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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0화 (10/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화

그때 클라리사가 마치 새가 지저귀듯 재잘거렸다.

“일전에 마을 신전에서 스치듯 뵈었는데 너무 아름다운 분이라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에게 빨간 머리 여자분에 대해서 여쭤 봤는데, 마을 사람들 모두가 레이디 클리프에 대해서 알더라구요!”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콜린과 줄리아에게 부탁해서 클리프 남작가로 초대장을 보냈답니다. 평소 영애께서 두문불출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안 오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어요.”

아이는 흥분한 듯, 조금도 쉬지 않고 다다다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초대에 응하시겠다는 답장을 보내 주셔서…… 정말 매일매일 손꼽아 영애께서 오시는 날만 기다렸어요! 전 정말 지금 너무 기뻐요!”

들뜬 클라리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흩어진다.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클라리사의 얼굴이 너무나도 앳됐다.

‘난 클라리사가 내 또래인 줄로만 알았는데…….’

홍장미로 살 적, 소설을 읽을 땐 등장인물들의 나이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충 성인식을 치를 나이는 지났겠지, 생각하고 말았었다.

하지만 클라리사가 이렇게 어릴 줄이야.

‘이렇게 작고, 예쁘고, 티 없이 맑은 어린아이를 학대했다니! 원작의 나는 진짜 얼마나 못됐던 거야!’

로제타는 다시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은 몸. 은을 녹여 만든 듯한 복슬복슬한 은빛 머리카락과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오동통한 두 뺨.

첫눈에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릴 정도로 사랑스러운 소녀가 흥분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새삼 미안한 마음에 로제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번에는 꼭……. 꼭 잘해 줘야지.’

원작의 강제성이고 뭐고 다 무시해 버릴 거다.

로제타는 여전히 자신을 선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클라리사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 워낙 짧게 대답했다 보니, 클라리사는 로제타가 뭐라 한마디라도 더 해 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잠시만요.”

로제타는 클라리사에게 잡힌 두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클라리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초면에 격의 없이 대한 자신의 행동에 로제타가 불쾌해해서 손을 뺀 것이라고 생각한 듯 보였다.

클라리사가 어정쩡하게 허공에 남은 양손 끝을 뻘쭘하게 오므렸다.

“앗, 제가 너무…… 무례하였지요.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그만…….”

로제타는 조금 풀이 죽은 낯빛으로 중얼거리는 클라리사의 양손을 이번에 제 쪽에서 먼저 잡았다.

그러자 그런 행동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바닥을 향했던 클라리사의 눈이 대뜸 위로 들렸다.

그녀와 눈길을 맞춘 로제타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공녀님. 저도 공녀님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정말, 반가워요.”

로제타의 그 말에, 먹구름이 걷히듯 순식간에 클라리사의 얼굴이 한층 더 환해졌다.

“저도요! 저도 반가워요, 클리프 영애!”

로제타와 클라리사, 두 소녀가 서로의 손을 강하게 맞잡으며 웃었다.

* * *

테런은 카밀라와의 티 파티, 아니 정확히는 ‘카밀라의 결혼 재촉 잔소리와 가주의 의무에 대한 일장 연설’을 다 들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죽겠군.”

절로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썬룸을 나오니 어느새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본채의 제 집무실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종이 냄새가 코끝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집무실 안에 놓인 세 개의 책상 위에는 서류가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얼핏,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테런은 당연히 누가 있다는 양 큰 목소리로 질문했다.

“긱스, 아직도 퇴근 못 했나?”

“해도 되는 거였습니까?”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책상 위 서류 산 어딘가에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테런은 집무실 문을 닫고 긱스가 사용하는 책상 뒤로 걸어가며 웃었다.

“산송장 같군 그래.”

“불쌍하면 집에 좀 보내 주십시오.”

“불쌍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리고 뭐가 불쌍해? 열심히 일하라고 자네에게 그렇게 많은 월급을 주고 있는데.”

긱스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각하. 정말이지 악독하십니다.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이렇게 사람을 골로 갈 정도로 부리는 줄 알았으면 전 채용 공고에 지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테런은 긱스가 제게 퍼붓는 원망을 흘려들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긱스. 떠들 시간에 일이나 더 해. 그편이 집에 갈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으니 말이야.”

“일할 때 하더라도 말은 좀 하고 하겠습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 결혼한 지 아직 일 년밖에 안 됐습니다! 집에서 레나가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레나도 자네가 밖에서 돈 벌어 오는 걸 더 좋아할 거야.”

“아닙니다!”

“맞아. 내가 레나로부터 직접 들었거든.”

긱스가 허탈하게 ‘말도 안 돼…….’ 하고 중얼거리며, 제 자리로 향하는 테런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에스테스가 이렇게 악랄한 곳인 줄 미처 몰랐다’고 투덜거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대부인을 만나고 오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늘 꼭 만나야 한다고 각하를 닦달하신 거랍니까?”

그 순간 테런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결혼하라고 하시더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긱스가 흐음, 소리를 내며 이내 입을 열었다.

“대부인께서도 많이 참으셨군요.”

테런의 표정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긱스. 자네는 내 보좌관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 편을 들어줘야지.”

그 순간 긱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테런을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엔 ‘나이가 몇 살인데 편을 나누나.’ 하는 힐난이 담겨 있었다.

“퇴근시켜 주시면 편들어 드리겠습니다.”

“됐네. 그냥 계속 할머님 편이나 들어.”

곧 죽어도 퇴근은 안 된다는 말에 긱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그러기를 잠시, 긱스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각하. 하시긴 하셔야 합니다. 명문 에스테스의 가주이시지 않습니까? 대를 이으셔야 할 책임이 막중합니다.”

“나의 의무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바빠. 그런 시기라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짜증이 조금 어려 있었다.

일이 바쁜 건 사실이었다. 국왕이 새로운 국책 사업인 도로포장 공사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혼 적령기인 테런이 더는 혼인을 미룰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긱스는 이 모든 일이 랭우드 후작가가 건재하기만 했더라도 이 정도로 복잡해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아마 랭우드에서 이번 국책 사업을 주관했다면 하루 만에 뚝딱 도로포장이 완성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랭우드는 이미 손이 끊겼고 도로 정비 사업은 에스테스에서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15년 전 그 사고만 없었더라도 4가문의 균형이 깨질 일도 없었을 텐데.’

긱스는 침음을 삼켰다.

윌셔스 왕국은 4가문의 이능이 중심이 되었다.

첫 번째는 현 왕가의 주인인 윌셔스로 물의 힘을 다스렸다.

두 번째는 땅의 힘을 가진 랭우드 후작가인데, 마지막 자손이 자취를 감춘 후 더 이상 직계 후손이 남아 있지 않아 지금은 그저 이름만 남은 유령 가문이 되었다.

세 번째는 불의 힘을 다스리는 리스턴 후작가였고, 마지막이 바로 테런이 속한 바람의 힘을 다스릴 수 있는 에스테스였다.

‘우리 각하의 결혼 문제도, 원래대 로제 랭우드가 건재했더라면 아무 잡음도 없었을 것인데.’

힐끗 제 주인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피던 긱스가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 각하.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그 순간 테런이 어이없다는 듯 잠시 멍해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나야말로 왜 자네가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의문이군.”

“각하께선 선대 공작님이신 제임스 님과 많이 닮으셨으니까요.”

“아버지와 내가?”

“부정하시겠지만, 많이 닮으셨습니다.”

테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테런의 아버지이자 선대 에스테스 공작인 제임스는 재작년, 아내인 네시아가 숨진 뒤 큰 상실감을 느껴 왔다.

선대 공작 부부는 귀족가에 몇 되지 않는 연애결혼을 한 사이로서 서로에게 매우 각별했다.

하여 선대 공작은 아내인 네시아가 원인 모를 병에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후부터 거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간호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왔다.

그나마 일찍부터 후계자 수업을 들어 온 테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제임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시아는 허망하게 세상을 떴다.

그 일은 제임스뿐만이 아니라 아직 어린 테런의 여동생, 클라리사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원래도 허약한 몸이었던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몸을 가누지 못했고, 더욱 약해졌다.

그 탓에 수도를 떠나 영지로 요양을 간 것이다.

제임스 역시 아내가 숨을 거둔 곳에 머물기 싫다며, 테런에게 곧바로 작위를 물려주고 도망치듯 수도를 떠났다.

카밀라 대부인은 그런 제 아들을 보며 유약한 성정이라며 혀를 찼고, 새 에스테스 공작이 된 손자 테런이 가문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일으켜 주길 바랐다.

테런이 하루라도 빨리 번듯한 집안의 여식과 혼인하길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에스테스가에 안주인을 들여 그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길 원했다.

몇 번이나 손자에게 결혼을 권했지만, 내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테런의 안에 더 이상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긱스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밝혔다.

“각하. 그렇게 피하지만 마시고 한 번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야지. 다만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게 문제고.”

테런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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