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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8화 (8/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8화

잠시 시간을 두고 문이 열리자 시종이 공손하게 두 손을 포개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가씨, 고단하시지 않으십니까? 내려오셔서 잠시 쉬십시오.”

괜찮다고 말하려던 로제타는 입술을 다시 합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 편하게 앉아서 왔지만, 바깥에서 마차를 모는 이들의 피로도는 저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에서였다.

마차에서 내리니 이미 시종들이 큰 아름드리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땀을 닦고 있었다.

“아! 아가씨. 여기에 자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이쪽으로 와 앉으십시오!”

자신들은 철퍼덕 아무렇게나 앉아 있으면서 로제타가 앉을 만한 곳엔 자리를 깔아 준비해 두었다.

“감사해요.”

그게 무척이나 고마워, 로제타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막 자리 위에 앉았을 때였다.

별안간 하늘에서 쿠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의 시선이 위로 들렸다.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톡.

로제타의 왼쪽 뺨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이런. 비가 오려는 모양입니다.”

시종 중 하나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나오시자마자 죄송하지만, 다시 마차에 오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관이 있는 마을을 지나쳐 버려서, 그냥 바로 출발해 에스테스 파크에 도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밖에서 고생하실 텐데요…….”

“저희야 일인 것을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하나 괜찮습니다.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전에 어서 오르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들은 곧바로 마차로 다가가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홀로 남은 로제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실프.”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핑-! 소리가 들리며 실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제타!

웃음기가 잔뜩 어린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실프가 로제타를 불렀다.

로제타는 제 눈앞에서 정신없이 뽀르르 날아다니는 정령을 보며 물었다.

‘비가 올 것 같아. 혹시 먹구름을 멀리멀리 보내 줄 수 있을까?’

-구름을, 멀리멀리? 으으음.

실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하는 듯, 미간을 모으고 얼굴을 찌푸리는 실프의 반응에,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좀 힘들겠지?’

사실, 로제타도 될 거라고 생각해서 실프를 소환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혹시나 해서 불러 본 것일 뿐.

이때까지 실프가 들어주었던 일들은 매우 자잘했다.

물건을 떨어트리거나, 평소보다 조금 센 바람을 불러내는 것.

반대로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자연 현상에 관련한 일에 대해선 힘을 쓸 수 없었다.

바람의 정령 중에서도 최상급인 ‘실레스틴’과 신수 ‘피르’는 자연 현상에 관여할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가장 말단인 실프는 아무래도 힘이 부족하여 무리인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실프가 계속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실프. 힘들면 안 해도 돼.’

에스테스의 마부와 시종들이 고생스럽게 비바람을 맞을 거란 생각에 안타까워 밑져야 본전으로 질문한 것일 뿐이다.

로제타는 더 이상 제 친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괜한 것을 부탁해서 미안하다고, 그만 돌아가도 괜찮다고 막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다.

실프가 대뜸 질문을 건넸다.

-있잖아, 로제타. 혹시 지금 기분 좋아?

뜬금없이 그런 건 왜 묻는 걸까.

이제껏 실프에게 부탁을 할 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로제타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좋은 편에 속하는 것 같기도 해.’

그러자 얼굴이 밝아지며 실프가 힘찬 목소리를 내었다.

-으음. 좋아! 그러면 해 볼게!

‘할 수 있어?’

-몰라! 해 봐야 해!

실프가 야무지게 입술을 앙, 다물고는 날갯짓해 뽀르르 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로제타, 계속 기분 좋아야 해!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실프가 건넨 말의 뜻을 헤아려 보려고 했지만 영 짚이는 데가 없었다.

로제타는 걷던 중인 것도 잊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실프가 솟아오른 하늘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시종이 다가와 한 번 더 정중하게 권했다.

“아가씨.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아, 네. 그래요.”

가까스로 시선을 뗀 로제타가 무거운 마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혹시라도 실프가 무리하게 힘을 써 어디라도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고 문이 닫혔다.

곧바로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휘이이잉- 바깥에서부터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마차 창문과 출입문이 위협적으로 덜커덩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프가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일까?’

그저 짐작할 뿐,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로제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책에서 읽기로 정령과 계약자 사이에 긴밀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영혼 어딘가가 이어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실프가 로제타의 속마음을 읽는 데 반해, 그녀는 실프와 관련된 그 무엇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정령을 다루기에 내 힘이 미약해서 그런 것일까?’

로제타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제 손을 쭉 폈다가 다시 주먹 쥐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덜컹거리던 마차 문이 조용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창문에 쳐 놓은 커튼 너머로 밝은 빛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천장에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구나.’

로제타는 실프가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마부석 쪽으로 난 창을 두드렸다.

곧 바깥에서 창문이 열리고 시종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비가 많이 오나요?”

로제타의 질문에 시종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갑자기 불어온 돌풍에 먹구름이 저만치 물러갔습니다.”

“……정말인가요?”

“정말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천만다행인 일이기도 하고요.”

“네, 그러네요.”

로제타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 순간 열린 마차 창을 통해서 비틀비틀, 무엇인가가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실프였다.

-로제타……. 나 너무 힘들어.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지친 기색이었다.

로제타는 시종과의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다시 마차 창을 닫았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자, 그녀의 허벅지 위로 실프가 뽀르르 날아와 쉬었다.

“괜찮아?”

-힘들어어…….

실프가 날아온 길을 따라 허공에 반짝이는 가루가 남았다.

하지만 그 양이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기진맥진한 실프의 얼굴을 본 로제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실프. 고생했지? 그래도 먹구름을 몰아내 줘서 모두가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게 되었어. 다 네 덕분이야.”

로제타의 감사 인사에 실프가 힘든 기색을 보이면서도 헤헤, 웃었다.

“그런데 실프. 원래 이런 힘도 쓸 줄 알았어?”

실프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로제타가 기분이 좋으니까, 나도 힘이 막 나는 것 같아!

그 대답에 로제타는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이내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실프는 내 기분에 감응하니까, 내 감정 상태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조절되는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클리프 남작가에서 실프가 고작 바람으로 머리 꼬기 같은 장난을 칠 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곳에서 나는 단 하루도 기쁨을 느껴 본 적이 없으니, 실프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법도 해.’

생각할수록 나름 타당한 가설인 것 같았다.

뒤이어 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니면 지금 내가 에스테스 파크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윌셔스 왕국에서 바람의 힘은 에스테스 공작 가문만의 것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스테스의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

그 증거로 현 공작인 테런 아셔 에스테스에겐 바람의 신수인 ‘피르’가 언제나 함께한다고 한다.

같은 바람 계열의 힘이니, 로제타가 에스테스 공작령, 그중에서도 공작가의 저택이 있는 에스테스 파크에 가까워질수록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이나마 강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에스테스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인데 어쩌다 나도 쓸 수 있게 되었을까.’

로제타는 지난 15년간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클리프 남작가에 오기 전의 기억이 도려낸 듯이 사라져 없어진 터라 어째서 자신이 실프와 계약을 하게 된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 * *

이후, 에스테스 파크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비도 오지 않겠다, 로제타를 태운 마차는 누가 날 막을쏘냐, 거칠 것 없이 잘 닦인 길을 빠르게 달렸다.

로제타는 다시 커튼을 걷었다.

마차 창문 너머 도로 옆에 심긴, 키가 매우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저 바깥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속이 탁 트이다니.’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진짜 좋다.”

그사이, 실프는 금세 체력을 회복했다.

-까르르. 로제타, 기분이 좋아 보여.

“응, 좋아. 행복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로제타의 대답에 실프가 자신 역시 행복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주위를 뽀르르 날아다녔다.

-로제타가 좋으니 실프도 기분이 좋아!

실프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반짝이는 가루가 꽃비처럼 흩날렸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로제타가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물었다.

“그런데 실프. 이번 일에 대한 대가는 무엇을 줄까?”

평소와 달리 힘을 조금 더 많이 썼을 것 같다는 생각에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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