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6화
* * *
테런은 에스테스 공작저의 썬룸으로 향했다.
그곳에 오늘 그를 초대한 티 파티의 주최자가 있었다.
썬룸 문을 열자 열대 나라에서 수입해 온 야자수의 푸르른 잎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징검다리처럼 만들어 놓은 돌 타일을 밟아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넓은 원형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선선대 에스테스 공작 부인인 카밀라 에스테스가 앉아 있었다.
테런은 티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카밀라 대부인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할머님. 저 왔습니다.”
“오, 테런. 시간 맞춰 왔구나.”
“오늘 티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빈말엔 소질이 없구나. 입꼬리가 잔뜩 경직되어 있단다.”
카밀라가 검지로 제 입술 끝을 두드리며 말하자 테런이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계속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일단 앉아 보렴.”
톡, 톡.
손가락으로 긴 막대 모양의 쿠키를 부숴서 먹고 있던 카밀라는 곧장 과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제 손자에게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권했다.
테런의 흑발과 달리, 카밀라의 머리는 하얬다.
나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래 그녀가 가진 머리카락 색 역시도 은발이었다.
물론 젊었을 때와 달리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희끗해졌고 색이 바랬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카밀라 대부인을 초라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륜에서 느껴지는 중후함을 배가시키면 시켰지.
“그런데 티 파티라고 하셨는데 어째 손님이 저 말곤 안 보이는군요.”
“그야 너만 초대했으니까.”
“그럼 오늘의 티 파티는 무척이나 재미없고 따분하시겠습니다.”
카밀라가 눈을 흘겼다.
“손자를 재미로 만나는 할미도 있더냐.”
“대부분의 조부모님들은 손자, 손녀를 재미로 만나시죠.”
테런의 대답에 카밀라가 들으라는 듯 티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난 퍽 우울한 늙은이인 게 틀림없구나. 손자, 손녀가 있으면 무엇하니? 한 아이는 영지로 내려가 올라올 생각을 않고, 한 놈은 무뚝뚝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카밀라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 널 부른 건 이야기나 좀 나눌까 해서 부른 거란다.”
“제 말솜씨가 그리 뛰어나지 않아 할머님의 말동무에 적합하지 않을 듯해 걱정입니다.”
카밀라 대부인이 잔웃음을 터트렸다.
“말은 나 혼자 할 테니 넌 그저 들으면서 ‘네.’ 하고 대답이나 성실히 하려무나, 테런.”
“굳이 꼭 ‘네.’라고만 해야 합니까?”
“그래. 얼마나 좋으니? 할미가 대답까지 미리 정해 주고.”
과연 좋은 것인가…….
테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베일런가가 다복한지 매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구나.”
“후작가에 좋은 일이 있나 보군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으나, 테런은 내심 긴장했다.
베일런 후작가에 카밀라의 호적수인 에일리 베일런 대부인이 있었다.
카밀라와 에일리는 젊었을 적부터 겨뤄 온 사교계 라이벌로, 서로에게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고상하게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카밀라 대부인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에일리가 증손녀를 보았다는구나.”
카밀라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딱딱함을 풍겼다.
테런은 본능적으로 위험 신호를 느꼈다.
서둘러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도하며 말했다.
“할머님. 그러고 보니 제가 급한 일이 있는 것을 깜빡…….”
“앉으렴, 테런.”
묘하게 압박감을 주는 목소리에, 테런은 입술을 힘주어 길게 늘이고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절로 한숨이 터지는 기분이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테런. 너도 이제 슬슬 혼인을 해야 하지 않겠니?”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카밀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스물셋인데?”
“아직 스물셋입니다.”
테런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귀족 자제들은 결혼을 독촉받았다.
귀족가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
더 큰 권력과 부를 만들어 내기 위한 거래와 다름이 없었다.
물론 에스테스 공작가의 경우엔 테런이 결혼을 독촉받는 이유가 카밀라의 호승심 때문이지만.
“에일리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단다. 자기는 증손녀까지 봤는데, 나는 언제 손자며느리를 보겠느냐고. 이러다 그 명망 높은 에스테스 공작가의 대가 뚝 끊기는 것이 아니냐고.”
카밀라가 한층 높은 톤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눈빛은 이미 뾰족해졌고, 살짝 이를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차오르는 분을 삼키려는 듯 심호흡한 카밀라가 다시 테런에게 물었다.
“테런. 올 시즌 사교 모임엔 당연히 참석하겠지?”
잘생긴 테런의 얼굴에 곤란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두 번 얼굴은 비치겠습니다만 쭉 참석하는 것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러면 내 손자며느리는 언제 생기니?”
“제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맨날 집무실에 처박혀 여자라곤 만나지도 않는 놈이 운명 같은 소리를 다 하고 있구나.”
고상함과 체면 따위 다 내팽개친 카밀라가 험한 말을 하며 고운 얼굴을 찌푸렸다.
“너도 네 아버지처럼 낭만에 젖어 쓸데없는 공상만 머릿속에 가득 차선. 쯧. 사내라면 마땅히 야망이 있어야지.”
“그 야망을 모두 사업과 일에 쏟아붓고 있지 않습니까.”
제 손자의 막강한 방어 화법이 마뜩잖았던 모양인지 카밀라가 짧게 혀를 차고 뚱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맡은 일로 바빠서 영 아내를 찾을 시간이 없는 거라면 내가 직접 골라 주마. 이미 후보감은 여럿 추렸단다.”
“할머님.”
테런이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그만하시라는 듯 카밀라를 불렀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에스테스 대부인으로서 내게 그럴 권한쯤은 충분히 있으니 말이다.”
카밀라가 진심으로 강행할 기세라 테런은 물러나며 대답했다.
“다망하신 분께 그런 수고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제 짝은 제가 찾겠습니다.”
“그럼 그럴래?”
카밀라 부인이 만족했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이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으름장을 놓듯 물었다.
“말만 하고 찾는 시늉만 하다가 시간을 보낼 셈은 아니겠지, 테런 아셔 에스테스?”
카밀라의 예리한 물음에 테런은 정곡을 다 찔린 듯 따끔한 기분이었다.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느물거리며 미소만 짓고 있자, 카밀라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역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마음이 불편하다는 듯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테런. 도대체 언제까지 죽은 아이에게 목을 맬 참이니?”
그 순간 테런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썬룸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대화가 뚝 끊겼다.
잠시 숨을 고른 테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에게 신의를 지키고자 혼자인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 눈엔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인단다.”
테런이 한숨을 삼켰다. 별안간 넘어온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제 몫의 차를 단숨에 비웠다.
“차 잘 마셨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네가 바쁜 것은 사실이니 더 붙잡고 있을 순 없지. 그만 일어나 보렴.”
다행스럽게도 카밀라는 더 붙잡지 않았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런이 몸을 일으켰다.
높아지는 손자의 얼굴을 따라 카밀라의 시선도 점점 들렸다.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당부했다.
“테런. 내 말 꼭 명심하렴. 내 앞에 손자며느리를 데리고 와야 하는 기한은 석 달이란다.”
테런의 미간이 곤란함에 찌푸려졌다.
“너무 빠듯합니다.”
“그래? 그럼 좋다. 백 일로 하자꾸나.”
카밀라 대부인은 선심 쓰듯 열흘을 더 얹어 주었다.
테런이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테런은 우아하게 내민 카밀라의 손등 위에 살포시 입술을 묻어 경의를 표했다.
무척이나 시끄러운 속은 꼭꼭 숨겨 감춘 채로.
* * *
로제타가 초대장에 대한 참석 답장을 보내고 이틀 뒤,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마차와 시종을 보내왔다.
“세상에, 뭐가 다 이렇게 고급이람?”
클리프 남작 부인과 하녀들은 황홀한 눈으로 그들을 봤다.
시종들이 입고 있는 옷감만 보더라도 남작 부인의 것보다 훨씬 질이 좋아 보였다.
이 마중을 통해, 로제타는 사실상 자신이 클라리사의 간병인으로 내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제타 쪽에서 그 일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보통은 명예라고 생각하니까.’
대부분의 경우, 한 가문의 아래에 속한 가문은 자신들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의 수발을 드는 것을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고위 귀족의 측근이 되는 일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귀족 영애들은 제 아버지나 오라비의 출세를 위해서 공녀나 후작 영애의 시녀직을 기꺼이 맡았다.
물론 가문의 영달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자신보다 작위가 높은 가문의 영애와 연이 닿고 싶어 했다.
그래야 수도의 사교계로 진출할 수 있고 조금 더 좋은 조건의 남편감을 물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에스테스 공작가 쪽에서도 로제타와 클리프 남작가가 좋아하면 좋아했지, 거절하리라곤 생각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뭘 이렇게 좋은 마차를 보내 주셨는지. 그냥 남작가의 것을 타고 가도 될 일인데.”
남작 부인은 이런 좋은 마차를 자신이 아닌 로제타가 먼저 탄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차 주변을 슬렁슬렁 돌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는데, 그것을 에스테스의 시종이 들은 모양이었다.
“에스테스에 묵는 손님은 모두 극진히 모시라는 공녀님과 집사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공손하고 예의 바른 그 대답에 더 할 말이 없었는지, 남작 부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에스테스의 시종이 로제타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짐은 이리 주십시오.”
“고마워요.”
낯선 호의에 로제타가 수줍게 웃어 보이자 시종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마차를 몰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같은 영지 내라고는 하나, 에스테스의 땅이 워낙 드넓은 탓에 변두리의 클리프 남작가에서 본채가 있는 에스테스 파크에 도착하려면 마차로 꼬박 하루를 이동해야 했다.
오가는 과정이 고되니 이번 초대는 하루 이틀 묵는 것이 아니라 최소 일주일 이상을 묵게 될 것이다.
마차를 한 바퀴 둘러본 남작 부인이 다정한 척 로제타에게 말했다.
“가서 공녀를 잘 뵙고 돌아오너라. 중간중간 네 오라비가 어떤 사람인지 칭찬도 좀 곁들이고 말이다. 알았지?”
로제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남작 부인.”
“응?”
공작가에서 온 시종들의 눈치를 보는 모양인지 남작 부인은 어울리지도 않는 자상한 미소를 띠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로제타가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