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7화
“음, 그래. 다녀와서 나중에 하려무나. 지금은 공녀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니 우선 출발을 하고…….”
시종들을 흘끔 곁눈질한 남작 부인이 살짝 재촉하며 말했다.
하지만 로제타는 개의치 않았다.
“잠시 귀 좀 빌려주시겠어요?”
그녀가 한 발자국 더 남작 부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제야 남작 부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귀를 내주었다.
로제타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랍니다.”
“……뭐?”
흔들리는 남작 부인의 눈동자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볼만했다.
로제타가 싱긋 웃었다.
“항상 절 꼴 보기 싫어하셨잖아요. 언제나 키워 준 값을 하라고 하셨는데, 제가 가진 게 무엇이 있겠어요. 하여 가장 손쉽게, 남작 부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실 선택지를 택하였답니다.”
그녀의 말에 남작 부인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현 상황을 도저히 이해 하기 힘든 듯 보였다.
“……뭐? 그러면 네 오라비는?”
남작 부인이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묻자, 로제타는 마치 약을 올리듯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성인이잖아요. 지난 15년간 부인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호적으로 얽혔을 뿐, 사실은 남남이라고 누누이 되새겨 주셨잖아요. 그러니 오늘, 저 역시 부인께 그 간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 드리고 싶네요.”
그러자 남작 부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남작 부인은 도저히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 되바라진 것이……!”
로제타가 붉은 입술을 아찔하게 끌어 올렸다.
“어머나. 혹시 때리시게요?”
살짝 제 오른뺨을 내어 주는 것은 덤이었다.
남작 부인은 화로 벌게진 얼굴로 사납게 로제타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익!”
“저는 괜찮지만.”
로제타가 살짝 말꼬리를 늘이며 말 끝을 흐렸다.
일부러였다.
“에스테스 공녀께서 빨갛게 달아오른 제 한쪽 얼굴을 보고 뭐라고 생각하시겠어요?”
로제타는 해사하게 웃었다.
얄미울 정도로.
“언제나 그랬듯 전 잃는 게 없답니다, 남작 부인.”
어차피 자신은 이곳을 떠난다.
그러니 이제 더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저도, 모두를 잃는 것은 오직 남작 부인과 이 클리프 남작가겠죠.”
더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 침없이 말을 잇는 로제타의 얼굴엔 이제껏 본 적 없는 환한 빛이 가득했다.
“그래도 절 때려야 마음이 풀리시겠다면, 기꺼이 제 뺨을 내어 드리겠어요.”
남작 부인은 그저 손만 치켜들 뿐 도무지 내려치지 못했다.
“고얀 것 같으니라고. 내가 이날 이때껏 널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시기는요.”
로제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냥 자연의 순리에 맡겨 키우셨죠. 굶어 죽든 말든, 신경이라고는 조금도 쓰지 않으셨잖아요. 설마 벌써 섬망이 와서 다 잊으신 건 아니겠죠.”
“로제타! 말을 가려 하려무나!”
로제타는 코웃음을 쳤다.
“때리지 않을 생각이시면 이만 얼굴을 돌려도 될까요? 목이 뻐근해서 말이에요.”
남작 부인이 이를 갈 듯이 으르렁거렸다.
“네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너는 고작 에스테스 공녀의 초대를 받아 잠시 머물러 가는 것뿐이야. 공작가에 시집을 가는 게 아니란 말이다.”
사실 로제타는 소설 주조연급 등장인물들과 얽힐 마음이라고는 이날 이 때껏 조금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남작 부인의 기를 눌러 코를 꽉 밟아 주고 싶었다.
‘뭐 어때. 듣는 사람도 없는데.’
로제타는 여태껏 보인 적 없는 환한 미소로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거야 ‘아직’ 모를 일 아닌가요?”
은근한 그녀의 말에 남작 부인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네가 그 잘난 얼굴만 믿고 망언을 쏟아 내는구나.”
“부인 말씀대로 믿을 건 제 얼굴 하나뿐이라서요.”
그 말에 남작 부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는 옆에 심드렁히 서 있던 제 남편의 뒤룩뒤룩 살이 찐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낮은 목소리 로을렀다.
“당신! 저 계집이 하는 말 못 들었어요? 왜 따끔하게 혼을 내지 않는 거예요?”
“뭘 혼내라는 거야. 저 애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저 얼굴로 공작을 꼬실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여보!”
“아! 진짜 귀 아파, 이 여편네야.”
“쉿! 목소리 좀 낮춰요. 저쪽 사람들이 들으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게 그렇게 걱정이면 마귀할멈같이 사나운 당신 표정부터 좀 가다듬든가.”
“여보!”
전날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클리프 남작은 제 아내의 질책에 귀찮은 듯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사실 그는 숙취로 잠이나 더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작 부인의 등쌀에 떠밀리듯 이곳에 나와 서 있을 때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로제타에 관해서 별 관심도 없는데, 자신이 이렇게 배웅을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남작 부인의 말에 일부러 더 심술궂게 대답하는 중이었다.
“두 분은 참…… 한결같으시네요.”
로제타는 그런 두 사람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떼었다.
그런 뒤 보닛을 고쳐 매고는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키웠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마중 온 분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이만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그녀는 남에게 인사하듯,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아 좌우로 펼치며 까딱 묵례를 했다.
“그럼 부인, 내내 평안하세요. 긴 시간, 잘 머물고 갑니다.”
단 한 번도, 클리프 남작가를 집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는 듯.
그런 뒤 로제타는 곧바로 클리프 남작 부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로제타!”
남작 부인은 무척이나 화난 목소리로 여러 차례 그녀를 불렀으나, 로제타는 돌아보지 않았다.
“작별 인사는 마쳤답니다. 이만 출발할까요? 공녀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에스테스의 시종들은 대귀족을 모시는 사람들답게, 방금 전 있었던 작은 실랑이를 못 본 척했다.
대신 그녀가 자신들 쪽을 돌아본 순간부터, 시종 전원이 마치 홀린 듯이 로제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러 몇몇은 ‘와…….’ 하는 감탄사를 흘렸고,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예쁘다’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로제타가 먼저 말을 붙이기 전까지 제대로 정신도 못 차리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가씨.”
“괜찮아요.”
차곡차곡 속에 쌓아 온 말들을 남작 부인에게 한바탕 쏟아 낸 덕분인지, 로제타는 지금 좀 관대해져 있었다.
“최대한 편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에스테스가의 시종들은 남작 부인과 로제타 사이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들의 그런 점이 로제타는 썩 마음에 들었다.
“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에스테스에서 마중 온 시종들은 로제타에게 매우 정중했다.
하여 일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지 않고, 그녀의 뜻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계획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가시는 길이 위험하지는 않지만, 거리가 생각보다 멀 겁니다. 하루는 꼬박 달려야 하지요.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가는 길에 지날 마을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겠습니다.”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로제타의 편의를 봐주고자 하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로제타는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게 쏟아지던 시선과 말투는 언제나 뾰족했다.
‘나는 이제 그런 쪽에 익숙해졌구나. 슬프게도…….’
하지만 로제타는 모처럼 제게 호의를 보내오는 사람들에게, 자신 역시 호의로 돌려주고 싶었다.
“에스테스가에서 보내 주신 마차가 이렇듯 크고 좋은데, 굳이 먼 길 돌아서 갈 필요가 있을까요? 여러분들만 괜찮으시다면, 저 역시 짧은 휴식을 취하는 것 정도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로제타의 말에 에스테스의 시종들이 밝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사려가 깊으시군요.”
처음 들어 보는 칭찬이었다.
클리프가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에게 ‘생각 없이 사는 멍청하고 둔한 것’이라고 폭언을 쏟아 냈기 때문이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웃으며 눈을 맞춰 오는 그녀의 모습에 시종 하나가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로제타는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앉자 문을 닫았는데, 행여 소리라도 낼까 조심스러웠다.
로제타가 앉자마자 에스테스가의 시종들은 일사불란하게 준비를 마치고 마차를 굴렸다.
하지만 길이 좁고 고르지 않아서인지 속도는 좀처럼 나지 못했다.
클리프 남작가는 가계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사는 곳 역시 허름하고 외진 데 있었다.
‘그 정도로 돈이 없으니 내가 성년이 되자마자 늙다리나 이상한 남자에게 팔아넘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
집은 그저 구색 맞추기용으로 크기만 할 뿐, 어지간한 돈 많은 상인이 사는 집보다 못하고 허름했다.
그렇다 보니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저택까지 오는 길을 정기적으로 닦아 내지도 못했다.
‘뭐, 다 쓰러져 가는 남작가에 찾아올 손님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마차의 덜컹거림이 클수록 로제타의 꿍한 마음도 단단히 뭉쳤다.
하지만 그러길 잠시.
마차는 클리프 남작가에서 멀어지기 무섭게 덜컹거림이 줄어들더니 부드럽고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로제타는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만끽했다.
“아, 좋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마치 실프가 장난치는 것처럼, 로제타의 붉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머리칼이 얼굴을 스치며 간지럽혔지만, 로제타는 그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난 바람이 좋아.”
자신이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어서 그런 것일까.
유독 바람은 제게 친절한 것만 같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이동했을까.
별안간 말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