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 펠리체의 방학
“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티엘 니디아가 말한다.
“그런가요? 얼마 전에, 제국에서 이런 항의문이 도착했는데 말이죠.”
여인이 건넨 문서를 읽은 티엘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엘린이 무언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임무에 지장은 없어 보이는군요.”
그녀가 지금 앉아있는 둥근 원탁.
그 주위에는 티엘을 포함한, 엘프 원로원을 구성하는 12명의 장로들이 앉아 있었고.
그리고 그중 가장 화려한 의자에는 엘프 여왕이 앉아 있었다.
티엘은 아까 있었던 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엘린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보면, 용사 포섭의 건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반면에, 마왕에 대해서는.
엘린은 티엘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한 기색이었다.
“어머니, 그렇다고 해도 혹시나…”
“지금은 맡은 임무에 집중하세요, 엘린. 당장 우리 엘프들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답니다. 설사 마왕이 등장하더라도 말이에요.”
티엘이 그렇게 말하고서야, 엘린은 알겠다고 했다.
티엘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마왕이 진짜로 등장하더라도 엘프들이 안심할 수 있는 이유가 세계수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세계수가 마기에 침식당하고 있는 상황.
엘린이 임무에 실패한다면, 엘프들은 더 이상 세계수에 의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은 마왕의 탄생 그 자체보다도, 세계수의 치료가 더 급한 것이다.
그리고 엘린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중요한 일인데, 엘프들이 그저 엘린만 믿고 있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엘프 여왕은 안스베르크 영지의 일에 관해 적힌 항의문을 잘게 찢는다.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에 늘 대비해야 하지 않겠나요?”
그렇게 말하며, 엘프 여왕은 티엘의 반대편에 앉은 엘프를 쳐다본다.
그 시선에, 다른 엘프 장로가 입을 연다.
“물론, 제2안 역시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보고하세요.”
“예, 폐하. 이틀 전, 마나 운용이 가능한 인간을 상대로까지 실험을 마쳤습니다. 결과는 성공입니다.”
그 말에, 여왕의 표정이 약간 밝아진다.
“정신 조작에 성공한 것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용사이기에, 아직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여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엘린이 레오를 포섭하는 것에 실패할 경우.
엘프 여왕과 원로원은 정신 조작 마법을 통해 레오를 조종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용사.
정신 조작 마법이 제대로 먹힐지도 미지수였고, 애초에 그에게 접근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거기에 일을 벌인 이후, 제국의 반응 역시 큰 문제였기에.
엘린이 레오를 포섭하는 내용의 1안이 먼저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2안을 위한 실험 역시 계속해서 진행되는 중이었다.
“실험체는 적당히 폐기하도록 하세요. 마왕의 발흥 전까지 세계수의 치료를 완료해야만 합니다.”
실험체란, 국경 근처에서 적당히 납치한 인간을 말한다.
그건 그렇고.
여왕의 말은, 아까 티엘이 엘린에게 했던 ‘마왕은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말과 달랐다.
실제로 엘프 여왕과 장로들의 경우, 마왕의 출현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엘프들의 선조가 남긴 고문서 덕이었고.
“우리 엘프들은 마왕의 침공 때마다 그 세를 불려왔습니다. 덕분에, 대수림의 강역 역시 계속해서 넓어졌지요.”
장로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수림은 세계수의 보호를 받는다.
마왕의 침공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대수림 밖의 다른 종족들.
마왕이 전력으로 대수림을 공격한다면, 세계수조차도 그 침공을 막을 수 없겠지만.
공격하기 쉬운 다른 종족들을 놔두고, 마왕이 모든 힘을 쏟아 대수림부터 공격할 일은 없었다.
그러니, 대수림이 공격을 받는다면 그것은 최후의 일.
다른 종족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손을 잡고 마왕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그리고 다른 종족들이 전부 멸망하기 전까지 공격을 받을 일이 없는 엘프들은, 거기에 합류하는 일이 없었고.
대수림 밖의 세계가 마왕과 싸우며 황폐화되는 동안.
그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엘프들은, 다른 종족들이 목숨을 바쳐 마왕의 침공을 저지하면.
전쟁 직후, 그들이 약해진 틈을 타서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고 세를 불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 수백 년간은 마왕의 침공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마왕의 침공이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마왕의 침공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엘프들에게는.
“이번 기회에 우리 엘프들은 다시 그 힘을 떨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수의 치료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세계수가 멀쩡해야지만, 마왕의 침공에서도 대수림은 멀쩡할 테니까.
다른 종족들이 죽어라 싸우는 동안에.
엘프들은 뒤에서 구경하며, 전쟁이 끝나면 달콤한 과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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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이제는 익숙해진 천장이 펠리체의 시야에 들어왔다.
요즘 들어서는, 깨어 있는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수면만이 유일한 휴식이 되어버린 펠리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조차도 악몽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또 잠에서 깨어나면, 늘 죽어버린 아버지와 영지민들의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어떻게든 그 생각을 떨쳐낸다면.
다음은 루이였다.
루이가 자신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상상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그의 슬퍼하던 모습이 계속해서 펠리체의 마음을 괴롭혔다.
“후우…”
그녀가 숨을 내쉰다.
머리맡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자, 마음이 겨우 진정되는 느낌이다.
그녀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영주성이 박살나고, 자신의 방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지금 임시로 쓰고 있는 방은 그리 넓지도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리체가 침대에서 문까지 향하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펠리체가 문고리에 손을 올리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문을 열기를 머뭇거렸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밖을 다니면,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난 안스베르크 백작의 장례식 당시.
자신이 루이의 공을 가로채 거짓말을 한 것도.
자신이 안스베르크 영지를 지키려는 루이의 행동에 반대를 했다는 것도.
즉, 펠리체 자신 역시 안스베르크 영지의 참극에 책임이 있다는 것까지.
전부, 황녀가 폭로했다.
그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펠리체가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연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방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메이드.
펠리체와도 몇 년 동안이나 알고 지낸 메이드였는데.
그런 메이드가 펠리체를 보는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드러났다.
성 밖에서 살던 메이드의 가족 중.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고일 떼의 습격 당시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부모가 필사적으로 숨긴 메이드의 여동생만이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메이드는 펠리체에게 연신 감사를 했다.
그나마 펠리체가 미리 경고를 한 덕에, 병사들이 시간을 벌어 자신의 여동생이 숨을 수 있었다고.
여동생만이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펠리체의 덕이라고.
그 감사 인사를 들으며 펠리체는 죄책감으로 죽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전부 거짓말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진실이 전부 밝혀진 지금.
메이드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일어나셨습니까.”
메이드가 말한다.
펠리체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말한다.
“그래… 가서 쉬어라.”
메이드는 끝까지 펠리체를 노려보더니, 곧 사라진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빌고 싶었지만.
이미 전에 그렇게 사과를 했었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내 펠리체는 어머니의 집무실로 향한다.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황녀가 진실을 전부 폭로한 이후.
그녀의 가족조차, 그녀를 경멸하고 있었다.
결국, 지금 펠리체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시리도록 외로웠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너무나 힘들었다.
곧, 펠리체가 집무실 문 앞에 도착하고.
그 안에서는 백작부인과 루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에는, 자신을 제외하고서 그 둘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크를 하려던 펠리체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대로 서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엿듣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가 주장한 지원금이 대폭 깎였구나. 아마 황녀 전하겠지.”
만약 황녀가 정말로 그저 모두의 공과 잘못을 밝히고자 하는 생각이었다면, 우선 백작부인과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런 논의 없이, 그것도 장례식에서 폭로를 했다는 것은.
그건 분명 황자 파벌에 대한 공격이었다.
“하, 영상을 보고서도 그 수준의 지원금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루시의 목소리에서는 경멸이 드러난다.
사건과 관계된 이들이었으니, 목걸이에 녹화된 영상은 루시와 백작부인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른 가문에서도 지원금이 들어오고 있으니… 무슨 이유인지, 적색 마탑에서도 지원금이 왔더구나.”
“예? 마탑이랑 저희 가문이 무슨 연이 있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베로니카 엘트윈이 보낸 지원금이다. 영지민들의 구호에 써 달라고 하더구나. 뭐, 펠리체와 같은 파티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 의문은 가볍게 넘기고, 백작부인이 말한다.
“대폭 삭감된 지원금이면… 가문의 재건은 어렵다고 봐야겠지. 급한 불조차 제대로 끌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러게, 제가 언니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꾸나, 루시.”
그래도, 적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일까.
펠리체의 가슴이 조금 따뜻해지려는 순간.
“너도 이제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지, 루시.”
“가문의 지금 상태라면…”
분명, 루시 역시 헬론 아카데미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루시는 과연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그 돈을 내며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거라, 루시. 아무리 그래도 너를 아카데미에 보낼 형편은 되니.”
“그래도…!”
“아니, 너는 가야만 한다.”
백작부인이 엄하게 말한다.
“펠리체는… 이제 글렀다. 가망이 없어.”
그녀의 말에, 문 밖의 펠리체가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가주는 펠리체가 아니라 너다, 루시. 그러니, 아카데미는 꼭 졸업을 해야만 한다.”
펠리체가 비틀거린다.
그녀의 평생의 목표였던.
황실의 검, 안스베르크 백작.
아버지와 같은 훌륭한 가주가 된다는 꿈이, 방금 간단하게 짓밟혔다.
들어가서 따질 수도 없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펠리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흑… 히끅, 흐으으윽…”
펠리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하염없이 서럽게 우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