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 정의로운 도둑
성녀는 망을 보고, 레오는 아까 받은 열쇠로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놈은 내 방에서 나왔다.
놈의 손에는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내용물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십중팔구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가 성녀와 대화를 나누더니, 둘은 다시 움직였다.
성녀는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고.
레오 놈은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레오와 성녀가 모두 사라지고 나서.
나는 마침내 화분 뒤쪽에서 나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나는 재빨리 내 기숙사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고양이 가면을 쓴 채로, 나는 방 창문을 열었다.
좋아,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져서 밖은 이미 어둡다.
이 정도라면, 혹시나 밑에 사람이 있더라도 들킬 위험은 없다.
나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조심스레 창틀을 딛고서, 마나를 운용하며 이내 벽을 타기 시작했다.
매달릴 배수관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째, 전투 실력이 아니라 잠입 기술만 느는 것 같은 기분이다만.
아무튼, 나는 레오 엡실트의 방 창문으로 향했다.
그의 방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놈의 방 창틀을 붙잡은 채로,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어차피 밖도 어둡고, 가면 덕에 놈에게 들키지는 않으리라.
레오 엡실트는 이미 방에 도착해 있었다.
놈이 책상 서랍에 유리병을 넣는 것까지 확인하고서는, 나는 다시 내 방 창문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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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아니, 새벽.
몰려오는 수마와 맞서 싸우며, 나는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물론, 가면은 착용한 채로.
이렇게 이른 아침에 누군가 벌써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내 선택이 맞았다.
이번에는 몰려오는 졸음.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안심한 채로 꾸벅꾸벅 졸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건물 모퉁이를 돌자마자, 저 멀리에서 달리고 있던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호오, 황녀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군.
나 같은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부지런함이다.
그런데, 사람이 없는 시간에 운동을 하기 때문일까.
그녀의 운동복이, 뭐랄까 조금 노출이 있었다.
아니, 노출이 또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황녀라는 신분 때문이려나.
거기에, 격하게 달린 것인지 흥건한 땀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젠장,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나는 재빨리 보법을 발동해, 다시 건물 뒤편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잠깐!”
저 멀리서 황녀가 소리친다.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로, 나는 다른 길로 식당 쪽으로 향했다.
오늘의 숨을 장소는, 식당 건물 옆의 쓰레기통 뒤편.
사람도 오지 않고, 식당 입구도 확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냄새만 제외한다면, 최적의 장소라는 뜻이었다.
아무튼, 한참을 기다리자 슬슬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오기 시작했다.
나는 집중해서 그들을 살폈다.
이윽고, 내가 기다리던 사람.
레오 엡실트가 파티원 몇몇과 함께 식당에 들어가자, 나는 재빨리 기숙사로 향했다.
내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고서는 건물 밑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다.
지금은 어제와 달리 날이 밝았기에,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이제는 제법 능숙해진 벽 타기 기술로, 나는 레오의 방 창문으로 움직였다.
흔적을 최소한으로 하는 창문 따기 기술을 연마한 보람도 없이, 놈의 방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하긴, 나도 평소에 기숙사 방 창문은 잠근 적이 없는데.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건물 창문으로 기숙사에 침입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창문을 통해 레오의 방으로 잠입하며 든 생각.
‘이거 완전히 영락없는 도둑인데?’
근데 뭐, 내가 하는 짓은 나쁜 짓이 아니라 착한 일이니까 괜찮다.
주님… 아니지.
‘여신님,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나는 레오의 책상 서랍을 뒤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뭐 에스더 같은 년도 성녀로 뽑는 여신인데.
도둑쯤이야 별 문제도 아니겠지.
나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예상했던 대로, 유리병 안에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들어있었다.
이쯤 되자, 웃음이 나왔다.
설마 진짜로 이렇게 단순할 줄이야, 레오 엡실트.
나는 바닥을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에 들린 노란색 머리카락 하나.
들고 온 마법 염색약에 머리카락을 담갔다 빼자, 레오의 금발 머리카락이 곧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유리병 속에 있던 내 머리카락은 빼서 주머니에 넣고, 대신에 염색한 레오의 머리카락으로 바꿔치기했다.
좋아, 작전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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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가문으로부터 요구했던 물건이 도착했다.
전부 레오의 계획대로였으나,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바로, 레오의 마법 실력.
당연하지만, 양피지에 마법진 대충 그린다고 스크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크롤을 제작한다는 것은, 양피지에 마법 그 자체를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레오에게 그럴 실력은 없었고.
그러나 레오에게 실력이 없다면, 그에게 있는 것은 파티원들이었다.
펠리체는 없고, 아이네는 실력도 신뢰도 없지만.
최소한 나머지 세 여자는 제법 믿을 만했다.
물론 이번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그녀들에게 계획을 말하지는 않았다.
저번에 필요했던 것이 성녀라면, 이번에 필요한 것은 베로니카였다.
레오는 베로니카 엘트윈을 불렀다.
“그래, 무슨 일인데?”
그리 묻는 베로니카.
최근 그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 느낀 레오였으나, 아무래도 그녀가 제격이었다.
“베로니카, 스크롤 만들 줄 알아?”
“어… 뭐, 제작은 가능하지?”
어째서 그런 것을 묻냐고 하는 베로니카.
그런 그녀에게, 레오가 스왈린 양피지, 마법 깃펜, 그리고 마나 잉크를 내밀었다.
“하나만 만들어 줘. 속박 스크롤로.”
“어…? 어어…”
그 말을 듣자마자, 레오의 계획을 눈치챈 베로니카였다.
설마 이렇게 치사한 방법을 쓸 줄이야!
마탑에서 자란 그녀는, 자연스레 수많은 마도구들과 친숙했다.
그녀는 한눈에 스왈린 양피지를 알아보았다.
주문의 발동을 도와주고, 시전 직후에 사라지는 양피지.
증거를 남기지 않기에는 제격이다.
굳이 시판 스크롤을 쓰지 않는 이유도 그녀는 짐작이 갔다.
시판 스크롤은, 그 효과가 너무나 확실해 문제였다.
결투 도중에 루이에게 직격한다면, 누구든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제로, 양피지와 마나 잉크만 가지고 제작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의 스승님 정도가 제작하지 않는 이상, 몇 분 동안 굳게 하거나 하는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도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다.
위력이야, 어차피 잠시 멈추게 하는 것만으로도 결투에 있어서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베로니카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자신이 거절한다고 해도, 엘프가 있다.
스크롤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마법이 자리잡으며 빛이 나기 때문에 일부러 실패하면 들킨다.
결국, 베로니카는 속박 스크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일이 전부 끝나고, 레오가 그녀에게 감사를 하지만 베로니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베로니카의 머릿속은 루이로 꽉 차 있었으니까.
지난번의 일 이후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한 그녀였다.
루이에게는 너무나 미안했다.
동시에, 그가 자신을 때린 것이 너무나 속상한 베로니카였다.
‘뭐 하는 거야, 루이! 너 이러다 진짜 큰일 난다구!’
어서, 루이가 자신에게 사과하기를.
그렇게만 해주면 자신도 사과를 하고, 레오의 계획을 알려줄 것인데.
루이는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고.
결투 날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초조해지는 베로니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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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가 마나석 가루, 베로니카가 제작한 스크롤, 그리고 루이의 머리카락을 녹인 연금용 용해제를 꺼낸다.
그가 음흉한 웃음을 짓는다.
베로니카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가 재료를 이용해 간단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윽고 평범한 속박 스크롤은, 머리카락의 주인을 대상으로 하는 속박 저주 스크롤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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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의 방에 숨어들어 머리카락을 바꿔치기하고 며칠.
그 사이에 본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에게 사정사정해서 물약의 대비책도 받아냈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나는 웃음을 짓는다.
오늘은, 마침내 결투 날이었다.
첫 수업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교실은 이미 우리 둘의 결투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힐끔 보자니, 레오 놈의 얼굴도 굉장히 자신만만했다.
그래, 꼭 내 얼굴처럼 말이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이제는 엄청난 수준이 된 나의 미행 실력으로, 어제는 그가 엘린 니디아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것까지 확인한 뒤였다.
마침내, 전투 실습 시간이다.
잔뜩 들떠서 연무장으로 향하는 같은 반 생도들.
뭐, 이해한다.
원래 불구경이랑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그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겠지.
연무장에 도착하자, 오늘은 웬일로 존 헤이튼 교수가 깨어있었다.
더불어, 우리 결투의 참관인인 이안 덱스터 교수도 있었다.
잔뜩 기대하는 기색의 존 교수가 우리를 환영하고.
결투에 앞서 이안 교수가 우리 둘을 임시 대기실로 보냈다.
이건 원래 있는 절차일까, 아니면 레오의 요구에 따른 이안 교수의 짓일까.
뭐, 별로 상관은 없었다.
원래라면 눈치를 못 챘겠지만.
예상을 하고 있으니, 이윽고 기척이 느껴졌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