전히 기숙사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끝까지 따라가, 놈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가면을 쓰고 그림자에 숨어, 가만히 감시하기를 얼마였을까.
놈은 끝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무언가 더 꾸미지 않으리라 확신이 든 나는, 다시 아카데미 우체국으로 향했다.
이제 밤이 제법 깊어서, 가는 길에는 생도 하나 정도를 마주쳤을 뿐이다.
물론 그쪽에서는 나를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아까와는 달리, 굳게 닫힌 아카데미 우체국의 문.
직원들은 전부 퇴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은밀하게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다리에 마나를 불어넣고, 보법을 이용해 건물 외벽에 뛰어오른다.
“흡!”
그대로 배수관을 타고 올라, 건물 맨 위층의 창문에 매달렸다.
누가 본다면, 영락없는 괴한의 모습.
‘예상대로군.’
건물 아래와 달리, 맨 위층의 창문은 제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
하긴,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오밤중에 아카데미 우체국 창문으로 침입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전부 잠겨 있으면 부술 생각도 했었건만, 열려 있어서 아무래도 다행이다.
나 같은 선량한 주인공은 기물파손 같은 거 안 하니까.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창문을 열고.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보관실로 향해 우선 지급 칸을 뒤졌지만, 예상 외로 그의 편지는 없었고.
나는 다시 일반 우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 신세가 약간 처량하게 느껴진다.
기연이니 퀘스트니 전부 독식해도 루이 발렌슈타인의 신체가 워낙 가망이 없어서, 아직도 아카데미 밖에는 나보다 강한 놈들이 수두룩한데.
나는 지금 도둑, 암살자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심지어 가면 아이템이랑 보법 덕분에, 그냥 도둑도 아니고 실력은 특급 도둑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라면 내 잠입, 미행 실력은 독보적 아닐까?
‘아니, 나는 마왕을 잡아야 할 몸인데…’
이상한 쪽으로 성장하고 있는 나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우편물을 뒤지고 있던 와중.
익숙한 문장이 새겨진 봉투 하나가 내 손에 집혔다.
좋아, 찾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면을 벗고.
나는 흔적이 남지 않게, 조심스레 엡실트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편지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누가 공작가 자제 아니랄까 봐, 제법 유려한 글씨체로 작성된 편지를 나는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 얼굴은 점점 굳어갔고.
마침내 편지를 다 읽은 나는, 나지막이 경멸의 말을 내뱉었다.
“하아, 진짜로 이딴 게 용사 후보라고?”
놈이 글러먹은 인간이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역겨울 정도로 저열하고, 한심할 정도로 단순했다.
진짜로, 결투를 앞둔 생도라면 다들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만한 단순한 계획이었다.
그들과 레오가 다른 점이라면, 레오에게는 이걸 현실로 만들기에 충분한 뒷배경이 있다는 것뿐.
“물약, 물약, 물약, 물약, 물약이라는 말이지…”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에, 나는 물약을 흥얼거리며 방을 나왔다.
편지를 읽고 나니, 그를 쓸데없이 과하게 경계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만큼, 레오의 계획은 실망스러웠으니까.
‘아니, 다행으로 여겨야지. 별로 재미는 없지만…’
괜찮았다.
이걸 이용해서 무대를 충분히 즐겁게 꾸미는 것은, 이제 내 몫이니까.
그가 편지에 적은 요구 물품은 총 네 개였다.
물약 하나, 스왈린 양피지, 마나 잉크, 연금용 용해제.
맨 앞의 물약만으로도 그의 계획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뒤의 세 개도 제법 수상했다.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기억한 채로, 마지막으로 방을 확인했다.
레오의 것을 포함해, 편지들은 전부 제자리에 뒀다.
최대한 조심스레, 흐트러지지 않게 노력했고.
다시 확인하는 방은 들어오기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다시 가면을 쓴 채로, 올 때와 같이 창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좋아, 완전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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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지없이 찾아오는 다음 날의 아침.
어젯밤에는 조금 아찔한 상황이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 잠시 한눈을 팔았었다.
그 생각이란.
‘잠깐. 굳이 저 쓸데없이 비싼 가면들을 전부 사지 않고, 하나만 훔치면 되는 거 아니었나?’
번개같이 내 머리를 강타한 생각이었다.
물론 도둑질은 나쁜 것이다만, 이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숭고한 계획의 일부니까.
거기에 언젠가 마왕을 토벌해야 할 이 몸은, 현재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이었고.
그렇게 잠시 후회를 하던 나는, 마침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지, 루이! 그딴 빌어먹을 년들이랑 어울리더니, 도덕관념이 얼마나 얄팍해진 거냐!’
스스로를 꾸짖던 와중, 나는 괜히 떠오른 생각 때문에 오밤중에 아카데미를 배회하던 생도 하나와 마주쳤다.
“히익!”
최근 자주 듣는 비명이었다.
요즘 내 주변을 계속해서 맴도는 누군가 때문에 우선 머리카락부터 확인을 했지만.
다행히도 흰색이 아니라 갈색이었다.
“누, 누구세요?”
덜덜 떨며 말을 더듬는 그녀.
하긴, 한밤중에 교복 차림으로 고양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미친놈이랑 만나면 놀라기야 하겠지.
어차피 가면 덕에 정체를 들키진 않았으니, 나는 보법을 구사하며 어둠 속으로 스르르 녹아들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완전범죄가 맞았다.
다시 시작된 하루.
오늘은 조금 중요한 날이었다.
그야, 오늘 수업에는 전투 실습이 있으니까.
어제 레오는 분명, 돌아오는 전투 실습 시간에 교수님께 결투를 신청하자고 했었다.
제대로 씻고, 교복을 입고.
나는 실실 웃으며 기숙사 방을 나왔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투는 낙장불입, 한 번 신청한 후에는 취소 따위 어불성설이었으니까.
레오는 자신의 계획이 샅샅이 파헤쳐졌다는 것도 모른 채, 오늘 스스로 사지로 기어들어올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쌓인 게 조금 많았나 보다.
놈의 검보다도, 사람들 앞에서 옛 파티원들이 나한테 사죄하는 게 더 기대가 된다.
교실로 향하면서, 나는 어제 새로 생긴 의문에 대해 가볍게 고민했다.
우선, 물약을 제외한 나머지 세 재료는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분명 무언가 연금술과 관련된 재료처럼 보였으나, 과목에 대한 내 경험이 일천하였기에 잘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결투에 관련한 그의 계획의 일부이기는 할 것이다.
설마 물약만 믿고 그렇게 당당하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다음으로는, 과연 레오 놈은 어떻게 결투 전에 내게 물약을 먹이려는 것일까.
어차피 들킨 마당에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