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화
아이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홍장미’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그 이름만 말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는……!”
“아휴, 뭐 이렇게 답답한 애가 다 있어!”
남작 부인이 또 한 번 바락 성질을 내었다.
하도 고함을 질러 대서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왜지? 왜 내 이름을 말할 수 없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때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잘 나왔다.
아이가 턱을 살짝 몸 쪽으로 당기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사이 남작 부인이 한 번 더 윽박질렀다.
“얘! 귀먹었니? 대답 좀 하란 말이다! 대체 어디서 온 거야!”
일단 그것부터 떠올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기억이 나는 것이라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오들오들 떨면서 눈보라를 헤치고 걸었다는 것뿐이었다.
‘진짜 여긴 대체 어디인 거야?’
아이는 답답했다.
감기에 걸린 듯 열이 올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상태인데 처음 보는 여자가 무섭게 다그치며 제 몸을 짤짤 흔들어 대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남작 부인은 그 후로도 한참 아이를 붙잡고 신상에 관한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눈밭을 걸어왔다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이의 대답이 한결같았기에, 남작 부인은 미심쩍어하면서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우악스레 움켜쥐고 있던 아이의 어깨를 그제야 놓아주었다.
“따로 부르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방에서 나올 생각 하지 말거라.”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 부인이 촛대를 들고 나가자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은 금세 어둠에 삼켜졌다.
혼자가 되자 그나마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아이는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게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원래 내 이름은 홍장미야.’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살던 조금 불운한 20대 청춘이었다.
그녀는 14살에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잃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수발을 들며 살아왔다.
먹고사는 문제가 빠듯했던 그녀는 학업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날은 새벽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주머니 속 휴대 전화가 부르르 몸을 떨며 무엇인가를 알려 왔다.
뭔가 해서 열어 봤더니, 1년 넘게 연재가 중단되었던 소설의 새 회차가 업로드되었다는 알림이었다.
독서는 그녀의 유일한 취미였다.
언제나 생활비가 빠듯했던 그녀는 그럴듯한 취미를 갖기가 어려웠다.
음악, 미술, 공예. 무엇을 배우든 돈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었으며, 요즘엔 시대가 좋아져서 짤짤이 한 푼, 두 푼 회차당으로 결제해서 읽을 수가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어서 봐야지!」
아무튼, 연재 중단된 소설의 재연재를 기뻐하며 새 회차를 막 눌렀을 때였다.
빠아아아앙-.
건널목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던 음주 운전 차량에 그대로 받혔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고통보다 먼저 느낀 것은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
그렇게 홍장미의 의식은 몸이 다시 떨어지기도 전에 사라졌다.
‘분명 크게 사고가 났는데…….’
그런데 지금 나는 살아 있다.
직감적으로 자신이 홍장미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깨어난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누구로 태어났는지, 이곳에 오기 전까진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이름으로 불렸는지 등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달막한 손바닥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불현듯 여느 소설처럼 다른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밀려들었다.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지금의 난 몇 살일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 보려고 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북채로 머리를 쉴 새 없이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둥둥둥둥.
묵직한 소리도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아윽…… 머리 아파.”
아이는 귀를 틀어막고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이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래도 눈보라 치던 날을 기점으로 다른 몸에 들어온 뒤, 그전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은 것만 같았다.
‘새로 태어났으니까 이곳에서 살았던 기억이 더 중요한데.’
아이는 무릎 사이로 더욱 고개를 파묻으며 생각했다.
제발, 누가 날 좀 도와줬으면.
그때였다.
핑-!
어디선가 갑자기 청량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뒤이어 왠지 화가 난 듯한 뾰로통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
아이는 제 눈앞에서 마치 빛이 뿌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반짝이는 가루 너머로 보이는 존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놀란 것은 아이뿐만이 아닌 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는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머, 날 부른 사람이 아가였네?
그 존재는 화를 내려고 했던 것도 새카맣게 잊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아이의 주변을 몇 바퀴나 맴돌았다.
그러다 한참 만에 먼저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가, 안녕. 네가 날 불렀니? 나는 실프야.
요정처럼 보이는 무언가는 어른의 가운뎃손가락만 했다.
‘이, 이건 또 뭐야?’
실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이의 눈에 놀람과 황당함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분명 속으로 생각했는데, 정령이 얼굴을 찌푸리며 두 팔을 제 허리에 척 얹었다.
투명한 날개는 바쁘게 팔락거리고 있었다.
-이거라니! 실례잖아! 나는 바람의 정령이라고!
“뭐? 정령이라고?”
-그래!
이제야 저를 알아봤냐는 듯 정령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으스댔다.
하지만 아이는 그 모습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혼란이 가중될 뿐이었다.
‘잠깐 정령이라면……!’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퍼뜩 떠올랐다.
‘정령이라고 하면 틀림없어. 분명 그 소설이야!’
이 세계가 달의 소녀가 남겨 준 사랑이란 소설 속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홍장미가 생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이기도 했다.
‘내가 읽은 수많은 소설 중에서 정령물은 그것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제 상태는 정확히, 소설 속에 빙의한 것일 테다.
전생에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죽고 난 뒤 이 세계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이 그렇게 낯설게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소설이 뭐야?
생각에 빠져 있던 아이가 흠칫 놀랐다.
아이는 경계하며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정령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내가 속으로 한 말을 듣는 거야?”
실프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그것도 모르냐는 듯 으스대며 소리쳤다.
-그야, 내가 너의 계약자니까!
“내가?”
-그래!
아이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바람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미안하지만…… 난 기억이 없어.”
그러자 정령이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생각에 빠졌다.
-으음. 이상하다. 내가 이렇게 인간계에 나온 걸 보면, 분명 너랑 계약을 맺었기 때문인걸?
“그럼 넌 내가 누군지 알아? 계약을 맺었다면서?”
-몰라! 얼굴 보고 맺은 계약이 아니니까!
정령의 해맑은 대답에 아이의 눈매가 찌푸려지며,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내가 나온 걸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정령은 살랑살랑 날갯짓을 하며 아이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런데 아가야. 너는 이름이 뭐야? 이름이 뭐야? 궁금해! 알려 줘!
바람의 정령은 들뜬 듯 아이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복잡했던 아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뒤 제 눈앞에서 성가실 정도로 뽀르르 뽀르르 날아다니는 실프의 투명한 날개를 잠자리 잡듯 잡아 버렸다.
-꺅! 얘, 놔! 놔! 아파, 놓으라구!
“……시끄러워. 좀 조용히 있어.”
-무례해! 무례한 인간!
마치 갓 태어난 고양이가 젖 달라고 빽빽 우는 것처럼 정령은 시끄러웠다.
아이는 나비처럼 생긴 정령의 날개를 잡은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다시 부를 때까지 다시 어딘가 들어가 있으면 놔줄게.”
-알았어! 놔줘! 놔 달라구!
정령의 대답을 듣고 난 뒤에야 아이는 날개를 놓아주었다.
뽀르르 날아오른 정령은 눈에 바짝 힘을 주어 아이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흥! 감히 날 이렇게 대하다니! 이젠 불러도 안 나올 거야!
그런 뒤 뿅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정령이 마지막까지 머물던 자리엔 반짝이는 가루가 포슬포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휴, 이제 좀 조용하네.”
아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프의 존재를 깨달으며 알게 된 사실을 하나씩 되짚었다.
소설 〈달의 소녀가 남겨 준 사랑〉에서 ‘달의 소녀’는 특이하게도 서브녀였다.
남자 주인공인 ‘바론’의 전 약혼녀이기도 했다.
바론은 남주 치고도 철이 없었다.
오죽하면 원작 작가가 ‘남자 주인공 주의’라는 경고 키워드까지 직접 달았겠는가.
어느 날 국왕의 명으로 국경 순찰을 나간 그는 평민인 여자 주인공 제니스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가장 높은 신분을 타고난 바론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온 제니스와 시시때때로 부딪치지만, 그녀로부터 민생을 배우며 점차 지도자로 각성한다.
커져 가는 제니스에 대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던 바론은 약혼녀인 클라리사에게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한다.
클라리사는 슬퍼하며 수도원으로 떠나고, 그녀를 끔찍하게 아꼈던 오빠 테런은 바론에게 분노한다.
복수를 결심하지만 계획이 탄로나 역모죄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에스테스 공작가는 멸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충 여기가 어딘지는 알게 되었으나, 답답함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원작 소설 제목만 기억해 내면 뭐 하냐고.”
아이는 두통을 견디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누군질 알아야 무슨 계획이라도 세울 텐데…….”
여전히 제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문밖에서는 아까 마주한 무서운 여자가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현실은 소설과는 달랐다.
자신이 누군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래를 대비하자니, 너무 막막하고 암담했다.
아이는 무릎을 더욱 끌어모았다.
“도대체 난 누구지……?”
그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