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8화
하지만 로제타는 그냥 흘려들었다.
이시크와 남작 부인에 대한 욕은, 누가 하든 상관이 없으니까.
로제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요?”
클라리사는 로제타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는 문제로, 너 역시 그 만찬회를 즐길 수 없을 것 같다면…… 아무래도 가는 게 좋겠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싱긋 눈을 휘어 보이자, 그녀에게 기대어 앉아 있던 클라리사가 대번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정말요!”
“그래, 정말.”
로제타가 확답해 주자 클라리사가 돌고래 같은 탄성을 질렀다.
“꺄악! 언니 너무 좋아요!”
클라리사는 단박에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그래 봤자 아직 아이라, 의자에 앉아 있는 로제타의 키보다 조금 더 작았다.
하지만 클라리사는 양팔을 활짝 벌려 로제타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어머, 클라리사!”
그 작은 손으로 어찌나 힘껏 끌어 안던지 로제타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
“언니, 정말 좋아요!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목덜미를 파고들며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로제타는 그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벌써부터 좋다. 클라리사.”
그녀는 어정쩡하게 내리고 있던 팔을 들어 올려 클라리사를 마주 끌어안았다.
클라리사 마리안느 에스테스.
‘공녀’이자, ‘왕세자의 약혼녀’라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타이틀 뒤에 숨겨진 그녀의 진짜 모습은, 아직은 어린아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머니의 죽음을 여전히 슬퍼하고 있는 외로운 아이.
하지만 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너무도 일찍, 어린 나이에 철이 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로제타는, 그런 클라리사의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전생에서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고, 현생에서는 가족 복이 박복하여 구박데기로 살았으니까.
그래서 클라리사가 적어도 자신과 있는 동안 만큼은 제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클라리사의 할머니인 카밀라 대부인은 엄격했으며, 사이좋은 오라비는 바빠서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드물었다.
약혼자는 하필이면 왕세자.
아직 어린 클라리사가 그를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에스테스의 사용인들이 모두 그녀에게 잘해 준다고 한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간극을 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때, 만나게 된 로제타에게 클라리사는 심적으로 많이 기대고 따랐다.
자신을 아이처럼, 동생처럼 대해 주는 그녀의 옆에서 가장 편하게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지할 데 하나 없던 로제타 역시도 자신을 무척이나 따르는 클라리사가 각별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로제타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클라리사의 몸을 살짝 떼어 냈다.
그런 뒤 흥분으로 발갛게 상기된 어린 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에스테스 공녀님. 그날 보여 주실 호스트로서 멋진 모습, 고대하고 있을게요.”
“네!”
클라리사의 씩씩한 대답을 들으며 로제타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어 주었다.
* * *
만찬회 당일.
손님 맞을 채비와 단장을 마친 에스테스 파크는 평소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만찬회는 일찌감치 석찬으로 결정됐다.
“언니, 저 어때요?”
단장을 마친 클라리사는 가장 먼저 로제타에게 달려와 자신을 선보였다.
오늘 그녀는 흰색 바탕의 원단에 푸른 천으로 만든 프릴과 리본이 포 인트처럼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클라리사가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잡고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드레스가 차르륵 따라 돌며 잠시 위로 부풀어 올랐다.
적당히 귀여웠고, 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착장이었다.
오늘 전체적인 코드는 푸른색인 듯했다.
‘에스테스의 상징이지.’
윌셔스 왕국에선 오로지 에스테스 공작가에서만 피콕블루색 푸른 눈이 태어난다.
그래서 윌셔스 왕국의 사람들에게 에스테스는 푸른 공작가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어여뻐. 클라리사.”
로제타의 칭찬에 클라리사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척 모으곤 어깨와 몸을 꽈배기처럼 꼬며 부끄러워했다.
“아이참. 언니가 더 예쁘신데.”
로제타의 옷차림은 하얀 엠파이어 실루엣 드레스로 어깨를 드러내고 허리선을 가슴 아래로 잡은, 최근 귀부 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이었다.
디자인 자체가 비교적 수수한 편에 속해 화장도 옅게만 했다.
하지만 로제타의 외모가 원체 장미꽃처럼 화려해, 심플한 드레스와 화장이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더해 주고 있었다.
오히려 드레스마저 화려하게 입었더라면 촌스러워질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자, 칭찬 릴레이는 이쯤 하자. 우리 이거 시작하면 끝도 없잖아. 나중에 만찬회 끝나고 저녁에 낭독회 하면서 마저 하자. 알았지?”
로제타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자 클라리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낭독회란 별것이 아니었다.
로제타와 클라리사, 그리고 마음 맞는 동년배 하녀 너덧이 모여 자기 전에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 책은 주로 ‘연애 소설’이었고.
“초대객들 오시겠다. 어서 내려가 봐. 나도 준비 마치는 대로 내려갈게.”
“네!”
씩씩하게 대답한 클라리사가 먼저 방을 나섰다.
“아, 잠깐만. 클라리사, 그러고 보니 약은 챙겨 먹었니?”
그 순간 클라리사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클라리사.”
로제타가 목소리를 낮추고 짐짓 엄하게 부르자, 클라리사가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하지만 약이 너무 쓴걸요…….”
클라리사가 주눅이 든 모양인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로제타는 봐주지 않았다.
“그래도 먹어야 한단다.”
클라리사는 약 먹기를 너무 싫어했다.
그래서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가끔 창밖으로 버리기도 했다.
이 세계에 알약이라는 존재가 없어, 모든 약은 가루 형태였다.
그 쓴맛이 혀에 고스란히 닿아 느껴질 테니 아이로선 기겁하며 싫어할 만도 했다.
하지만 클라리사의 주치의로부터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내성이 생겨 나중엔 약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바 있었다.
하여 로제타는 다른 쪽으론 클라리사에게 물러도 약 먹는 것만큼은 엄하게 굴었다.
그녀는 직접 클라리사의 약을 가져왔다.
“자. 어서 먹자. 끊어 먹지 않고, 한 번에 다 먹으면 내가 선물을 줄게.”
“선물이요?”
클라리사의 눈빛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무슨 선물인지는 묻지도 않았다.
약에 손을 뻗은 그녀는 봉투를 개봉하고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뒤 재빠르게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숨을 참은 채로 꿀꺽 삼켰다.
“으윽. 쓰다…….”
사정없이 찌푸려지는 클라리사의 얼굴을 본 로제타가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쓴맛이 싫은 거니까 물 먼저 마시고 약을 넣으래도.”
“하지만 그렇게 하면 가루를 털기 위해 입술을 벌리는 순간 물이 꿀꺽 목구멍으로 먼저 들어가 버리는걸요.”
걱정 끼치기 싫다는 듯 클라리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입 안에 계속 쓴맛이 남아 있는 모양인지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고생했어, 클라리사.”
로제타가 사탕 하나를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대자, 클라리사는 아기 새처럼 쏙 받아먹었다.
사탕을 오물거리던 클라리사가 로제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니! 선물은 뭐예요? 어서 주세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어려 있었다.
로제타가 귀엽다는 듯 그녀의 뺨을 아프지 않게 살짝 잡았다가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대 서랍을 연 그녀가 작은 봉투를 하나 꺼냈다.
“자. 어서 열어 보렴.”
신난 손길로 포장을 풀고는 내용물을 꺼낸 클라리사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머리끈이에요!”
“마음에 드니?”
클라리사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가죽 머리끈에 음각으로 새겨진 무늬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기 시작했다.
고풍스러운 넝쿨과 장미꽃, 그리고 에스테스를 상징하는 피르를 형상화 한 새가 그러져 있었다.
저 무늬를 새기는 바람에 예산이 조금 더 추가되었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로제타도 기뻤다.
“지금 하고 싶어요!”
로제타가 곤란한 듯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선물한 머리끈의 색깔은 초록색이라서 오늘 클라리사의 착장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이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설득법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로제타는 시치미를 떼며, 아쉬운 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클라리사 머리가 무척 마음에 드는데.”
그 말에 클라리사가 냉큼 제 결정을 바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내일 할래요!”
“좋아. 그럼 이 머리끈은 내일까지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네!”
봄 햇살처럼 웃는 클라리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을에서 겪었던 무서운 일이 봄눈 녹듯 사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로제타는 손을 뻗어 보드라운 클라리사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 * *
땅거미가 질 무렵 에스테스 파크의 창문마다 환한 빛이 켜졌다.
뿐만 아니라 저택 전면에 설치된 네 개의 분수에도 모두 조명과 석등이 설치되어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대를 받은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속속들이 도착했다.
클라리사는 호스트로서, 집사 콜린과 함께 현관 정문에 서서 초대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에스테스 공녀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석찬은 일곱 시에 시작될 예정이에요. 그전까진 정원이나 롱갤러리 등 자유롭게 이용해 주세요.”
클라리사는 제법 의젓하게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막 방에서 내려온 로제타는 적당한 거리에 멈춰서 클라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잘하고 있어. 힘내.’
입술을 벙긋거리며 응원을 실어 주자, 아이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걸렸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클라리사를 웃으며 본 뒤, 로제타는 몸을 돌려세웠다.
자신은 에스테스 공작가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클라리사의 옆에 서서 손님을 맞이할 수 없었다.
시간을 때우려고 석찬이 시작되기 전까지 석등이 켜진 정원이나 산책하려고 했다.
그녀가 막 돌아섰을 때였다.
“여어, 로제타.”
시시껄렁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