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 흑색 마탑 방문
“뭐가 좋을까?”
내가 중얼거렸다.
사무실의 한쪽 벽면에는 과제 목록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왜, 꼭 판타지 설정의 게임이나 애니에 나오는 모험가 길드처럼 말이다.
참고로 이쪽 세계에도 모험가 길드는 있었다.
물론 아카데미 생도들의 인원은 굉장히 많았기에, 길드 건물처럼 게시판에 의뢰서가 걸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 큰 사무실의 벽면을 잔뜩 채우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의뢰들 중 일부는 모험가 길드로 들어온 의뢰를 아카데미 측에서 선별한 것이다.
너무 어렵거나 혹은 쉬운 의뢰를 제외하고, 또 아카데미에서 너무 먼 곳의 의뢰도 제외하고.
적당히 생도들의 성장과 평가에 쓸모가 있을 법한 의뢰들을 골라서 받은 것이었다.
아카데미 측에서 의뢰를 가져가면 불만이 있지 않겠냐 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아카데미 생도들의 실력은 확실한 편이었고.
또, 아카데미에서 선정하는 의뢰들은 보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도들의 경험을 쌓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즉, 모험가들이 선호하는 의뢰와 크게 겹치지가 않는다는 말이다.
거기에 길드로서도 인기가 없는 의뢰를 해결해 주니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길드에서 넘어온 의뢰가 일부.
또, 아카데미로 직접 들어오는 의뢰도 일부 있었다.
물론 생도들로서는 그걸 구별할 방법도, 필요도 없지만.
나는 지난번의 둥지 탐사와 같은 임무는 제외하고.
전투가 필수인 임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번 과제를 수주하는 이유는 새로 구성된 파티원들과 합을 맞춰보기 위함이었으므로.
“제자야, 이건 어떠느냐?”
조금은 싸늘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일까.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스승님이 약간 과장된 목소리로 의뢰서 하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러나, 그걸 흘깃 본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무리입니다.”
“어째서!”
“난이도가 너무 높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하다만?”
스승님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베로니카가 없기는 하지만, 펠리체도 나름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고.
나 역시 1학년 때에 비하자면 훨씬 강해졌다.
아이네야 뭐… 그녀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는 큰 성장을 기대하지 못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스승님이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이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규칙의 문제다.
애초에 이번 과제에 참여하는 인원이, 베로니카가 빠지며 넷밖에 안 된다.
그렇기에 수주할 수 있는 과제의 난이도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나는 스승님에게 설명했다.
‘잠깐. 생각해 보니까, 스승님도 전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내 설명을 들은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분명 그런 규정이 있었던 것 같기도… 어째 가물가물하구나.”
하긴, 십 년도 훨씬 넘게 지났는데.
이런 사소한 일은 충분히 까먹을 수도 있지.
아무튼, 내 말을 들은 아이네가 벽 한쪽 구석에 걸려있는 의뢰서 하나를 집었다.
아니, 집으려고 했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천장 쪽에 있는 의뢰서를 향해 손을 뻗고서 까치발을 하고 낑낑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작게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고.
아이네의 뒤편으로 가서, 그녀가 손을 뻗고 있던 의뢰서를 잡았다.
“앗! 고마워요, 루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약간 붉어진 아이네였다.
아무튼, 나는 그녀가 집으려던 의뢰서를 보았다.
“음, 고블린 토벌? 괜찮아 보이는데, 다들 어때?”
고블린은 약한 마물이기에, 난이도도 맞았다.
거기에 나름 인간형의 마물이었으니, 어둠숲에서의 이벤트를 생각한다면 합을 맞추기도 좋았고.
“조금 시시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구나.”
스승님이 말하신다.
“나도 좋은 것 같다…”
펠리체 역시 찬성했다.
“그러면, 이걸로 할까?”
아이네에게 그리 말하고서, 우리는 사무실 한편의 데스크로 향했다.
“과제 수주이십니까?”
“네.”
전에도 몇 번 들었지만, 여전히 똑같은 대사다.
사샤, 그녀는 빈말로도 친절한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무튼 간에 지난번 결투 때에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어서 의뢰서나 주시지요.”
저건, 책이나 읽게 어서 꺼져 달라는 의미일까.
그래도 저 정도면 나름 상냥하게 돌려 말한 것이려나.
나는 그녀에게 아이네가 고른 고블린 토벌 의뢰서를 건네며 말했다.
“2학년 A반 제1파티, 베로니카 엘트윈은 불참입니다.”
그녀가 무언가 서류를 확인하더니, 곧 말한다.
“예, 신청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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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어느새 주말이었다.
루이네는 오늘 출발하려나?
아니면 내일?
그런 의문을 가지는 베로니카였다.
그러나 딱히 그런 의문을 해소하지는 못한 채로, 베로니카는 기숙사 방을 나왔다.
손에는 간단하게 꾸린 가방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흑색 마탑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어차피 가서 샐리의 안부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짐은 최소한으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낼 정도로만 챙겼다.
조금은 처지는 기분으로 아카데미 정문을 나와, 그녀는 곧 예약해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부는 미리 전해 들은 대로 흑색 마탑으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용한 마차 안에서.
베로니카는 샐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상함을 느낀 것은, 아카데미에 왔는데 샐리의 편지가 없었을 때였다.
겨우 편지가 오지 않는 것.
남들이 보면 괜한 걱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베로니카는 스승님인 스칼렛 마르슈에게 편지를 보내며 샐리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스칼렛 마르슈와 샐리.
원래는 그저 마탑주와 그 마탑 소속의 마법사일 뿐이었으나.
베로니카를 계기로 제법 친해진 둘이었다.
물론, 스칼렛 마르슈는 무심한 마법사답게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같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그녀 역시 혹시나 샐리에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나름 걱정이 되어, 직접 편지를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베로니카는 샐리에게서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했다.
전에는 빠짐없이 편지를 보내던 샐리였으니, 베로니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이윽고, 샐리에게서 별다른 답장을 받지 못한 스칼렛 역시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는 베로니카에게 자신이 직접 알아보겠다고 했다.
물론 베로니카가 스승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고아인 베로니카에게, 스승님과 샐리는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스승님이 소식을 전해주기 전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기는 괴로웠다.
그렇기에 마차도 예약을 해 두고, 흑색 마탑에 미리 연락도 해 둔 차였다.
그랬는데, 루이가 파티 활동의 건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물론 루이에게는 너무나 미안했다.
그 이후로 루이에게 사정을 설명하려 했지만,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렇게 주말이 된 것이다.
원작에서는 이 시기에 베로니카가 흑색 마탑으로 가는 일이 없었기에.
루이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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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생각.
대부분은 샐리에 대한 걱정과 루이에 대한 죄책감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들을 하며 베로니카는 흑색 마탑에 도착했다.
나름 일찍 출발한다고 했지만, 도착하고 나니 이미 해가 진 후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예 한밤중은 아니었으니.
급한 마음에, 베로니카는 곧바로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 입구에 있던 마법사 하나가 베로니카를 막아선다.
“무슨 용무십니까.”
“베로니카 엘트윈, 적색 마탑주의 제자입니다. 미리 연락은 했을 텐데요.”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귀찮다는 눈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던 마법사의 태도가 바뀐다.
마탑주의 제자라는 지위는 다른 마탑에서도 충분히 통했다.
아니, 오히려 마탑 밖의 사람들보다도 마법사들이 그 지위의 대단함은 더 잘 알았다.
거기에, 적색 마탑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마탑 중 하나.
보통의 사람이라면 미리 예약을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베로니카 정도라면 그러지 않더라도 최소한 문전박대 당할 일은 없다.
거기에, 그녀는 이미 이야기를 해 둔 차였으니.
“들어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곧 안에서 마법사 하나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물론,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마법사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흑색 마탑에 대한 편견 때문일까.
어쩐지 그 마법사가 음침하다고 생각한 베로니카였으나.
그는 의외로 베로니카에게 성실하게 마탑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설명이라고 해도, 대부분 원론적인 내용이었지만.
그렇게 마법사의 설명이 대충 끝나고.
그가 베로니카에게 묻는다.
“그래서, 적색 마탑의 마법사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희 마탑 소속의 마법사 하나가 이곳으로 파견을 왔는데, 얼마 전부터 연락이 끊겨서요. 그녀를 한번 봤으면 하는데…”
“파견 마법사 말입니까.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샐리입니다.”
“샐리라…”
마법사가 한번 중얼거리고는, 베로니카에게 말한다.
“잠시 여기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그녀를 마탑 로비에 놔두고서는, 마법사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베로니카가 로비를 둘러보며, 역시 흑색 마탑답게 상당히 음산하다고 평가하고 있을 무렵.
동시에, 곧 샐리를 볼 수 있겠다고 작게 기대하고 있을 무렵.
베로니카의 기대를 저버리듯이, 마법사는 혼자서 베로니카에게로 돌아왔다.
실망한 베로니카에게 그가 말한다.
“오늘은 벌써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실 수 있으신지요.”
“저는 늦어도 괜찮은…”
“파견 마법사에 대한 일을 담당하는 저희 마법사가 이미 퇴근했답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베로니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당신이 샐리를 불러와 주면 되는 것 아니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늦은 시간에 일방적으로 찾아와 그러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정도는 베로니카도 알고 있었다.
물론 이전이었다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루이와의 일 이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 조금 더 조심스러워진 그녀였다.
그러나.
다음 날, 베로니카는 믿기지 않는 말을 듣게 되었다.
“예? 도착하지 않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