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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1화 (11/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화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던 그때, 밖에서 노크가 들려왔다.

에스테스 공작가의 총집사장인 와튼이었다.

“각하.”

“무슨 일이지?”

“오늘 살펴보셔야 할 편지를 추려서 가져왔습니다.”

와튼이 들고 있는 은쟁반에 각각 색이 다른 두 개의 편지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테런이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해 보이자,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그에게 허리를 굽히고는 쟁반을 내밀었다.

“각각 어디서 온 것들이지?”

“왼쪽은 노마님께서, 그리고 오른쪽은 클라리사 아가씨께서 보내오신 겁니다.”

테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할머님? 방금 뵙고 왔는데 또 대체 무엇을 보내신 거지?”

“당신께서 직접 추리신 각하의 약혼녀 후보들이라고 하십니다.”

집사의 설명에 테런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걸렸다.

“철두철미하기도 하시지.”

보통의 귀족 자제들이 그러하듯 테런도 어린 시절 약혼을 하긴 했었다.

그 상대가 바로 랭우드 후작가의 마지막 자손이었던 로제 안나 랭우드 영애다.

‘로제.’

테런은 책상에 올려 두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너무나 커 버린 제 손안에, 로제의 작은 손이 잡혀 있는 것 같다.

「오라바니. 로제랑 뽀뽀하자.」

기억 속의 혀 짧은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손끝에서부터 피가 빠져나가며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기분이라, 테런은 가만히 오른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이젠 허상과도 다름이 없는 그 작은 손이, 여전히 제게 쥐어져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젠 그 아이, 다 잊은 것만 같았는데. 그저 묻어 두었을 뿐이었던 건가.’

순식간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로제는 15년 전 랭우드 후작가에 닥친 불의의 사고 때문에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테런의 맹렬한 반대로 그의 약혼녀 자리는 쭉 ‘공석’이었다.

테런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평정을 되찾기 위해 가만히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결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한 테런의 변화를 눈치챈 모양인지, 와튼과 긱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테런은 몇 번 더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내 다시 눈을 떴다.

그 짧은 새 부쩍 피로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할머님께서 보내신 것은 와튼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그가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말하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테런은 곧장 와튼이 들고 있는 은쟁반에 손을 뻗고는 오른쪽 편지를 집어 들었다.

레터 나이프로 봉투 상단을 가르자 그 안에서 향긋한 향이 풀풀 풍겨 나왔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테런 오라버니께.]

딱딱하게 굳었던 테런의 얼굴이 일순 밝은 빛으로 풀어졌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도 살짝 맺혔다.

테런은 자신과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여동생과 우애와 정이 깊었다.

[오라버니, 수도에서의 생활은 어떠신가요? 여전히 끼니도 거르고 일에만 몰두하고 계신가요?]

테런은 있는 대로 미간을 좁히고 있던 때와는 전혀 다른, 한결 풀어진 나른한 눈매로 익숙한 제 여동생의 글씨를 훑었다.

[저는 이곳에서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로제타 언니가.]

거기까지 읽은 테런은 그만 피식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쓰다가 제 잘못을 눈치챈 모양인지, 로제타 언니라고 쓴 부분의 한가운데 찍 취소 선이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라면 숙녀의 실수를 눈감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통통한 볼을 잔뜩 부풀리고,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태연자약한 척하며 그 문장을 썼을 동생의 얼굴이 생각나 테런은 좀처럼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한편 편지를 보는 순간, 테런에게 어려 있던 심각한 분위기가 걷히자, 긱스와 집사가 남몰래 눈짓을 교환하고는 한시름을 덜었다.

적어도 테런이 편지를 읽는 동안 만큼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집사는 뒤꿈치를 들고 집무실을 나갔고, 긱스는 잠시 멈췄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테런은 의자 등받이에 느른히 기대며 편지지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레이디 로제타 클리프께서 저를 무척이나 성심껏 챙겨 주고 계시거든요.]

“또 로제타 양에 관한 이야기로군.”

테런은 거기까지 읽은 뒤, 제 누이가 이번에는 몇 장의 편지를 써서 보냈는지 들춰 보았다.

“다섯 장이라.”

음. 그가 잠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어째 갈수록 편지의 장수가 더 늘어나는 기분인데.”

근심 어린 말과는 달리, 마음은 안도가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한 여동생이 더욱 건강을 해치게 될까 봐 내심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영지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어 예전의 명랑함을 되찾은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다음에 도착할 편지는 열 장이 되겠어.”

그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직 편지의 첫 장에서 다섯 줄 정도만 읽었을 뿐이나, 뒤에 이어질 말들이 뻔히 예상이 갔다.

보나 마나 레이디 로제타 클리프에 대한 찬양과 자랑을 쭉 늘어놓다가 맨 마지막 장 한 줄에 가서야 겨우, 저에 대한 안부를 물으며 편지를 줄일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충 빨리 눈으로 훑어보아도 한 페이지당 ‘로제타 언니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열 개가 넘었다.

[로제타 언니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분이랍니다. 언젠간 오라버니께도 소개해 드릴 날이 오면 좋겠어요. 아! 이만 편지를 줄일게요. 오늘은 언니가 나룻배를 태워 주기로 했거든요. 그럼 오라버니. 또 소식 전할 때까지 안녕히.

-사랑을 듬뿍 담아, 클라리사 마리안느 에스테스.]

빠르게 내용을 읽은 테런은 다시 편지지를 원래 결에 맞춰 반듯이 접고는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언제나처럼 여동생이 보낸 편지를 모아 둔 네 번째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집어넣었다.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가 펜을 들고는 빈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펜촉은 종이 위를 거칠게 긁어 대며 유려한 선을 그리며 잉크로 글자를 만들어 냈다.

로제타 클리프.

테런은 그 이름에 밑줄을 한번 쭉 긋고 난 뒤에야 펜을 놓았다.

팔짱을 낀 그가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종이 위의 그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이쯤 되면 어떤 영애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군.”

잠시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테런은 미친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긱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보게, 긱스.”

침통했던 아까의 모습과 달리,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놓였던 긱스는 그만 습관적으로 툴툴거렸다.

“오늘도 퇴근은 물 건너간 지 오래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힘이 쭉 빠졌습니다. 부르심에 대답할 기운이 없으니, 그냥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러자 테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구구절절 대답하는 것보다 그냥 네, 라고 하는 편이 힘이 좀 덜 들지 않겠나?”

“저의 피로함과 억울함, 원망을 좀 알아 달라는 말씀입니다.”

“그거야 언제나 내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

그 순간 서류만 노려보고 있던 긱스의 고개가 팍 들렸다.

그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테런을 바라보며 기대 어린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러면 저 오늘 집에……!”

“……는 못 보내 주겠네. 일이 좀 많은가.”

한껏 치솟아 올라갔던 긱스의 어깨가 추를 매달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간에 푹 아래로 꺼졌다.

입을 삐죽거리며 홀로 구시렁거리는 제 보좌관을 향해 테런이 다시 입을 뗐다.

“긱스. 황실 아카데미 수석이자, 궁 내부 차장으로 일한 경력을 가진, 유능한 인재인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어. 지금부터 내가 할 질문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 이 공작가엔 자네밖에 물을 이가 없네.”

띄워 주니까 또 그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긱스가 처진 어깨를 쭉 펴고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뭐든 묻기만 하십시오, 각하. 성심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테런은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삼키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좋아. 그런 자세 아주 마음에 들어. 자, 그럼 질문하지, 긱스. 자네가 보기엔 나 테런 아셔 에스테스에게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 것 같은가?”

정말 이런 게 질문인 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긱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현숙하고 아름다운 부인이겠지요?”

“아니야. 틀렸어. 그런 대답을 하다니, 자네에게 적잖이 실망했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대답에 테런이 단박에 고개를 내젓는 순간 긱스는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테런이 무어라 입을 더 떼려고 하는 순간, 긱스가 기겁하며 먼저 그의 말을 막았다.

“안 궁금합니다!”

테런이 입을 떼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긱스는 간절한 표정으로 제발 ‘입 좀 다 물어 주시라’는 사인을 눈빛으로 마구 쏴 댔다.

하지만 테런은 그러한 제 보좌관의 노력에 털 한 올 만한 관심도 내보이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었다.

“긱스.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말일세.”

“각하, 제발.”

긱스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애절한 목소리가 있을 까 싶었지만, 테런은 단호했다.

“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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