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화
1. 로제타 클리프의 불운에 대하여
휘이이이잉.
어디선가 어렴풋이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또 그날의 꿈.’
이 꿈의 시작은 언제나 똑같았다.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두운 들판.
한 여자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걸어오는 홑겹 옷차림의 어린아이…….
바로 어린 시절의 그녀였다.
“콜록.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거친 기침을 터트릴 때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몸이 거세게 들썩거렸다.
아이의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안함에 아이는 한 번 더 질문을 건넸다.
“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하지 못하겠니?”
찰싹!
매서운 소리와 함께 여자가 아이의 손등을 내려쳤다.
눈보라에 얼어붙은 여린 살갗은 붉게 튼 지 오래였다.
게다가 얻어맞기까지 해 손등에 핏방울이 맺혔다.
“미안, 미안해요. 흑.”
아이는 맞은 부분이 너무나도 아픈 모양인지 서둘러 여자의 손을 놓고 반대쪽 손으로 상처 난 제 손등을 덮었다.
하지만 서러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은 흘러내리기 무섭게 얼어붙었다.
홀쭉한 아이의 뺨은 거칠게 일어났고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다.
“빨리 따라오지 못해!”
“흑, 흐흡. 가, 갈게요.”
여자의 윽박지름에 아이는 눈물을 꾹 삼키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날의 기억은 어느 것 하나 또렷하지 않다.
아주 단편적인 몇몇 장면만 기억이 날 뿐.
하지만 흐릿한 기억 속에도 앙상하던 제 발목이 차가운 눈 속에 푹 파묻히던 그 아릿한 감각만은 선명했다.
“추워요…….”
어린아이가 지나온 길엔 아무런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 자국 위로 새로 내리는 눈이 빠른 속도로 쌓여 덮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겠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엄마…….”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아이는 훌쩍이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은 유일한 존재를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행여 놓칠까 봐 손을 꽉 잡는 것도 아이 쪽이었다. 여자는 그저 손만 내어 주었을 뿐, 꽝꽝 언 아이의 손을 맞잡아 주지 않았다.
맨발이나 다름없이 눈밭을 걷다 넘어지기 일쑤였으나 여자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지 않았다.
“제대로 좀 걷지 못하겠어? 너 때문에 도착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잖니!”
“후, 흡. 미안해요.”
아이는 훌쩍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여자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바로 클리프 남작의 집이었다.
여자는 불이 켜진 저택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서 문을 두드려라. 클리프 남작님께서 이제부터 널 보살펴 주실 거다.”
“저 혼자요? 왜요? 함께…… 아니에요?”
불안함에 연거푸 질문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아이의 입은 얼어 버린 지 이미 오래라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이는 행여라도 떨어질까 봐 여자의 손을 몇 번이고 고쳐 잡으려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여자는 야멸차게도 그 어린 손을 털어 내었다.
“어서 들어가래도.”
“싫어요. 가기 싫어요.”
아이는 울었다.
“싫어요. 날 버리지 말아요. 원래 있던 데로 갈래요.”
헐떡일 정도로 서럽게 울며 부탁했지만, 여자는 기어코 매정하게 먼저 돌아섰다.
“들어가지 않으면 여기서 얼어 죽을 거야. 너 알아서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 뒤 올 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혼자서 가지 말아요. 나도 데리고 가요!”
아이는 울면서 뛰어갔다. 그러나 꽁꽁 언 발 탓에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이내 바닥으로 엎어진 아이는 눈범벅이 된 얼굴을 황급히 들어 보았으나,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여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보라가 휩쓸어 가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얀 세상에 혼자 남겨진 어린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흑, 엄마……. 엄마아……! 엄마아!”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엉엉 울던 아이의 몸은 기력이 다했다는 듯 풀썩, 눈 위로 쓰러졌다.
“아, 안 돼. 제발 날 버리지 말아요……!”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태양보다 붉은 머리카락이 식은땀에 절어 이마와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하얀 눈밭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서린 한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꿈……. 그래, 꿈이야.”
그제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길게 뱉어 냈다.
“한동안 꾸지 않았는데.”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은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꿈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었다.
그날 그렇게 눈밭에 쓰러진 그녀는 한참 고열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보라 치던 날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
* * *
15년 전, 눈보라와 함께 갑작스럽게 나타난 어린 소녀는 클리프 남작가에 한바탕 파란을 일으켰다.
“도대체 아랫도리 간수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어허! 어디서 감히, 하늘 같은 남편한테 큰소리야!”
“하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신이 하늘이라면, 애초에 내 하늘은 무너졌어요! 아이고, 억울해. 이렇게 못 살아!”
어린 소녀의 옷 주머니에서 ‘클리프 남작 나리의 딸입니다.’라고 적힌 쪽지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내게 이런 수치를 또 안겨 주냔 말이에요! 한 번만 더 당신 사생아가 찾아오면 내가 그 망할 놈의 아랫도리를 잘라 버린다고 했던 말을 허투루 들은 건가요!”
“난 정말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저 계집애의 존재도 몰랐다고!”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끄저께도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요. 맨날 그렇게 술만 처먹으니 당연히 기억이 안 날 수밖에 더 있냐고요!”
남작가에는 매일매일 고성이 오갔고, 남작 부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목 놓아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이가 클리프 남작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오로지 초록빛 눈동자 색뿐이었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아이가 제 남편의 사생아라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작이 지금의 상황을 면피하기 위해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저 애가 정신을 차리면 내가 닦달해서 알아내겠어요.”
“마음대로 해! 어휴, 정말 저 성질 머리하곤. 질린다, 질려.”
옛날부터 클리프 남작은 아랫도리 간수를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남작과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이 남작의 아들이랍시고 저택에 데리고 왔던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 아이가 눈을 뜨면 곧바로 내게 알려라.”
“예, 마님.”
하지만 소란을 몰고 온 당사자는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렇게 꼬박 보름이 지나고 난 뒤에야 아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으, 무…….”
“어머, 눈을 떴잖아? 어서 마님을 모셔 와야지!”
때마침 아이의 상태를 보러 왔던 하녀가 이제 막 눈을 뜬 아이를 내팽개친 채, 방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목소리가 컸던지 닫힌 문 너머로 ‘마님! 마님! 나와 보셔요! 아이가 눈을 떴어요!’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쾅, 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이 열렸다.
아이는 누운 채로 연신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이는 눈꼬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켜 들린, 사나운 인상을 한 남작 부인이었다.
“드디어 깼구나. 너, 좀 일어나 보렴.”
남작 부인은 작은 어깨를 우악스레 틀어쥐고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으윽, 잠깐만요. 아파요.”
아이의 앓는 소리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곤 매서운 기세로 연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꼬마야. 네 이름은 뭐지? 지금 몇 살이니? 어디에서 온 거고? 클리프 남작이 정말 네 아버지가 맞니? 대답해!”
남작 부인은 아까보다 더 험상궂은 얼굴로 아이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톱이 여린 살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아, 아파요. 아프단 말이에요.”
아이의 말에 남작 부인이 더욱 사나워진 얼굴로 추궁했다.
“묻는 말에 썩 대답하지 못해!”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보통의 어린애라면 그런 남작 부인의 행동에 겁을 집어먹고 눈물부터 보였겠지만, 이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너! 내 말이 우습니? 왜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거야? 어디서 왔니? 네 어미는 대체 어떤 년이야!”
남작 부인은 계속해서 악에 받친 모습으로 고성을 질렀다.
“어서 대답하지 못하겠니!”
누가 봐도 제 남편에게 화가 난 마음을 어린 애에게 풀고 있었다.
“아아악! 대답해! 어서! 대답해! 누구야!”
아이가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작 부인을 바라보는 눈빛엔 두려움이 아니라 짜증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저기, 좀. 아주머니? 일단 진정 좀 해 보시겠어요?”
아이는 전혀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조금만 조용히 해 주면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하지.
고막을 찢어 버릴 것 같은 높은 목소리가 연이어 쏟아지니 생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디예요?”
아이는 남작 부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도리어 자기가 물음을 건넸다.
남작 부인의 눈이 뾰족해졌다.
“이 망할 것이 지금 어디서 수작이야! 너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척 거짓말하는 거지!”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아이는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다음 말을 잇지는 못했다.
“저는…….”
“그래, 너! 네가 대체 누구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