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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5화 (5/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5화

‘정말 수도를 떠나 영지로 내려온 게 맞았어.’

간병이라고 해 봤자, 뭐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어 준다거나, 간단한 게임을 같이 하는 것.

몸이 허약해 바깥에 잘 나갈 수 없으니, 삶이 무료하지 않게 ‘말동무’를 두는 것이었다.

로제타는 얼마 전 마을 신전에 갔을 때 사람들이 두런두런 나눴던 이야기를 스치듯 들은 걸 떠올렸다.

「소식 들었어? 지금 신전에 에스테스 공작가의 공녀님께서 들러 계신다는구만?」

「아니, 그분이 왜?」

「영지에 내려왔으니 교구의 사제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일부러 걸음 하신다던데.」

「오매. 애기씨께서 당분간은 영지에 계속 계실 모양인갑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로제타는 곧바로 도망치듯 신전에서 빠져나왔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소설 속 주요 주인공들과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한 까닭에서 반사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그날은 정말 조금이라도 빨리 신전에서 멀어지고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의 뒷모습을, 이미 누군가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 * *

원작에서 로제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받아 온 탓에 마음이 많이 망가졌다.

그래서 천성이 상냥하고 또 많은 이에게 사랑받으며 모든 것을 거저 가진 듯 누리는 ‘클라리사’를 싫어했다.

자신의 불행하고 안쓰러운 처지를 되새겨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신체적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으나, 클라리사가 몸이 허약한 것을 핑계로 수년에 걸쳐 가스라이팅을 했다.

너같이 허약한 아이를 누가 좋아하겠니.

네 기침 한 번에 공작가의 시종들 여럿이 고생하는구나.

참 민폐다 등등.

천성이 착했던 클라리사는 정말로 자신의 몸이 약한 게 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플 때마다 증상을 숨겼다.

그렇게 클라리사는 금방 나을 수 있는 병까지 숨겨 몇 번이나 크게 앓았고, 그 때문에 건강을 많이 해쳤다.

게다가 계속되는 가스라이팅에 자존감이 떨어져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왕세자는 180도로 달라진 클라리사의 모습에 마음이 떠난다.

클라리사는 파혼 후 열악한 환경의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탓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된다.

‘결국 원작의 로제타가 클라리사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나 다름이 없지.’

그래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에스테스 공작에게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살려면 그녀와 엮이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로제타의 복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떠올라 있었지만, 남작 부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제 할 말만 해 댔다.

“가서 얼굴도장이라도 찍고 오렴. 그래야 훗날 공녀가 널 기억하고, 에스테스 공작님께 네 오라버니를 중용하시라 언질이라도 드릴 것 아니니?”

로제타는 대답하지 않고 초조함에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어떡하지?’

이제 선택해야 한다.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초대에 응해 에스테스 공작가로 간다면 클라리사와 엮이고 죽음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클리프 남작 부인이 내내 제 방에서 죽치고 서서 저를 닦달할 것이 분명했다.

충동적으로 결심한 것이긴 하나, 오늘 밤 모두가 잠들면 도망칠 계획을 세웠던 로제타의 입장에선 둘 다 낭패인 일이었다.

‘차라리 공작가로 가는 척하면서 중간에 도망칠까?’

로제타는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자신에게 가장 좋은 수가 무엇인지 가늠했다.

‘그냥…… 에스테스 파크로 갈까?’

이상하게도 자꾸 그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스스로도 그 이유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들었다.

뭐랄까.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마치 이런 게 바로 원작의 강제성인 것만 같았다.

‘아냐. 난 클라리사를 학대하지 않아. 그러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에스테스 공작가로 가도 괜찮지 않을까?

원작의 로제타는 미래에 벌어질 일을 모르지만, 이 소설을 읽었던 자신은 안다.

클라리사를 괴롭히면 제게 어떤 미래가 닥칠지.

그러니 책의 내용을 따라 잘못된 일을 반복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만 같았다.

‘물론 현재까지는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곤 있지만…….’

크는 동안 개의치 않았다곤 해도 자신 역시 클리프 남작가에서 정서적, 육체적 학대를 받긴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작의 로제타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달라.’

쫓겨나지 않기 위해 무력하게 당하 기만한 원작의 로제타와 달리, 그녀는 실프를 통해 자신을 괴롭힌 남작 부인과 이복 오라비, 그리고 하녀들에게 조금이나마 복수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남자 주인공이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야. 남주, 여주 둘이서만 좋아 죽는 스토리고, 그 주변인들 누구 하나 행복해지지 않는 원작이었는데, 내용이 조금 틀어지면 어때?’

생각의 가지가 한 번 그쪽으로 뻗으니, 마음이 계속 그 방향으로만 쏠렸다.

이 클리프 남작가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클리프 남작가에 계속 머무르며, 돈에 팔리듯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지옥 같은데, 더 깊고 질척한 진흙탕에 발을 내딛는 것은 이제 사양이었다.

“로제타,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니?”

짜증이 난 목소리로 남작 부인이 로제타의 팔을 꼬집었다.

피부에 아릿하게 퍼지는 고통에 로제타가 아주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속내를 숨기며 표정을 가다듬고는 입을 뗐다.

“알겠어요, 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초대에 응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겠습니다.”

클리프 남작 부인은 반색하며 기뻐했다. 손뼉까지 짝, 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오, 그래. 로제타. 네가 이제야 철이 든 모양이구나. 그래, 아무렴 너도 염치가 있다면 밥값을 해야지!”

저놈의 밥값.

진짜 밥 한 번 제대로 주고 나서 저런 생색을 부리면 좋으련만.

남작 부인은 로제타에겐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후우. 어디 한번 잘해 보자. 할 수 있어.”

홀로 남은 로제타의 얼굴에 결의가 가득 찼다.

2. 에스테스 파크

젊은 공작은 늘 바빴다.

그런데도 산더미같이 밀려 있는 일들을 다 제쳐 두고, 고작 티 파티 따위에 참석을 결심한 것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테런 아셔 에스테스.

윌셔스 왕국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4가문 중 바람의 힘을 다스리는 신수 ‘피르’의 영원한 맹약자이자 에스테스 공작가의 젊은 주인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한 테런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놓았다.

의자를 뒤로 물리며 책상과 제 몸의 거리를 막 벌렸을 때였다.

그의 보좌관인 긱스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긱스의 품 안에는 테런이 ‘또’ 살펴보고 수정 지시, 혹은 결재해야 하는 서류가 한가득 안겨 있었다.

긱스는 보란 듯이 테런이 아직 앉아 있는 책상 위에 그 종이 뭉치들을 소리 나게 내려 두고는 불퉁한 어조로 물었다.

“꼭 가셔야 하겠습니까?”

생략된 뒷말은 ‘이 시국에’였다.

그러니 긱스가 저런 말을 굳이 하는 것은 제 주인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불만을 쏟아 내고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긱스가 뒤이어 툴툴거렸다.

“바빠 죽겠단 말입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쁠 때 테런 혼자만 일 지옥에서 쏙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테런은 제 보좌관이 이런 식으로 대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 불쾌해하지 않고 여상하게 받아들이며 대꾸했다.

“그럼 어쩌겠나. 내가 오늘도 이 잘난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면 카밀라 대부인께서 당장이라도 이 집무실의 문을 걷어차며 들이닥치실 텐데.”

“대부인께선 그리 교양 없는 분 아니십니다.”

“비유가 그렇단 말이지, 비유가.”

“그래도 불손하십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 긱스 자네가 나 대신 대부인을 상대해 드린다면 내 기꺼이 오늘 티 파티에 불참을 결심할 수 있어. 자네 몫의 일까지 내가 다 하지.”

“그건 싫습니다.”

일말의 재고도 없이 너무나도 단호한 긱스의 즉답에 테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단호해서 상처받는데.”

“그러실 리가요.”

“진심으로 너무하는군.”

테런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비치는 피콕블루색 눈동자가 웃음기를 머금고 살짝 가늘어졌다.

“바쁘다는 사정을 잘 설명드린다면 대부인께서도 양해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에스테스 가문의 최고 어른이시지 않습니까?”

“퍽이나 그러시겠군.”

테런이 코웃음을 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재킷을 세로로 반 접어 팔에 걸치자 긱스가 지적했다.

“제대로 갖춰 입으십시오. 가만 보면 각하께서도 늘 대부인께 혼날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계십니다.”

“도착하기 직전에 입어도 되지 않나.”

테런이 한숨을 삼키면서도 제 보좌관의 말에 따라 순순히 재킷을 몸에 걸쳤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미련이 남는 모양인지 은근한 말투로 넌지시 한 번 더 말했다.

“긱스. 정말 마지막 기회야.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까지 휴가를 주지. 그러니 나를 대신해서 대부인의 티 파티에 참석할 의사가…….”

“없습니다.”

긱스는 테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쪼르르 제 책상으로 가 코를 박듯이 서류를 보는 척했다.

그런 제 보좌관의 행동을 본 테런의 얼굴에 어이없음이 스쳤다.

“정말이지, 이 가문에 내 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군.”

씁쓸하게 중얼거린 테런이 집무실을 나섰다.

“초대받은 곳이 차라리 마차를 타고 갈 정도로 멀면 좋았을 것 같군.”

그럼 바퀴가 빠졌다든가, 도적을 만났다든가 핑계라도 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 테런은 진심으로 무척이나 애석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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