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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6화 (16/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6화

그 모습에, 클라리사는 입술을 몇 번 씹어 물다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제가 가진 권위로……. 언니의 가족들을 찍어 누른 것 같아서…….”

아.

그제야 로제타는 왜 클라리사가 이토록 위축됐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들의 앞에선 강한 척 쏘아붙였지만 결국 클라리사도 여덟 살 아이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저보다 연장자에게 대드는 것은 사실 말이 쉽지, 그리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혼자 속으로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그제야 로제타는 클라리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눈앞의 이 소녀는 로제타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었다.

로제타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날 위해서 그런 것 아니야?”

“맞아요. 그래도 언니가 싫어하시는 행동인 것 같아서…….”

로제타가 마차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 클라리사의 옆으로 가 앉았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더 편했으면 하는 마음에 클라리사가 엉덩이를 옆으로 물려 자리를 더 내어 주었다.

로제타는 클라리사의 두 손을 가만히 포개어 잡으며 말했다.

“날 위해 애써 준 널 어떻게 미워하겠니? 인사가 늦었어. 아까 날 위해 화를 내 줘서 고마워, 클라리사.”

“언니…….”

울먹이는 클라리사의 목소리에 로제타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살면서 그렇게, 누가 내 편을 들어 준 거 이번이 처음이야. 정말 고마워.”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언니 편이 되어 드릴게요.”

“정말?”

클라리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죽을 때까지, 무조건 전 언니 편이에요. 클라리사 마리안느 에스테스의 이름으로 맹세해요.”

“뭘 또 이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맹세까지 하는 거야.”

이 상황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로제타는 마음 한편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언니, 정말 잊지 마세요. 에스테스 공작가가 언니의 편이라는 것을요.”

“그래.”

로제타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러곤 고마운 마음을 담아 클라리사의 손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 * *

“그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네, 아가씨. 편히 일 보고 오십시오.”

좁은 골목 안까지 마차가 들어갈 수 없기에, 로제타는 마부에게 비교 적 한적한 광장 대로에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하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꼼꼼히 로브 후드를 둘러쓴 뒤 마차 문을 열었다.

오늘 그녀는 홀로 외출한 터였다.

“괜히 오늘 나왔나.”

볼일만 보고 바로 돌아갈 거란 생각으로 일단 나오긴 했지만, 찜찜함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클라리사 몰래 한 외출이었다.

“점심 전까지는 들어가 봐야 하는데.”

오늘은 클라리사에게 허락된 일주일 중 유일하게 늦잠을 자도 되는 날이었다.

그사이를 틈타 나온 것이었다.

혹시라도 클라리사가 나중에 그녀 혼자 외출한 것을 알게 되면 서운해 할 것 같았기에, 로제타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녀는 익숙한 걸음으로 마을 광장에서 세 블록쯤 떨어진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허름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탓인지 골목 안엔 햇빛이 들지 않았다.

그 탓에 더욱 서늘하게 느껴져, 로제타는 로브를 조금 더 여미며 어깨를 움츠렸다.

건물과 건물을 잇기라도 하는 것처럼 빨랫줄이 얼기설기 걸려 있었다.

그 위에 널린 빨래들이 제법 위태롭게 바람에 휘날렸다.

건물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간격이 너무나 좁았기 때문에 건물풍이 제법 강하게 불고 있었다.

그 탓에 옷가지가 몇 벌씩 떨어지기도 했고.

“어이! 거기 그거 밟지 마쇼!”

“미안해요.”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말이 날카로웠다.

삶이 팍팍한 만큼 목소리도 거칠었다.

로제타는 땅에 떨어진 옷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부랑자의 수가 유난히 더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녀의 목적지인 사설 도박장에 가까워질수록 흉흉한 분위기가 더욱 거세졌다.

부랑자들은 도박장의 이용객들이었다.

들어갈 땐 손님 대접을 받지만, 모조리 탕진하면 가드들에게 끌려 나와 길거리에 내팽개쳐지는 것이다.

‘오늘 바꾸고 나면 이제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일 없어.’

클리프 남작가를 떠나올 적 챙겨온 칩의 양이 상당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기가 조금 아까웠다.

로제타는 그것을 환전해 클라리사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해 줄 생각이었다.

‘매번 클라리사에게 받기만 했으니까, 나도 뭔갈 해 주고 싶어.’

사실 도박으로 번 칩을 바꾼 돈으로 아이의 선물을 산다는 건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로제타가 봐 둔 것 중, 클라리사가 쓸 법한 고급품을 사기에는 돈이 조금 모자랐고, 그래서 이렇게 환전을 하여 보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음침하고 위험한 곳에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로제타는 혼자서 걸음한 것이었다.

도박장으로 가는 길이 잠시 헷갈렸지만, 이내 방향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클리프 남작가에서 살 적 서너 번 정도 도박장에 갔었다.

기본적으론 외출 금지였지만, 신전에 갈 때 눈치껏 빠져나와 이곳에 들렀던 것이다.

로제타는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허름하기 그지없는 도박장의 출입문을 잠깐 눈에 담았다가 서둘러 고개를 떨궜다.

도박장은 건물의 지하에 있었는데, 로제타가 거기까지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환전소는 입구 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얼굴에 주근깨가 빼곡하게 박힌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물론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게 주인이 특이한 손님을 기억하듯 항상 로브를 둘러쓰고 침만 바꿔 가는 로제타를 기억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로제타가 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손끝으로 툭툭, 책상 위를 치며, 연초 연기를 길게 뱉어 냈다.

희뿌연 연기가 그녀의 얼굴 쪽으로 날아왔고, 그 역겨운 냄새에 로제타는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 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숨을 참으며, 서둘러 로브 안에서 칩이 든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한동안 안 와서 그런가? 제법 묵직하네?”

“얼른 바꿔 줘요.”

“성격 급하기는.”

남자가 혀를 쯧, 차며 주머니를 열었다.

초조한 로제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도 않는지 칩을 꺼내는 남자의 손길이 느릿했다.

그는 물고 있던 연초를 입술 끝으로 밀어냈다.

그런 뒤 가라뜬 눈으로 칩을 색깔 별로 정리해 차곡차곡 쌓았다.

“20, 40, 60……, 100, 120…….”

로제타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며 초조함을 느꼈다.

하지만 괜히 남자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기에 조금 더 참기로 했다.

‘이제 이런 데 올 일 없으니까…… 얼굴 붉히지 말고 조용히 돈만 받아서 가는 거야.’

남자가 마침내 계산을 끝냈다.

“다해서 615골드군.”

어서 돈을 달라는 듯 로제타가 남자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돈을 주지 않았다.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얄궂어서, 이때껏 짤짤이 푼돈만 바꿔 주다가 모처럼 이렇게 큰돈을 줘야 하니 괜히 아까운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어서 달라는 듯 내민 손을 흔들기까지 했으나,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꼬드기 물었다.

“이봐. 진짜 한 판도 안 해 볼 거야? 내가 선심 써서 공짜로 입장시켜 줄 테니까 한 판은 해 보지 그래?”

“흰소리 말고 돈이나 줘요.”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다행히도 더 시간 끌지는 않고 그녀가 받아 가야 할 돈을 챙겨 주었다.

“그럼 또 보자고.”

능글맞은 인사에 로제타는 답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쾅! 문이 거세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놔라! 놓으라고!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이렇게 험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객기 어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법 젊었다.

“썩 꺼져! 돈도 없으면서 어디서 갑질이야?”

가드가 퉤, 침을 뱉으며 먼지를 털 듯 손바닥을 쳤다.

가드와 손님, 언쟁을 벌이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제법 크고 기세가 사나워 로제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로제타와 가드에게 끌려 나온 남자의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찰나였지만, 한눈에도 남자가 이성적 판단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크. 어서 돌아가자.’

도박장에서 쫓겨난 이들은 대체로 격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무 데나 침을 뱉고, 발에 채는 것을 무조건 걷어찼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을 풀기도 했다.

행여 저 남자에게 붙잡혀 화풀이라도 당할까 싶었던 로제타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한 번 더 작게 들려왔다.

하지만 빨리 이 자리에서 뜨고 싶었던 로제타는 굳이 다시 돌아보는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박장에서 또 다른 이가 올라온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너무 안일했어.’

로제타는 후드를 더욱 여미며 입 안의 여린 살을 아프도록 꾹 깨물었다.

시야가 제한되어 있는 만큼 청각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녀의 뒤를 쫓아오는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무서워졌기 때문이었다.

환전소에 몇 번 갔었지만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무슨 일이 생긴 적은 없었다.

‘쫓아오는 걸까? 아니겠지?’

외길이니 그저 제 갈 길 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뒤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자신을 지나쳐 갔으면 하는 바람에 일부러 걸음을 늦춰 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속도를 맞춰 걷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소리는 덩달아 느려졌다.

로제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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