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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5화 (15/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5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냉기가 흐르는 클라리사의 목소리에 이시크가 그제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 공녀님,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습니까?”

“로제타 언니가 무슨 물건이라도 되나요? 선을 보러 다녀야 한다니요!”

클라리사는 팔짱 끼고 있는 로제타의 팔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푸른 눈동자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시크는 당황했다.

“공녀님? 뭔가 오해가…….”

하지만 클라리사는 이시크의 말 따위 이제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었다.

그녀는 또박또박하게 발음하며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로제타 언니는 저랑 살 거예요! 평생!”

일순 정적이 흘렀다.

자신이 한 말에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클라리사가 볼멘소리로 한 번 더 확인 사살해 주듯 외쳤다.

“언니랑 평생 살 거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로제타의 눈에도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귀여운 앙탈처럼 보일 뿐.

그건 남작 부인과 이시크의 눈에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은 이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피식피식거렸다.

그런 무례한 행동에 클라리사의 눈빛이 더욱 뾰족해졌다.

“클리프 영식. 무엇이 그리 우스우시죠?”

“이것 참. 실례했습니다.”

웃음을 참으며 코까지 먹어 버린 이시크가 뻔뻔하게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제 여동생을 이리 예쁘게 봐 주시다니,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공녀님.”

“뭔가요?”

“그럼 혹시 방금 하신 그 말씀은, 저희 로제타를 바론 전하께 소개시켜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뭐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이시크의 물음에 클라리사의 얼굴이 파사삭 구겨졌다.

지금 여기서 그녀의 약혼자인 왕세자 바론의 이름이 왜 나오는가 싶었던 까닭이다.

이시크는 느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방금 공녀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 로제타와 평생 함께 살 것이라고요.”

“그래요.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공녀님께선 바론 왕세자 전하와 약혼하셨지 않습니까? 성년이 되면 혼인하실 텐데, 그때도 저희 로제타를 평생 데리고 사신단 말씀은, 제 여동생을 왕세자 전하의 정부로 붙여 주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이시크!”

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로제타가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미쳤어? 아이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내가 뭘? 그리고 이분이 어디 그냥 아이인가? 에스테스 공녀님쯤 되면 사정이 더 밝으실 텐데.”

“그래, 말 잘했네. 여기 이분, 에스테스 공녀님이야. 그런 분께 지금 네가 대단한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거라구!”

로제타는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다가 기어코 한마디 더 붙여 빈정거렸다.

“대체 머릿속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어야 생각이 그렇게 튀는 거야?”

정말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클라리사. 더 들을 필요 없단다. 에스테스 파크로 그만 돌아가자꾸나.”

“잠시만요, 언니.”

클라리사가 로제타의 팔짱을 풀더니 양손으로 턱, 제 허리를 짚으며 맹렬하게 이시크를 노려보았다.

“영식. 저도 로제타 언니가 하신 말씀과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도대체 어떻게 생각의 가지가 그쪽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시크는 뻔뻔했다.

그는 계속해서 클라리사를 어린애 상대하듯 대꾸했다.

“도대체 제 발언의 무엇이 에스테스 공녀님의 심기를 상하게 한 건지 모르겠군요. 윌셔스 왕국에 태어난 딸은 대대로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혼인을 하지 않습니까?”

“이시크. 그만 그 멍청한 입 좀 다물어.”

이시크를 위해서가 아니라, 클라리사를 위해서였다.

더는 저런 쓰레기 같은 저열한 말을, 이 고운 아이의 귀에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이시크는 어릴 때부터 계속 저런 사고관을 가지고 성장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이 지난 15년간 내 얼굴만 보면, 성년이 되거들랑 이시크를 위해 팔려 가야 한다고 누누이 이야기했으니, 옆에서 그걸 같이 듣고 자란 이시크 역시 자신을 위한 타인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말로 밟아 버리면 얼마든지 밟아 버릴 수 있었지만, 로제타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말도 섞고 싶지 않아.’

오물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니까.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것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클라리사. 그만 돌아가자.”

로제타가 클라리사의 어깨를 감싸고 차분하게 도닥거렸다.

하지만 클라리사는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린 눈동자에 여태껏 본 적 없는 분노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 우선 영식이 그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는 투명하게 보이는군요.”

클라리사는 더욱 전투력이 상승해 있었다.

“영식의 말한 뜻대로면 저 역시 에스테스 가문의 영달을 위해 왕실에 팔려 가는 것이고, 왕실은 새로운 식구를 사 오는 것이겠네요? 지금 한 말, 부디 영식이 책임질 수 있는 말이길 빌어요.”

“아, 아니……. 공녀님, 뭘 또 그렇게까지 비약을 하십니까.”

왕실을 언급하자 이시크가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저보다 어린 여자 둘은 만만하지만, 왕가를 운운하여 그가 한 말의 뜻을 비약시키니 꼬리를 말고 깨갱 하는 것이었다.

클라리사는 제 시선을 피하는 이시크의 얼굴을 집요할 정도로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도저히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더없이 차가웠다.

“정말 만분의 일, 양보하여 제가 그런 뜻으로 말했다고 쳐요. 그렇다면 영식은, 자신의 여동생을 한낱 정부 취급하려 한 제게 화를 내셔야 하지 않나요? 어떻게 그렇게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보시는 거죠?”

그녀는 조곤조곤 말로 이시크를 패 버렸다.

“클리프 남작가에 대해서 이래저래 실망이 크군요.”

그 순간, 두 사람의 표정에 낭패감이 짙게 어렸다.

그런 그들을 싸늘하게 비웃으며 클라리사가 먼저 몸을 돌렸다.

“가요, 언니. 더 상대하실 필요 없어요.”

로제타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박자 늦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작게 소리를 내었다.

“실프.”

핑-!

에스테스 파크에 머물면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실프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 눈앞에 동동 떠 있는 실프를 본 로제타가 힐끗 눈짓으로 남작 부인과 이시크를 가리켰다.

‘오랜만이야, 실프. 저 두 사람 좀 혼내 줄래?’

-좋아, 로제타! 어떻게 해 줄까?

실프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 허리 위에 작은 두 팔을 척 올렸다.

로제타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남작 부인과 이시크의 근처에 땅이 움푹 패고 그 안에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대화를 나눈 곳은 신전의 마구간 근처였다.

그러다 보니 마부들이 말의 식수를 나르다가 흘린 것이 그렇게 고여 있는 듯했다.

로제타가 속으로 말했다.

‘근처에 물웅덩이가 있어.’

15년간 착실히 합을 맞춰 온 장난 메이트는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로제타의 의중을 단박에 파악했다.

‘옷이 좀 더러워지면 좋겠다. 그치?’

-응! 완전 좋겠다!

까르르 웃은 실프가 날갯짓을 하며 뽀르르 남작 부인과 이시크 쪽으로 날아갔다.

로제타는 코웃음 치며 이미 마차에 오른 클라리사의 뒤를 따라 계단을 밟아 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막 마차 문을 닫았을 그때, 문밖에서 ‘촤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이게 뭐야!”

“젠장맞을. 아오!”

신경질적인 남작 부인의 고성과 거친 이시크의 욕설은 덤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로제타가 의자에 앉으며 주름이 진 드레스를 정리했다.

실프의 힘으로, 그들을 물웅덩이까지 떠밀 수는 없었을 테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운 물을 움직이기는 쉬웠겠지.

실프는 한순간 강한 바람을 일으켜 웅덩이 속 흙탕물을 두 사람에게 뿌렸을 것이다.

마치 물세례를 퍼붓는 것처럼.

“누가 감히 물을 뿌렸어!”

“옷이 엉망이 됐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서 남작 부인과 이시크가 체면도 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로제타는 그 목소리들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마부석을 통해 이야기했다.

“이만 출발하죠.”

“예, 아가씨.”

곧 마차가 구르기 시작했다.

남작 부인과 이시크가 자아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제야 로제타는 맞은편에 앉은 클라리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풀 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곤 로제타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클라리사?”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축 처진 어깨. 의기소침한 모습.

아직 작은 아이가 그러고 있으니 더욱 작고 왜소해 보여, 로제타는 마음이 안 좋았다.

처음 보는 클라리사의 행동에 로제타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니? 속이 안 좋아? 마차를 잠시 세우라고 할까?”

클라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었다.

“언니. 혹시 제게 실망하셨나요?”

“실망? 내가?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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