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화
짧지만 비장한 그의 대답을 듣던 그 순간, 긱스의 얼굴이 괴상망측하게 일그러졌다.
긱스는 이제 절박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각하. 그건 저도 필요합니다.”
“꼬우면 그대가 나보다 출세하면 될 일이지.”
테런은 금방이라도 떠날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내려놓았던 재킷을 다시 챙겨 들었다.
그런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긱스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백날, 천날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해도 각하보다 상관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노력이 혈통을 어떻게 이겨 냅니까!”
“그걸 이겨 내야, 역사에 ‘긱스 라스크’라는 자네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거야.”
“이름 따위 안 남기고 싶습니다! 전 그냥 정시 퇴근 할 수 있는 평범한 소시민이 되는 게 꿈인 소박한 남자란 말입니다!”
“쯧. 사내라면 모쪼록 포부가 있어야지.”
테런은 진심으로 대답한 것이었지만, 이 시국에 긱스에겐 약 올리는 것과 다름없는 얄미운 말이었다.
결국 긱스가 볼멘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테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럼 긱스, 일 잘하고 있게.”
그 순간 긱스가 이를 악물더니 테런을 등지고 섰다.
“안 됩니다. 못 가십니다.”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일하는 동안 는 것이라곤 오로지 눈치뿐이었다.
그렇기에 긱스는 테런을 저지하고자 뽀르르 집무실 문 쪽으로 달려가 양 팔을 훤히 벌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그를 막아섰다.
“나가실 수 없습니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로요!”
주인인 테런을 노려보는 긱스의 눈매가 상당히 부리부리했다.
주인에게 항명하는 것보다 저 홀로 남아 이 집무실에서 과로사로 썩어 가는 게 더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런은 그런 그를 조금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팔에 걸친 재킷을 다시 내려놓지는 않았다.
“이보게, 긱스.”
테런이 한숨을 쉬며 부르자, 긱스가 맹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라고 절 꼬드기셔도 절! 대!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각하께서는 여기서 못 나가십니다!”
“자네는 머리는 좋은데, 조금 고정 관념에 틀어박힌 게 문제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람?
그런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긱스가 어이없어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테런이 입꼬리를 쓱 올렸다.
긱스는 불안함이 배가 되는 것을 느꼈다.
“각하. 잠시만…….”
“내가 문으로만 나다닐 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어야지.”
긱스가 멍해 있는 사이, 테런은 집무실 문 쪽이 아닌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뒤 창문을 활짝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창틀을 부여잡은 테런이 마지막으로 긱스를 한번 돌아보고는 씩 웃었다.
“그러니 자네는 평생 날 못 말리는 거야.”
그 한마디를 남기고선 훌쩍 창을 뛰어넘었다.
참고로 집무실은 공작저의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잠깐만요, 각하! 여기서 뛰어내리시면 어떡합니까!”
아차 싶었던 긱스가 뒤늦게 테런이 뛰어내린 창문 쪽으로 달려왔다.
아랫배를 창틀에 걸치고 상체를 숙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허탈해지고 말았다.
얄미울 정도로 가뿐히 뛰어내린 테런이 손을 탈탈 털며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테런은 여유 있는 동작으로 집무실 쪽을 올려다보며 긱스를 향해 팔랑팔랑 손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럼 다녀오겠네.”
그런 뒤 일말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리곤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각하아아아아아!”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긱스가 목 놓아 울었다.
* * *
에스테스 파크.
로제타는 볕이 잘 드는 제 방 창가에서 느른한 고양이처럼 있다가 팔을 쭉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으음, 뭔가 심심한데.”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나 제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클라리사가 오늘은 아직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머무르게 된 지도 어느덧 6개월째.
예상했던 대로 로제타는 클라리사의 간병인이 되었고, 에스테스 파크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런데 후보자가 오로지 나 혼자였던 것은 좀 의외였어.’
나중에 사정을 알고 봤더니 모든 것은 클라리사의 희망 사항이었다고 했다.
클라리사가 로제타를 처음 본 것은 신전의 사제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였다.
그녀는 그날 느꼈던 제 감정을 신이 난 목소리로 재잘재잘 들려주었다.
“전 그때 클리프 영애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생애 첫 고백을 동성에게 받을 줄이야.
클라리사의 폭탄 같은 고백에, 로제타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미소에 클라리사가 또 한 번 반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꺅!’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저 한번 웃어 줬을 뿐인데도 클라리사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감추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차 시중을 들기 위해 옆에 서 있던 에스테스의 하녀들도 저마다 풋, 풉, 웃음을 터트렸다.
로제타는 민망해서 혼쭐이 났다.
비록 사용인들의 주인이긴 하나, 아직은 여덟 살.
여염집의 막냇동생 같은 면이 있는 클라리사를 모두가 사랑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듯했다.
로제타는 귀엽다는 듯 달콤한 눈빛으로 클라리사를 향해 쿠키를 하나 내어 주며 물었다.
“왜 제게 반하셨어요?”
“언니한테……! 아, 죄송해요. 실례했습니다.”
무심코 로제타를 언니라고 부른 클라리사가 입술을 합, 다물고 안으로 말아 넣으며 눈치를 봤다.
“격의 없이 대해서 죄송해요, 클리프 영애.”
귀여운 얼굴로 예의를 꼬박꼬박 차릴 때마다 그 갭 차이가 또 너무도 귀여웠다.
로제타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클라리사는 제 손가락을 서로 얽으며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여성분을 보면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기 바쁘게, 클라리사가 다시 힐끗 로제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잠시 후,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클리프 영애. 혹, 제가 영애를 언니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목소리에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에서도. 척 보기에도 뭐,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더랬다.
당황은 오롯이 로제타만의 몫이었다.
“언니…… 요?”
“네! 실제로 저보다 연상이기도 하시고요.”
클라리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뭐, 물론 그녀의 말대로긴 했다. 클라리사는 아직 여덟 살로, 로제타보다 열세 살이나 어렸으니까.
일반적인 관점에선 언니, 동생으로 말을 놓고 친하게 지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클라리사는 공녀고, 로제타는 남작가의 사생아 출신.
‘괜히 입방아에 오를 수 있으니까…….’
하여 로제타는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공녀님.”
“힝. 안 돼요?”
클라리사의 눈매가 풀 죽은 강아지처럼 아래로 처졌다.
곧 죽어도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꼭 제가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아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하녀장 줄리아의 눈치를 슬쩍 봤는데, 하필이면 딱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지만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때, 줄리아가 한마디 보탰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제대로 호칭하신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암묵적인 동의였다.
그러자 클라리사가 반색했다.
“줄리아도 그렇다고 하는데…… 정말 안 될까요?”
두 손을 턱 아래 모아 쥔 클라리사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기대가 서린 푸른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로제타는 순간 저 어린 얼굴에 깃든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클라리사와 유대감을 쌓는 것도 중요하니까.’
로제타의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하녀장의 말대로 사적인 자리에서만 사용한다면 크게 문제 되지도 않으리라.
“음…… 그럼 사적인 자리에서만…….”
“각! 좋아요! 꼭 명심할게요!”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클라리사를 보자, 로제타는 그만 또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제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어요?”
“네! 정말로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언니.”
“공녀님도 어여쁘세요.”
“하지만 전 조금 더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싶은걸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라리사의 얼굴은 아직 어렸다.
하지만 전체적인 이미지가 순해, 성장한다면 분명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낼 미인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클라리사의 취향은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로제타처럼 화려하게 생긴 미인형인 듯싶었다.
그래서 로제타에게 강한 선망을 느끼고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고 말한 것 같았다.
“앞으로 잘 지내 봐요, 공녀님.”
“네, 언니! 제가 진짜진짜 잘할게요!”
씩씩한 클라리사의 대답에 로제타는 결국 그냥 무장 해제 당하고 말았다.
얼굴 가득 웃음이 번져 나가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환했다.
* * *
로제타는 혹시라도 자신이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마음의 벽을 쌓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천성이 밝은 클라리사를 대할수록 그 담이 허물어지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클라리사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이 말을 놓았다.
클라리사의 청도 있었지만, 로제타 역시 그녀를 친동생처럼 여길 수 있게 된 까닭에서였다.
‘그렇게 날 따르는데 어떻게 안 예뻐하겠어.’
클라리사는 로제타를 만나기만 하면 눈을 반짝이며 병아리처럼 ‘언니, 너무 예뻐요!’라고 소리부터 쳤다. 매일 매일 그랬다.
두 사람은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어딜 가든 함께 꼭 붙어 다녔다.
에스테스의 시종들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역시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며 웃었다.
클리프 남작가의 사람들과 달리, 아무런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하는 사용인들의 태도에 로제타는 점점 마음을 열고 그들과 어울려 지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내 쪽에서 먼저 클라리사를 찾아가 볼까?”
빠르게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생각해 보던 그때.
방 밖에서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