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 새치 염색?
오전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매점에서 빵이나 사서 화장실 변기칸에서 먹을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지만, 난 당당하니까.
아무튼, 오늘도 혼자서 하는 식사가 될 줄 알았는데.
지금 내 앞에는 황녀가 앉아있었다.
어차피 결투 대비에 관한 일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황녀 쪽에서 먼저 친해지자고 했으니까, 이 정도는 도움을 받아도 되겠지.
저번에는 잘만 말하더니, 오늘은 조용히 밥만 먹고 있는 황녀였다.
나는 식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황녀는 왜 나와 친해지려는 것일까?
다 몰락해가는 반역자 발렌슈타인 가문을 파벌에 넣는 것은,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닌데 말이다.
빤히 바라보며 고민하는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황녀가 내게 묻는다.
“어째서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지? 배가 고프지 않은가?”
“아뇨, 부담스러워서요.”
“하하하. 본녀가 비록 황녀일지라도, 이 아카데미 안에서는 일개 생도일 뿐이니 부담스러워하지 말도록.”
아뇨, 그쪽이 부담스럽다는게 아니라 저 시선들이 부담스럽다고요!
봐라, 벌써 이쪽을 힐끔거리며 다들 수군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 눈치 없는 황녀 같으니라고.
“그리고, 애초에 그걸 본녀의 면전 앞에서 말한다는 것부터가 딱히 부담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만?”
황녀가 작게 웃는다.
됐다, 포기하지 뭐.
어차피 소문이야 여태껏 질리도록 겪은 것이고.
나는 본론을 꺼냈다.
“회장님, 회장님은 마법이나 연금 쪽도 잘 아시죠?”
“음. 그리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만, 본녀는 주로 삼은 검술 외에도 마법이나 연금 역시 조예가 깊다고 할 수 있지.”
‘아니, 누가 들어도 자랑 맞는데요.’
어쨌든, 나는 그녀의 대답에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회장님, 혹시 이 재료들이 어디에 같이 사용되는지 아시나요?”
나는 편지에 적힌 스왈린 양피지, 마나 잉크, 그리고 연금용 용해제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말했다.
“흐음…”
황녀가 고민에 빠졌다.
“스왈린 양피지라…”
그녀의 고민은 생각보다 길었다.
“양피지에 마나 잉크는 알겠다만…”
“저, 회장님? 혹시 모르시겠으면…”
“조용히 하거라! 곧 생각이 날 것 같으니!”
아니, 식사 끝났는데요?
“거기에 용해제라니… 과연 어디에…”
슬슬 사람들도 식당을 빠져나가고 있다.
마침내,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황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루이, 본디 진정한 검사란 마법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검술에만 집중해야 하는 법이다.”
“예? 왜 갑자기 뜬금없는 변명을 하십니까?”
“변명이라니! 변명이라니! 닥치고 들어라!”
갑자기 발끈하는 황녀.
“큼! 아무튼, 또 본녀는 학생회 일까지 맡고 있지 않은가? 요컨대, 그런 사사로운 것에 할당할 머리가 아깝다는 것이지.”
“아, 그러십니까.”
“네놈, 방금 약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았는가?”
“오해십니다.”
얼굴이 약간 붉어진 황녀가 말을 이어간다.
“그러나, 원래 본녀와 같은 위정자에게 중요한 능력은 밑의 사람들을 적재적소로 운용하는 것이지.”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한다.
“따라오거라. 알 만한 사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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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파티 과제를 수주하는 사무실이었다.
데스크에는 나도 가끔 본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데스크 가까이 가자, 그녀가 입을 연다.
“과제 수주이십니까?”
“사샤, 내가 과제를 받으러 온 것으로 보이는가?”
“과제 수주가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말고 꺼지… 실례, 사라져달라는 의미였습니다.”
“……”
나는 조금 당황한 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루이, 이쪽은 사샤 류…”
“사샤입니다.”
황녀의 말을 끊으면서, 그녀가 자기소개를 한다.
“아, 저는 루이 발렌…”
“알고 있습니다. 어서 용건이나 말하시지요.”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황녀가 헛기침을 한다.
“…사샤. 혹시 스왈린 양피지, 마나 잉크, 그리고 연금용 용해제를 어디에 쓰는지 아는가?”
황녀가 그리 묻자, 그녀의 입에서 곧바로 대답이 나온다.
“양피지, 마나 잉크, 연금용 용해제, 마법 깃펜, 마나석 가루. 그리고, 대상의 신체 일부.”
그녀의 입에서 조금은 흉흉한 소리가 나온다.
신체 일부?
“저주 스크롤을 만드는 재료군요. 굳이 스크롤 형태로 제작하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
내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결투 도중에 몰래 발동하려면, 역시 스크롤 형태여야겠지.
“참고로 알려드리자면, 스크롤 형태로 제작할 경우 발동 거리가 짧아집니다. 마나석 가루나 마나 깃펜 정도야, 아카데미 내에서도 흔한 물건이지요.”
그녀가 계속해서 무심하게 말을 이어간다.
“스왈린 양피지의 경우, 일반 양피지와 달리 마나로 직조한 양피지입니다. 더럽게 비싸기만 하고 효용성은 없는 물건입니다.”
“일반 양피지를 사용했을 때와 차이점은…”
“마법의 발동을 약간 도와줍니다. 또, 스왈린 양피지 스크롤은 사용하고 나면 일반 양피지와 달리 사라지지요.”
뒷부분이 핵심이군.
스크롤이 사라진다면, 역시 증거로 삼을 부분은 물약이려나…
아무튼, 처음에는 그녀의 말투 때문에 좋지 않게 봤는데.
꽤나 상세히 알려준다.
세상에, 이런 고마운 사람이.
황녀가 약간 얼굴을 굳히고서는 말한다.
“저주에 신체 일부라… 혹시, 제국법으로 금지된 마법인가?”
“아닙니다. 신체 일부야 머리카락이나 손톱 정도로도 충분하고, 저런 방식으로 만드는 스크롤은 애초에 저주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위력이지요.”
그제서야 안도한 표정을 짓는 황녀이다.
“루이, 어째서 이런 걸 묻는 것이지?”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사샤, 정말로 고맙습니다.”
나는 황녀의 말을 대충 넘긴 채로, 사샤에게 감사를 표했다.
황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낫다.
혹시나 레오의 계획이 결투 전에 드러난다면, 레오는 징계를 받겠지만.
내가 파티원들에게 받을 공개 사과와, 엡실트 가문의 보검도 자칫하면 물거품이 될 수 있으니까.
내가 사샤에게 말했다.
“혹시 보답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은혜는 확실히 갚아야지.
사샤가 말한다.
“제가 원하는 걸 그쪽의 망해가는 가문이 감당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 참!”
…방금까지 감사했던 마음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혹시 누구를 저주하다 걸리더라도, 제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제 부탁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럼, 이만.”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아무튼, 신체 일부라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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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엡실트는 아카데미의 검술 담당 교수, 이안 덱스터를 불러냈다.
아카데미 생도 따위가 교수를 불러내다니, 원래라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생도가 공작가의 후계자이고, 교수가 공작가로부터 엄청나게 받아먹은 인간이라면 충분히 말이 된다.
지난번 파티 추방 사건 당시에도 레오가 찾았던 것이, 바로 이 교수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위험한 일이었으니.
일을 은밀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교수님, 이번에 제가 발렌슈타인 가문의 놈과 결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음, 그건 알고 있네.”
교수 역시, 오늘 오전에 들어온 결투 신청서를 확인했다.
“교수님이 결투의 참관인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내 최대한 노력해 보지.”
엡실트 공작가에서 돈을 받아먹은 교수의 입장에서, 레오의 말을 듣지 않아 좋을 일은 없었다.
저번에는 하필이면 총장이 관련된 일이라, 그의 요청을 거부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당연히 그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문제는 발렌슈타인이었다.
저번에 총장이 직접 처리한 것도 발렌슈타인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이번에도 혹시 모른다.
그렇기에 최대한 노력해 본다고 한 것이었으나, 레오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수님, 저도 아버지에게 교수님에 대한 좋은 이야기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아, 알겠네! 크흠…”
레오에게는 아직 한 가지 용건이 더 남아있었다.
그는 저택에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아카데미에서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은 전부 요구했고.
마법 깃펜이야 수업에 사용되니, 그도 가지고 있었다.
마나석 가루야,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아카데미에도 흔했고.
그러나, 이 아카데미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물건도 있다.
레오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교수님, 또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가 이안 교수에게 속닥거린다.
그의 말을 들은 교수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야 쉽지.”
레오는 기분 좋게 웃음을 지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풀리고 있었다.
‘루이 발렌슈타인, 곧 그 재수 없는 얼굴을 치욕으로 물들여주지.’
교수가 떠나고, 레오가 크게 웃는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나무 사이에서, 누군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보고 있던 것을.
남의 눈을 피하려 교수를 밖으로 불러낸 것이, 오히려 가면을 쓴 누군가에게는 더 미행하기 쉽게 만들어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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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여전히 기운 빠지는 목소리다.
점원이 내 얼굴을 알아본 것인지, 그녀가 약간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어? 그때 그 호… 손님이시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마법 염색약 어딨습니까?”
“저기… 저쪽입니다…”
그녀가 나른한 표정으로 매점 한구석을 가리킨다.
이윽고 내가 염색약 하나를 들고 오자, 점원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뀐다.
“어… 손님? 이건 검은색 염색약인데요오…”
“알고 있습니다.”
“그으, 손님은 흑발… 아니, 됐습니다…”
그녀가 돈을 받는다.
“호구인 줄 알았더니… 약간 모자란…”
뭐라 중얼거리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염색약 병을 한 손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매점을 나왔다.
‘후후… 제까짓 게 내 손톱을 깎을 거야, 아니면 살점을 뜯어낼 거야? 뻔하지, 뻔해…’
일이 전부 잘 풀리고 있…
“앗!”
쨍그랑!
실수로 놓친 마법 염색약 병이 깨졌다.
‘…난 병신인가?’
결국, 하나 더 샀다.
점원의 표정이 기괴하게 바뀌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