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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3화 (3/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화

* * *

아이의 등장으로 한바탕 부부 싸움이 벌어졌지만, 남작 부인은 결국 아이를 제 아래로 입적시키기로 했다.

물론 호의에서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로제타다.”

남작 내외는 아이에게 장미라는 뜻을 지닌 ‘로제타 클리프’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아이는 자신이 이 소설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달의 소녀인 클라리사를 괴롭히는 간병인 역할이잖아!’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억 속 끄트머리에서 한 등장인물을 떠올렸다.

원작 소설 속에서 조연도 못 되던, 엑스트라급인 인물!

고작 몇 줄의 설명으로 잠깐 등장했던 그 이름을 기억하는 건, 로제타가 서브녀를 괴롭히는 악역이기 때문이었다.

‘잠깐! 그럼 뭐야? 내가 이 사람들한테 학대를 받는다는 거야?’

아이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듯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는 남작 내외를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단 며칠 이곳에서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래. 이 사람들이라면 자신을 학대하고도 남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망할…….’

원작에선 엑스트라의 과거에 긴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로제타 클리프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은 단편적인 정보뿐이었다.

유년 시절, 부모에게서 학대를 받고 비뚤게 자란 미인.

로제타는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클라리사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녀의 간병인으로 취직이 된 후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구박하고 괴롭히며 학대했다.

그런 로제타의 만행은 훗날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크게 분노한 클라리사의 오빠인 테런 아셔 에스테스 공작에게 죽임을 당한다.

‘왜 하필이면 악녀 쪽 몸에 빙의해선.’

로제타는 입맛이 쓴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왕 이렇게 된 것,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이 소설 본문이 시작하기 전의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클라리사의 간병인으로 지원만 하지 않으면 살 수 있을 거야.’

그녀에겐 미래를 바꾸기에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로제타는 제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이 장미처럼 붉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성의도 없이 지었다.’

로제타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들에게 흔히 붙여 주는 ‘진저’, ‘로즈’ 같은 몇 가지의 이름 중에 하나였다.

윌셔스 왕국에서 붉은 머리카락은 두 가지를 뜻했다.

하나는 윌셔스 왕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4가문 중 하나인 랭우드 후작가의 직계 자손.

남은 하나는 국경 너머에 사는 야만인들.

전자는 왕국민들에게 우러름을 받지만, 후자는 천대와 멸시를 독차지했다.

상식적으로 하급 귀족인 데다가 외모도 변변찮은 클리프 남작이 고매한 후작가의 여식과 바람을 피울 리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작이 야만인 계집과 정을 통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제타가 남작 영애라는 타이틀을 달았어도 어느 누구 하나 그녀를 귀족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어휴, 걸리적거려! 저리 좀 비키세요, 아가씨!”

“야, 너무 그러지 마. 불쌍하잖아.”

하녀들과 시종들은 얄밉게도 로제타에게 아가씨라고 꼬박꼬박 불렀다.

그것이 멸시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로제타는 모르지 않았다.

이 모든 처우가 다, 그녀가 야만인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녀를 지켜 줘야 할 의무가 있는 남작 부인은 그런 하녀들의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별로 좋지도 않은 허름한 것들을 해 줄 때마다 생색은 꼭 잊지 않고 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는 은혜를 잊지 말고 꼭 갚도록 하렴.”

남작 부인이 로제타를 받아들여 주었던 것은 그녀가 여자인 데다 꽤 반반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했지만,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초록빛 눈동자는 커다란 아몬드형이었고, 피부는 눈처럼 하였다.

얼굴형은 달걀처럼 갸름했고, 코는 오뚝했으며, 뺨에는 꽃물이 든 것처럼 홍조가 피어 있었다.

살만 조금 더 찌운다면 분명 인형 같은 얼굴일 것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이렇게 예쁘장하니, 성인이 되면 더욱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이대로 잘만 성장한다면, 네 얼굴로는 아마…… 못해도 2천 골드는 지참금으로 받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남자 사생아 따윈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는 것에 방해만 되지만 여자애는 그렇지 않았다.

유력한 가문, 혹은 돈 많은 가문에 팔아 치우듯 시집 보내면 막대한 지참금을 받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제 아들 이시크의 안위를 편하게 해 줄 욕심에서였다.

“밥을 먹고 싶다면 네 일은 네가 스스로 찾아서 해라.”

매정한 남작 부인의 말에, 로제타는 6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녀들과 똑같은 일을 했다.

청소와 빨래를 했으며, 마구간에 여물을 나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딱딱한 빵과 말라비틀어진 고기 몇 조각, 그리고 묽은 수프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때로는 상한 것이라, 배탈도 종종 났었다.

옷은 언제나 누가 입다 버린 것 같은 해진 것이 주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언제라도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로제타는 악착같이 버텼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무턱대고 사회에 나가 봤자, 인생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꼬일 확률이 높으면 높았지.

14살에 가장이 되었던 홍장미로 살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윌셔스 왕국은 미성년일 때 약혼은 가능하지만, 조혼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시간을 번 셈이야.’

로제타는 아무리 고달프고 더러워도 클리프 남작가에서 성년이 될 때까지는 버티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구박은 받을지언정, 현재 자신이 가장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가 남작가였기 때문이다.

로제타는 매일 궂은일을 하고 허름한 다락방에서 잠들기 전 미래 계획을 세웠다.

자신은 원작의 로제타와 다르니, 행여 서브 여주인공인 클라리사의 간병인이 되더라도 그녀를 학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엮이고 싶지 않아.’

미래에 자신이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라도 더 줄이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원작에 개입하지 않고, 이 지긋지긋한 남작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나 답은 하나였다.

‘돈이 필요해.’

답을 얻자마자 또 다른 문제가 꼬리를 물 듯 따라왔다.

‘어디서 돈을 마련하지?’

이건 꽤나 난제였다.

왜냐하면 이 집안에는 로제타가 빼돌릴 만한 금이나 보석 따위가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아마 로제타보다 이시크나 남작이 먼저 가져갔을 것이었다.

‘돈이 될 만한 것, 돈이 될 만한 것……. 아! 그거!’

로제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 * *

로제타는 어느 순간부터, 남작과 이시크의 방에서 ‘칩’을 훔쳐 냈다.

이 거지 같은 집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두 사람은 노름을 즐겼기 때문에, 도박장에서 현금 대신 사용하는 칩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잃기만 하는 자들이라 집으로 가져오는 칩은 매우 소액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이 로제타에겐 호재였다.

없어져도 티가 나지 않는 푼돈이기에 훔쳐 내기 적절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장기 계획인걸!’

최소 10년에 걸쳐 모을 돈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푼돈에 불과해도 괜찮았다.

‘조금 더 크면 혼자 마을에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때 남작의 심부름이라고 거짓말하고, 모은 칩들을 현금화할 생각이었다.

계획은 순조로웠고, 로제타는 티끌을 모아 작은 동산 정도는 만들었다.

물론 그것을 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얼마나 부려 먹히고 있는데!

이 칩들은 그들이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로제타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달랬다.

‘성년이 될 때까지만 버티자. 조금만 더.’

그렇게 로제타는 15년 동안 괄시와 서러움을 버텨 내었다.

제대로 된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지만, 로제타는 그녀를 학대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아름답게 성장했다.

마치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양, 만개한 장미처럼 찬란하고 화려하게.

남작 부인은 점차 늙어 가는 자신과 달리 아름답게 피어나는 양딸의 외모를 질투하면서도 반겼다.

드디어 이제 때가 됐구나, 하고.

로제타가 성년이 되고 며칠 후. 남작 부인은 그녀를 호출했다.

“로제타. 내가 널 키워 주며 누누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예, 부인.”

로제타는 클리프 부인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클리프 남작 부인이 허락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냥 자신이 부르기가 싫었다.

로제타의 대답에 남작 부인의 입매가 심술궂게 비틀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어릴 때도 어린아이 같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는데, 크고 나서는 더 속을 알 수가 없어서 못마땅했다.

‘소름 끼치는 것 같으니라고.’

게다가 희한하게 로제타를 건드리거나 괴롭히고 난 뒤엔 항상 제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가만히 잘 걸려 있던 방 안의 장식물이 별안간 떨어진 것.

제게 음식을 가져오던 하녀가 발이 꼬여 넘어졌는데 음식물이 그 먼 거리를 날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 머리부터 쏟아진 것.

뭐 그런 대체로 소소하지만, 기분은 확실히 나빠지는 일들 말이다.

게다가 때때로 로제타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인상까지 받아 감정이 곱절은 더 안 좋았다.

‘후우. 참자. 이제 곧 저 망할 것을 치워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남작 부인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타를 도도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네게 베푼 그 은혜를 갚을 때가 왔구나. 네 오라버니를 위해서 결혼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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