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빡대가리 베로니카의 쓸데없는 걱정
조금, 의문이었다.
레오 놈이 준비한 것은 쇠약의 물약.
대충 효능 정도는 알고 있지만, 약효가 돌기까지의 시간이나 지속 시간 같은 건 정확히 모른다.
애초에 물약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걸 준비한 레오 정도만이 확실히 알 수 있고.
아무튼, 그걸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내게 먹이려 할지 모르기에.
어제부터 계속 주의하고 있었건만,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어제, 그가 엘린에게 물약을 건네는 것까지 확인했었다.
이제 슬슬 결투 시작이다.
만약 내게 물약을 먹일 생각이라면, 이제 시간도 없고 방법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쯤,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만약 누군가가 올 것이라 확신하고서 경계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인기척.
이렇게 은밀하다니, 역시 엘프였다.
레오가 어째서 그녀에게 이 일을 시켰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먹일지는 모르겠다.
인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슬며시 문 뒤로 향했다.
대기실 뒷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오면, 소란을 피우지 않고 곧바로 제압할 생각이었으니.
그러나, 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역시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했을 바람 새는 소리.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지?’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나는 문 뒤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들어오지 않고, 대신에.
감각이 예민해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설마, 그건가?
이건 예상을 하지 못했는데.
엘프, 엘린 니디아는 뛰어난 궁수이다.
그녀를 훗날 신궁이라고까지 불리게 하는 것은, 엘프의 바람 마법을 이용한 화살의 유도.
추측이지만, 지금 그녀는 물약을 바람 마법을 통해 대기실 안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꼭 가습기처럼 말이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식이라면 약효가 엄청나게 떨어질 텐데?
그렇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재빨리 품 속으로 손을 움직이는데, 원하는 대로 빠르게 움직이지가 않았다.
참, 놈이 엡실트 공작가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돈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으니까, 물약도 최고급으로 구했겠지.
곧 희미하게 들리던 바람 소리가 멈췄다.
그녀가 사라지기를 기다린 후, 나는 대기실의 문을 살짝 열고 공기 중의 약효가 전부 빠지기를 기다렸다.
만약 놈들이 내 음료나 음식에 물약을 탈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그저 먹는 것을 주의하는 정도로만 대비하려 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하지만, 내게는 발렌슈타인 백작에게 사정사정해서.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쓰냐고 욕을 한바탕 얻어먹고, 대신 받은 대비책이 있었다.
공작가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 백작가 출신이다.
나는 품 속에서 천천히 해독 물약을 꺼냈다.
그걸 마시자, 쇠약의 물약의 약효가 사라진다.
만약 놈이 준비한 최고급 물약을 그대로 마셨다면 해독하기가 어려웠겠지만.
엘린이 내게 먹인 방식 덕에, 상당한 양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충분히 해독이 가능했다.
잠시 뒤, 대기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이제 결투가 시작인가 했건만, 들어온 것은 베로니카였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녀는 그런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온다.
“뭐야.”
베로니카 역시 얼굴을 찡그린 채로, 한참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으으으…”
“뭐냐고.”
내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연다.
“루이!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답답하다는 기색의 그녀가 다급하게 말한다.
“아, 진짜! 잘 들어. 레오가 속박 스크롤을 준비했어. 제대로 된 스크롤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하니까…”
나는 놀랐다.
베로니카가 어째서 내게 이걸?
“대놓고 쓰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스크롤을 발동하려는 기색이 있으면 바로 옆으로 피해. 알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그녀의 속셈을 알아챌 수 있었다.
뭐, 저주 스크롤이 아니라 그냥 속박 스크롤?
발동하려는 기색이 있으면 피하라고?
또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베로니카는, 뻔뻔하게도 ‘어때, 고맙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이제는 뭐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녀가 다시 말한다.
“어, 있지.”
“훗! 어서…”
“나가.”
“…뭐라고?”
그녀가 화를 낸다.
“야! 사과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고맙다고는…”
“나가라고.”
내가 싸늘하게 말하자, 그녀는 가증스럽게도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나간다.
저주 스크롤은, 피하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시전 대상에게 바로 발동되는 것.
설마 레오가 자신의 계획을 일부 드러내며, 베로니카까지 이용해서 이렇게 함정을 팔 줄은 몰랐다.
혹시나 내가 베로니카를 믿고서, 결투 전에 스크롤이니 뭐니 떠들어대도.
어차피 참관인인 이안 교수는 자신의 편이니 문제없다는 것인가.
대충 몸수색을 하는 척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오히려 나를 치졸한 놈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
레오 놈, 답지 않게 머리를 썼군.
그런데, 어차피 나는 놈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다.
이딴 건 내게 통하지 않는다.
거기에, 놈의 계획을 마지막 하나까지 간파한 와중에 결투를 중지시킬 생각도 없었고.
조금 더 기다리자, 마침내 이안 교수가 대기실로 왔다.
그가 나를 연무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결투장으로 인도했다.
마침내, 결투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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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에 앞서, 이안 교수가 주의할 것들을 설명한다.
예를 들자면, 신성한 결투에서 반칙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든가.
무기는 사전에 허가받은 결투용 무기만 사용 가능하다든가.
그 대목에 이르러서, 나는 비웃음을 지었다.
또, 결투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승복해야 한다든가.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이후로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교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대신에 연무장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원래 결투는 인기 있는 구경거리였고.
이번에는 심지어 그 당사자가 엡실트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용사 후보, 그리고 반역자 발렌슈타인 백작가의 후계자였다.
며칠 전부터 아카데미 전체가 결투에 관한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그 덕분인지, 우리 반 생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반이나 심지어 다른 학년 생도들도 잔뜩 모였다.
좋아, 훌륭한 무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심지어 황녀도 구경을 와 있었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짓길래, 나도 마주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학생회 인원도 몇몇 있었고.
저번에 본 사샤라는 인간도 있었다.
아니, 여기서도 책을 보고 있을 거면 도대체 구경을 온 의미가 뭐지?
아무튼, 내가 한눈을 팔던 사이 어느새 교수의 말이 끝났다.
그가 결투장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결투장 양 끝에 서서, 각자 검을 뽑아들었다.
레오 엡실트가 외친다.
“루이 발렌슈타인! 지금이라도 네 주제를 알고 무릎을 꿇는다면, 이 몸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줄 수도 있다만?”
아까부터 레오 엡실트를 응원하던 생도들.
그들은 저 오글거리는 전형적인 악역의 대사에도, 역시 관대하다느니 어쩌니 떠들고 있었다.
굳이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비웃어만 주었다.
레오의 표정이 굳고, 우리의 신경전은 끝났다.
마침내, 결투장 밖에서 이안 덱스터 교수가 외쳤으므로.
“시작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오 놈의 검에 마나의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번의 대련과 달리, 굳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일견 느긋해 보이는 태도로, 검을 늘어뜨리고서 결투장 가운데로 움직인다.
관객들이 의아해하는 것 같지만, 나는 보았다.
레오 놈이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제법 많은 양의 마나가 담긴 검.
레오가 그 검을 뒤편으로 빼고서 내게 달려든다.
본래는, 대검의 운용법.
다른 건 몰라도 파괴력은 확실하다.
놈이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피하지 않았다.
레오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걸린다.
그가 검을 크게 휘두르고…
나는, 본래 피해야 할 때보다 반 박자 늦게 그의 검에서 몸을 뺐다.
덕분에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관중의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레오의 눈에 담긴 것은, 당황이 아닌 안타까움이었다.
방금 나의 느릿한 움직임으로, 놈은 물약이 먹힌 줄 알 것이다.
그래, 그렇게 믿는 그의 절망이 보고 싶었다.
동시에, 나는 늘어뜨린 검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지금은 대련이 아닌 결투.
내 검은 놈을 제압하는 대신, 검면이 놈의 뺨을 후려쳤다.
나는 숨길 생각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비틀거리며, 분노한 레오가 다시 마나를 불러일으킨다.
“으아아아아!”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공격.
파티의 과제 때면 늘 보던, 놈의 단순한 검로였다.
인간이 아닌 마물에게나 효과가 있을 법한 검.
이번에도 나는 검이 내게 닿기 직전에야, 옆으로 발을 놀렸다.
동시에, 방금 바닥에 직격한 검을 들고 있는 팔을 내 검으로 후려쳤다.
놈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든다.
상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되지만, 아직 용사의 대안을 찾지 못한 나로서는 조금 조심해야 하는 입장.
대신에, 나는 놈의 몸 대신 마음을 완전히 꺾어놓을 생각이다.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달려든다.
그 흉흉한 마나의 정면에서, 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