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9화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이시크였다.
“간만이로구나, 내. 동. 생.”
히죽 웃는 면상이 지독히도 꼴 보기 싫었다.
“이시크. ……정말 왔네.”
로제타가 떨떠름함과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널 만날 기회인데 이걸 어떻게 놓치냐.”
도대체 무슨 말이람?
이해되지 않았지만, 굳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로제타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다시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어허, 로제타. 예의 없이 무슨 행동이냐.”
답지 않게 목소리를 바닥으로 깔며, 불러 세우는 이시크의 말에 로제타가 푹- 신경질적인 한숨을 터트렸다.
“왜. 우리 사이에 더 볼 용건이 남아 있어?”
이시크는 느물거리며 웃었다.
“나와는 없어도 이분들과는 있겠지.”
이분들? 로제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사이 이시크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몸을 사선으로 틀었다.
“어서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집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널 위해, 이 에스테스 파크까지 귀한 걸음을 해 주신 분들이니.”
인사라니? 누구한테? 뭘?
불안함이 저 깊은 어디부턴가 빠른 속도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로제타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움직여, 이시크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노로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로제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터져 나온 욕설을 살벌하게 뇌까렸다.
“이시크. ……이 개자식아.”
로제타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시크의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을 차례로 하나씩 눈에 담았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소개해 보자면…….
로제타보다 50살은 많은 앵지트 후작.
전 약혼녀에게도, 전전 약혼녀에게도 손찌검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 주고 파혼했다는 가스텔 자작의 네 번째 아들.
두 남자 모두 클리프 남작 부인이 일전에 그녀에게 ‘네 분에는 차고 넘치는’ 신랑감 후보라고 골라 준 작자들이었다.
“하. 진짜.”
로제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리며 제 이복 오라비인 이시크를 노려보았다.
“어렵게 모신 분이니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시크의 말에 앵지트 후작이 끌끌 웃었다.
“모셔 오긴, 이 사람아. 우리도 엄연히 에스테스 공녀님의 초대를 받고 왔다네.”
“그렇다면 여기서 모인 것으로 하지요.”
아주 자기들끼리 합이 착착 잘 맞고 있었다.
이번 만찬회는 친목 교류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영지 내의 한 장원을 맡은 클리프 남작는 물론, 영외의 인근에서 거주하는 가문도 다수 초대를 받았다.
애석하게도 이시크와 함께 온 앵지트, 가스텔 가문 모두 그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로제타가 살벌하게 말했다.
“초대를 받고 오셨다면 제가 아니라 호스트인 에스테스 공녀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셔야 예법에 맞지 않겠습니까? 이 빌어먹을 자식의 뒤를 쪼르르 따라 제게 오실 게 아니구요.”
분노가 몸을 지배해 이성이고 예의고 더는 차릴 재간이 없었다.
한편 이시크는 로제타가 이 상황을 싫어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욕을 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로제타의 거친 언사에 얼굴이 정말로 얼이 빠진 멍청이처럼 변하더니, 바보같이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너 지금…… 뭐라고?”
“개자식이라고 했어. 이젠 귀도 먹었니?”
로제타는 관대히 이시크를 향해 한 번 더 욕을 들려주었다.
그의 청력이 걱정되어서 베푼 친절이 아니라, 그에게 한 번 더 욕을 퍼부어 줄 수 있는 이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이시크를 노려보는 눈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욕을 들어 본 이시크의 얼굴이 마침내 상황을 파악하 고는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적잖이 열이 받은 모양인지 그는 모처럼 제대로 단정하게 맨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빛은 도저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보게, 이시크 군.”
“클리프 영애와 이야기가 된 상황 아니었나?”
다그쳐 묻는 남자들의 질문에 이시크가 애써 찌푸린 얼굴을 펴, 웃는 낯을 만들어 보였다.
“하, 하하하. 이것 참. 상황이 민망하게 됐군요. 하, 하하.”
입술을 끌어 올리고는 있었지만, 웃음소리가 뚝, 뚝 끊겼다.
“음. 제 여동생이 지금 좀…… 당황을 한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한번 잘 달래 보겠습니다.”
남자들은 떨떠름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큼, 거 잘 좀 달래 보시오.”
“흠. 기다려 보지.”
남자들은 헛기침을 하며 이시크에게 로제타를 구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신사분들. 이토록 넓은 아량을 보여 주셔 감사합니다.”
이시크의 감사 인사에 남자들은 점잖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의 성격 같았으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날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등등의 험한 말을 지껄이며 크게 역정을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이 지금 이렇게 제 성질대로 행동하지 않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것은 로제타 때문이었다.
만남을 주선한 이시크에게 화를 내고 그냥 돌아가 버리기엔, 로제타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미련이 크게 남을 것 같았다.
남자들은 자꾸만 로제타 쪽으로 돌아가는 무례한 시선을 굳이 단속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이 훔쳐보는 것은 로제타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역겨워.’
로제타는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실프’라고 중얼거리며 정령을 불러내었다.
남자들은 간간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여체의 곡선을 당당하게 훔쳐보며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로제타가 실프를 향해 눈짓했다.
그 순간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앗 따가워!”
“으윽, 이게 대체 뭐야!”
멍하니 로제타를 훔쳐보던 두 남자가 동시에 양 손바닥으로 제 눈을 꾹 누르더니 마구잡이로 비벼 댔다.
실프가 바람을 이용해 그들의 눈에 흙을 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실프는 남자들에게 흙을 뿌린 뒤 재빨리 정령계로 돌아갔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로제타는 마음이 아주 조금 통쾌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을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잠깐일 뿐이었다.
이시크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팔을 사납게 붙잡고 정원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다.
“따라와라.”
“아파! 이거 놔.”
“조용히 입 다물어. 한 대 얻어맞기 전에.”
남자들에겐 더없이 속 좋은 사람인 양 느물느물 웃고 있었으면서, 로제타에게는 사나운 기세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시크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어느새 주위엔 어둠이 가득 내려앉았고, 로제타는 계속해서 이시크에게 끌려갔다.
그는 정원에 설치해 둔 석등의 빛마저 들지 않는 으슥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에스테스 파크 정문에 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졌다.
이시크는 잘 손질된 정원수의 그림자가 드리운 쪽으로 로제타를 팽개치듯 몰아넣었다.
“아주 예쁘다, 예쁘다 하니 더는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그런 이시크를, 로제타는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비열한 자식.”
자신을 향한 비난의 말에 이시크가 피식 웃었다.
그는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기괴하게 웃었다.
“아주 살판이 났구나? 집 떠나 이곳에 사니까 네가 막 에스테스 공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나 보지?”
살벌하게 중얼거리던 이시크가 피식 비웃더니 비아냥거렸다.
“더러운 야만인의 피가 섞인 사생아 따위인 주제에 말이야.”
에스테스 파크에 살며 더는 듣게 되지 않은 말.
제법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들으니 누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가슴을 헤집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로제타는 모욕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시크는 이런 쪽으론 매우 눈치가 빠르고 약은 면이 있는 남자라서 제 말에 그녀가 상처받았음을 금세 눈치챘다.
그래서 그는 더욱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나 출세에 눈 돌아갔다. 근데 그게 뭐? 너 팔아서 한몫 두둑이 챙겨 가문의 위세 좀 떨치겠다는데, 그게 뭐 잘못됐냐?”
이시크는 생각보다 뻔뻔해서 연이어 목소리를 높였다.
“나 말고도 다들 그렇게 살아. 가문에 있는 딸 팔아서 장사한다고. 딸 없는 가문에선 양녀도 들이고! 그런데 왜 너만 유세야, 유세가!”
“어휴, 시끄러워. 소리 높이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니? 여기가 클리프 가인 줄 알아?”
로제타의 일침에 그제야 이시크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공작가에서 큰소리를 내는 것은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방금까진 삿대질을 하며 을러대던 그가 이번엔 작전을 바꾼 모양인지, 살살 꼬드기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정확히는 가르치는 듯한 재수 없는 투였다.
“어머니와 이 오라비가 말이야. 네게 딱 맞는 혼처를 구해 왔는데 너는 왜 우리 모자의 성의를 이렇게 개무시하는 거냐? 그동안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사람 열 받게.”
로제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잠깐만, 이시크.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너를 비롯한 클리프 남작 가문의 일원 중 누가 날 키웠다는 거니? 난 나 혼자 컸어.”
“안 쫓아내고 재워 줬으면 충분히 키워 준 거 아니냐고!”
로제타가 뭐 이런 머저리 같은 게 다 있냐는 듯한 힐난의 눈초리로 이시크를 바라봤다.
“진작부터 멍청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상식도 부족하고…… 처세도 부족하고. 어휴.”
“……뭐? 이게 진짜 뚫린 입이라고 막하네. 로제타! 너 그동안 하고 싶은 말 다 못 하고 어떻게 살았냐?”
“응, 그런 것까지 네가 걱정 안 해 줘도 돼. 알아서 잘 살았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로제타는 마치 잔챙이를 떼어 내듯 성의 없는 말투로 딴청 부리며 대꾸했다.
이시크는 당황스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윽박지르면 로제타가 움츠러들면서 저 하자는 대로 할 것 같았는데, 상황이 예상외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망할 년이, 진짜!”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로제타는 그 위협적인 동작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때리기만 해 봐, 어디.”
로제타가 눈에 힘을 주곤 제 이복 오라비를 노려보며 짓씹듯 말을 이었다.
“내가 가만히 맞고만 있을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