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화
그렇게 말한 뒤 툭, 그녀의 앞에 초상화와 간략한 신상 정보를 적은 종이 몇 장을 집어 던졌다.
로제타는 제 발밑에 떨어진 초상화와 종이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듯 내려다보았다.
그것들을 건드리기도 싫다는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자, 남작 부인이 싸늘한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재촉했다.
“뭐 하고 있니? 어서 줍지 않고.”
입술을 힘주어 다물고 있던 로제타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발밑에 흩어진 종이들을 아무렇게나 한데 모아 쥐어 들어 올렸다.
“한번 살펴보렴.”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삼키며, 로제타는 건성으로 종이들을 넘겼다.
볼수록 기가 막힌 기분은 원치 않는 덤이었다.
“다 네겐 과분한 분들이라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하.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과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남작 부인이 로제타의 남편감이랍시고 데리고 온 남자들은 하나같이 하자가 있었다.
로제타보다 쉰 살은 더 많아 보이는 후작의 세 번째 부인 자리.
폭력적인 성향으로 소문이 파다한 자작의 사남.
집안의 재산만 믿고 일은 하지 않으며 그저 노름판에서만 산다는 백작가의 둘째 아들까지.
‘어쩜 이렇게 골고루 모아 왔을까? 신기할 지경이네.’
단 하나 눈에 띄는 공통점은 그들 모두 가문에 돈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게 유일한 장점이기도 했고.
종이를 든 그녀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자애로운 척, 남작 부인이 미소를 띠며 재촉하듯 물었다.
“자, 로제타. 누구와 가장 먼저 맞선을 보련?”
로제타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밑단이 다 해진, 허름한 자신의 드레스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며 울컥거리는 감정을 삼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정말 날 이렇게 팔아넘기겠다는 거로구나.’
끝도 없이 절망이 밀려들었다.
“로제다. 어서 대답하려무나. 어떤 분과 가장 먼저 자리를 마련해 주랴?”
“부인.”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입을 열자, 남작 부인이 어서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마른침을 한번 삼킨 뒤, 로제타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겠어요?”
남작 부인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관대한 양모라는 역할에 심취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고민이 되겠지.”
그러고는 얄미울 정도로 높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한 분들이니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단다. 로제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겠지?”
“물론이어요, 남작 부인.”
로제타는 절망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감추며, 최대한 태평한 척 노력했다.
양순한 그녀의 대답에 남작 부인은 선심이라도 쓰듯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좋아. 그럼 방으로 올라가 보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남작 부인이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하녀들을 불러 또 뭘 시킬 생각인 듯했다.
“편안한 오후 시간 되세요. 부인.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세게 깨물던 로제타가 간신히 남작 부인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뒤를 돌았다.
그런 뒤,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남작 부인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로제타가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실프. 잠깐만 나와 봐. 네 도움이 필요해.”
실프를 부르기 위해선 반드시 육성으로 소리를 내어야만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제멋대로 튀어나왔을 때를 제외하곤 항상 그래 왔다.
그러자 특유의 ‘핑-!’ 소리와 함께 은빛 날개를 자랑하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바람의 정령, 실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실프가 단순해서 다행이야.’
보아하니 지난번에 싸우고 토라졌던 일은 또 까먹은 것처럼 보였다.
실프는 꽁해 있다가도 시간이 조금 지나거나, 대가로 단것을 주겠다고 하면 금세 마음을 풀었다.
오랜만에 불려 나온 실프는 신이 난 모양인지 잔뜩 들떠 로제타의 주위를 뽀르르 날아다니며 웃었다.
-불렀어, 로제타? 뭐 해 줄까?
부르기만 하면 이젠 육성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로제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아줌마 머리카락 좀 잔뜩 꼬아놔 줘.’
정령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또 로제타를 구박했어?
로제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못된 말만 골라서 하잖아. 그러니 나도 갚아 줘야지.’
-아주 나쁜 사람이네! 정말 못됐어!
로제타의 마음에 감응이라도 한 것처럼 실프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그러니까 나 대신 실프가 좀 혼내 줘.’
-알았어! 나만 믿어!
어차피 이 정령은 자신 말고는 그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사이, 로제타는 남작 부인의 방문 가까이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를 따라서 뽀르르 같이 날아온 실프가 바라는 게 있는 양 몸을 배배 꼬며 은근히 물어 왔다.
-그런데 로제타. 저 아줌마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나면 나한텐 뭐 해 줄 거야?
정령과의 계약은 ‘등가 교환’을 원칙으로 했다.
그녀가 부탁한 소원을 실프가 들어 준다면, 자신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정령이 더 큰 힘을 쓸수록 계약자가 내어 주는 것도 더 컸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프는 바람의 정령 중에서도 가장 하급이라 애초부터 큰 힘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따 꿀 좀 줄게.’
-꺅! 꿀! 꿀 좋아! 정말 좋아!
꿀이라는 단어에 신이라도 난 것처럼 하급 바람의 정령이 로제타의 머리를 몇 바퀴나 빠르게 빙빙 돌았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 로제타는 마지막으로 실프에게 당부했다.
‘머리를 아주 많이 헝클어 놔 줘. 싹둑 잘라 버리지 않는 이상 풀지 못하게. 그것도 아니면 못이나 어디 틈 새에 머리카락이 끼게.’
그렇게 말하면서 로제타는 자신의 오른손을 살짝 앞으로 뻗었다.
그런 뒤, 마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듯한 동작을 취해 보였다.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겠지?’
-알았어! 꺄! 재밌겠다!
실프가 잔뜩 신이 나 연신 듣기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로제타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키득거리며 실프와 은밀한 작당을 하니, 기분이 아주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하고 올게!
‘응, 힘내. 실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바람의 정령은 쪼르르 로제타를 지나쳐 날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남작 부인이 내지르는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악! 이게 뭐야. 내 머리! 이봐! 누구 없니? 내 머리 좀 풀어내 봐!”
로제타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방문을 닫았다.
복도 맞은편에는 남작 부인의 부름을 받고 오던 두 하녀의 모습이 보였다.
“꺄아아악! 누가 좀 빨리 와 봐!”
그사이에도 남작 부인의 비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그제야 그 소리를 들은 하녀들이 눈짓을 교환하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세요, 마님? 어머, 세상에! 머리가 왜 이렇게 되셨담?”
“어머머, 마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꺄악! 이 망할 계집! 아프잖아! 살살 좀 하라고!”
“죄송해요, 마님. 근데 너무 강하게 엉켜 있어서요.”
“아악! 아파, 아프다고! 좀 살살하지 못해!”
등 뒤에서 이는 소란에 로제타는 한껏 입술을 끌어 올렸다.
‘꼴 좋다.’
입술을 비틀던 로제타는 행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어서 시선을 거두고 곧장 자신이 사용하는 골방으로 향했다.
실프와 작당을 할 때만 해도 조금 가벼워졌던 마음은 다시금 혼자가 되자 무섭게 가라앉았다.
빠르게 계단을 올라 제 방에 도착한 로제타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그런 뒤 방문에 기대어 힘없이 주르륵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깊고 무거운 한숨이 입술을 가르고 흘러나왔고, 5월의 녹음보다 더 짙은 초록색 눈동자에선 미처 추스를 새도 없이 투명한 눈물이 고이다가 이내 아래로 흘러내렸다.
“흡, 흑.”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면 안 된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고쳐 물어 봤지만 자꾸만 힘이 풀려 결국 흐느껴 버리고 말았다.
로제타는 주저앉은 상태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여린 몸을 들썩이며 서럽 게 울었다. 정말, 팔려 가기 싫었다.
“……이제 도망치자.”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그녀는 뺨에 번진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며 결의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년도 됐으니까 이제는 클리프 남작 내외가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을 거야.”
로제타는 당장 오늘 밤이라도 도망쳐야겠단 다짐을 했다.
막말로 일자리를 구하기만 하면 저 혼자 사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로제타가 남몰래 떠날 결심을 한 그날 오후, 클리프 남작가에 한 통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절벽 끝에 내몰린 로제타에게 동아줄이 되어 줄.
* * *
“로제타! 로제타! 당장 내려와 봐라!”
바깥에서 남작 부인의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칠 결심을 마친 뒤 정신없이 짐을 싸고 있던 로제타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침대 밑으로 서둘러 가방을 밀어 넣었다.
“로제타! 내 말 안 들리니?”
하지만 로제타가 내려오기는커녕 대답도 해 오지 않자, 남작 부인은 그 짧은 새를 못 견디고 직접 계단을 올랐다.
채신머리없이 발을 어찌나 굴리는지, 뒤꿈치로 온 집 안을 쿵쿵 찧고 다니는 기세였다.
“또 왜 부르는 거야.”
로제타가 짜증스레 중얼거리고는 몸을 막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그와 동시에 노크도 없이 벌컥 방문이 열렸다.
“로제타! 에스테스 파크에 좀 다녀와야겠다!”
남작 부인은 목소리만큼이나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 평수까지 넓어진 남작 부인이 로제타의 앞으로 하얀 편지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부인.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게 초대장이 왔구나! 안 그래도 에스테스 공녀가 영지로 요양차 내려왔다고 하더니, 이제 좀 괜찮아진 모양인지 미뤘던 사교 행사를 열 모양이다!”
미리 뜯어 본 모양인지 편지 봉투에 붙어 있던 씰링이 뜯겨져 입구가 팔랑이고 있었다.
에스테스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로제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스테스 공작 영애가 바로 이 소설 속의 서브녀이자, 원작의 로제타가 학대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클라리사와 엮여서 간병인 생활을 시작하는 게 이때였구나.’
말이 초대장이지 사실 요양하러 내려온 클라리스 마리안느 에스테스 공녀의 간병인을 구하기 위한 면접 통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