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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4화 (14/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화

로제타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폐라니요, 남작 부인. 저는 그곳에 정당하게 고용되어 머물고 있답니다.”

“뭐? 고용? 지금 그게 무슨 소리니?”

“네. 에스테스 공녀의 말동무이자 간병인으로 고용이 되었어요.”

“그럼 맞선은 어찌하고!”

역시 그게 목적이었구나.

로제타가 싸늘한 눈으로 남작 부인과 이시크를 바라보았다.

“그분들께 사정사정해서 맞선 날짜를 뒤로 미뤘는데 네가 계속 에스테스 파크에 머물면 어쩌란 말이더냐!”

로제타를 팔아 치우려던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자 남작 부인이 발까지 쿵 굴리며 역정을 내었다.

짜증이 가득 묻어 있는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정말 듣기 싫어, 로제타의 고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사이, 남작 부인은 숨도 쉬지 않고 시뻘게진 얼굴로 다다다다 잔소리를 연이어 퍼부었다.

“내,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귀한 분들을 추렸으니 꼭 만나 뵈어야 한다고! 한데 일자리를 구했다니! 감히 누구 허락을 맡고 네 마음대로 그런 걸 정한단 말이더냐!”

“어머.”

로제타가 오른손을 들어 제 입술 위를 가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까지 일부러 동그랗게 뜨며 능청을 떨었다.

“남작 부인, 전 성인식을 이미 치렀답니다. 그러니 제 일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아요.”

“로제타!”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맞선을 보라 재촉하시기에 제 나이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하긴요. 언제 제게 관심이 있으셨다고요.”

“그 입 좀 다물지 못하겠니?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유일한 면이 고분고분하다는 점이었는데, 왜 이리 성격이 바뀐 게야!”

“성격이 바뀐 게 아니랍니다, 부인. 그저 그동안은 참았을 뿐이죠.”

로제타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뭐, 아무리 중요한 맞선이라 할지라도 제가 지금 에스테스 공녀님을 모시고 있는데 어찌 자리를 비우겠어요?”

남작 부인은 대화와 관계의 주도권이 완전히 로제타에게 넘어갔음을 이미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사납게 닦달했다.

“그럼 나는 어쩌란 말이냐! 네 오라비의 출세는!”

‘나이도 지긋하신 양반이 무슨 떼를 저렇게 쓴담.’

로제타가 질린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그러시면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방법? 그게 뭐지?”

남작 부인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로제타가 싱긋 웃었다.

“귀한 분들께 실례를 저지를 순 없는 노릇. 그러니 남작 부인께서 직접 나가 보심이 어떨까요?”

로제타의 말에 이시크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고, 남작 부인의 얼굴은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로제타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도박과 외도를 일삼는 남작 나리와 이혼하시고 재가를 하시어요, 남작 부인. 부인께서 ‘직접’ 고르셨다던 그분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가문에 돈은 많잖아요. 안 그런가요?”

말을 마친 로제타가 싱긋, 두 눈을 휘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표정과 달리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 한기만이 가득했다.

남작 부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 망할 것이 오냐오냐해 주었더니!”

더는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남작 부인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등장했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그 목소리를 로제타보다 먼저 알아들은 것은 희한하게도 남작 부인이었다.

마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당장이라도 로제타의 뺨을 올려붙일 기세던 남작 부인의 행동은 클라리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멈췄다.

그녀는 치켜든 손을 내리지 못한 채, 손끝만 움찔거렸다.

“누구시죠? 지금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뒤에서 보기에도 동작이 심히 수상쩍었던 모양인지, 클라리사의 음성에 날이 선 경계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남작 부인은 이를 한번 세게 악물었다.

짧게 숨을 들이켠 그녀는 로제타를 매섭게 노려보며 뺨을 때리려고 치켜 들었던 손을 어정쩡하게 내렸다.

그런 뒤 제 손으로 로제타의 머리카락 일부를 가만히 만지작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 어머……. 로제타, 머리에 먼지가 묻었구나…….”

가성을 사용하는 듯 높아진 남작 부인의 목소리는 아무렇게나 들어도 연기하는 티가 역력했다.

노력이 가상한 남작 부인의 모습에, 로제타는 그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남작 부인의 눈빛에 더욱 독기가 올랐다.

하지만 잘 보여야만 하는 클라리사가 곁에 있으니, 원래 제 성질대로 로제타에게 포악하게 굴 수는 없었다.

로제타 역시 남작 부인의 약점이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붉은 입술을 더욱 위로 끌어 올렸다.

눈앞의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은 덤이었다.

그런 뒤, 몸을 살짝 틀어 클라리사를 불렀다.

“클라리사.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화라서 얼른 마무리 짓고 왔어요. 언니를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요.”

두 여자의 대화에 남작 부인과 이시크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사생아인 데다 남작 영애인 로제타는 말을 낮추고, 명문 대귀족 영애인 클라리사는 로제타에게 말을 높이는 기묘한 현상.

그들의 상식으로는 썩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클라리사가 서둘러 대답하고는 로제타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 뒤 로제타의 팔짱을 단단히 끼며 그녀와 같은 쪽을 보고 섰다.

“그런데 언니. 그런 것보다도요.”

방금 전까지 수줍은 얼굴로 순하게 로제타에게 대답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워 버린 클라리사가 나름 뾰족한 눈길로 낯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누구시죠?”

남작 부인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아이에게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딸아이를 맡겨 놓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조안나 클리프 남작 부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클리프 남작의 장남 이시크 클리프입니다.”

이시크 역시, 로제타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깍듯한 태도로 클라리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클라리사가 앳된 얼굴로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로제타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에스테스 공녀’로서의 모습이었다.

“클리프 남작가의 분들이셨군요.”

남작 부인이 애써 미소 짓는 얼굴을 만들어 내며 운을 떼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공녀님.”

남작 부인의 살가운 태도에도 클라리사는 쌀쌀함을 잃지 않았다.

전혀 살갑지 않은 어린아이의 태도에 이시크와 남작 부인은 민망함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언니와는 무슨 대화를 하셨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남작 부인이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 그저…….”

도통 대답하지 못하고 시간만 끌자, 보다 못한 이시크가 옆에서 거들었다.

“오랜만에 만나 안부 인사를 나눴을 뿐입니다.”

“예! 맞습니다. 안부를 물었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보아서요.”

하지만 클라리사는 어리다고 해서 만만하게 속여 넘길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부 인사를 나눈 것치곤, 얼핏 기세가 사나우신 것 같던데요.”

여기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어림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는 자신이 로제타를 지켜 내야 한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남작 부인의 이마에 땀이 송골 맺혔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일이 퍽 벅찬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요. 호호호.”

남작 부인은 말을 거들라는 듯 로제타를 힐끔거렸다.

‘내가 왜? 누구 좋으라고.’

로제타는 그 시선의 뜻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입술을 꾹 다문 채 거들지 않았다.

결국 남작 부인은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로제타가 통 집에 오지 않아 걱정이 많았답니다. 공녀께서 호의를 보여 주신다고 해도 계속 머무르는 것은 폐가 되니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가볍게 야단을 쳤어요. 그런데 공녀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남작 부인의 말에 클라리사가 뚱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클리프 남작 부인께 야단을 맞아야 하는 것인가 보군요.”

“……예?”

남작 부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클라리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로제타 언니께 계속해서 에스테스 파크에 머물러 주십사 부탁한 것은 제 쪽이에요. 언니는 그런 제 응석을 받아 주는 것뿐이구요.”

남작 부인의 얼굴에 아주 잠깐 낭패감이 스쳤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클라리사가 로제타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로제타는 영영 남작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혼담 이야기는 모두 물 건너가게 된다.

하여 남작 부인은 조금 단호하게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공녀님……. 로제타가 오랜 시간 에스테스 파크에서 머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

클라리사가 남작 부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도중에 잘라 되물었다.

“왜 안 되나요?”

“……예?”

“에스테스 공녀인 제가 허락하는데, 안 될 이유가 없지요.”

클라리사가 말을 마치며 턱을 살짝 위로 치켜들었다.

남작 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클라리사의 말대로, 집주인이 허락하는데 자신들이 된다, 안 된다 말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네 사람 사이에 잠시 고였다. 그때.

“하하, 아무래도 공녀님께서 여자 형제가 없으시다 보니, 제 누이를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이시크가 딴에는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불쑥 중간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공녀님. 두 분이 계속 함께 하실 순 없습니다.”

그의 말투는 마치 클라리사를 가르치는 듯 거만했고, 그래서 이시크를 바라보는 클라리사의 눈빛은 자연히 송곳처럼 뾰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시크는 클라리사의 기분이 순식간에 상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머저리처럼 주절주절 호인인 척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공녀님께도 왕세자 전하라는 훌륭한 약혼자분이 계시고, 로제타도 나이가 제법 찼으니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녀님께서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로제타 같은 경우는 지금 여러 군데서 좋은 혼담이 들어와 부지런히 선을 보러 다녀야 합니다. 그래야 시집을 잘 가니까요.”

그 순간 클라리사의 미간이 파삭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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