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1화
이시크의 눈이 점점 돌아가고 있었다.
이시크가 황급히 제 고간을 감싸 쥐고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크나큰 충격에 다리 힘이 풀린 모양인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익은 새우처럼 등을 만 그는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저 간신히 숨만 몰아 내쉬고 있었다.
그제야 로제타는 말아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촤르륵. 최고급 모슬린으로 만든 드레스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지며, 로제타의 다리를 다시 감췄다.
로제타는 체면도 잊고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이시크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까불지 마. 머저리 같은 게.”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참았다.
로제타는 아주 조금 주름이 진 부분을 펴기 위해 손바닥으로 드레스를 탁탁, 두드리며 폈다.
그사이, 로제타와 이시크의 주변을 사납게 맴돌던 바람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저택 현관 쪽을 보니 얼추 손님들이 다 도착한 모양인지, 클라리사가 집사인 콜린의 에스코트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얼른 가야지.’
로제타가 저택 쪽으로 몸을 틀고 막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였다.
-로제타, 멋있어! 꺄아아아!
지척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실프?”
이상함을 느끼고 로제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서 동동 떠다니고 있는, 익숙한 모습의 정령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부른 적도 없는데.
분명 아까 흙을 뿌리는 장난을 친 뒤, 실프는 정령계로 돌아갔었다.
그 뒤로 육성으로 실프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계에 나타나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로제타는 서둘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있던 이시크가 어느새 자세를 바꿔 엎드린 채로 정원의 잔디를 닥치는 대로 뽑아 대며 아픔을 삼키고 있었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따라와, 실프.’
-응!
로제타는 서둘러 이시크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그녀의 뒤를 실프가 뽀르르 날갯짓하며 열심히 뒤쫓아 갔다.
이시크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멀어지고 난 뒤에야 로제타가 걸음을 멈췄다.
열심히 고개까지 돌리며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거듭 확인했으나, 그녀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속삭이며 물었다.
“실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른 적 없는데 네가 어떻게 인간계에 다시 나온 거야?”
그러자 실프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양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로제타, 나 안 불렀어?
“응, 안 불렀어.”
-진짜?
로제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령의 미간이 또 좁아진다.
단순함의 극치인 실프가 머리를 쓰거나 골치 아픈 일에 맞닥트리게 되면 언제나 내보이는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그럼 내가 여기 어떻게 나왔지?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로제타의 얼굴이 실프처럼 찡그려졌다.
-나는 그냥 누가 날 잡아당기길래 끌려 나왔는데에…….
“누가 널 잡아당겼다고?”
실프가 두 손을 턱 아래 꼭 모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빙그르르 눈을 굴리는 게 꼭 로제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응. 그래서 로제타가 날 부른 건 줄 알았어. 꼭 나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라서…… 안 나오면 정말 많이 혼날 것 같아서, 그래서 나왔는데…….
누구한테 혼난다는 거지?
로제타는 실프와 말을 섞을수록 더욱 답을 알 수 없어 오리무중이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자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로제타는 누군가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선은 실프를 정령계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일단은 돌아가 있도록 해, 실프. 오늘 밤에 아까 날 도와준 답례를 해 줄게.”
대가를 주겠다는 말에 실프의 날갯짓이 더욱 빨라졌다.
그 바람에 어두운 허공에 반짝이는 가루가 더욱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흥분한 실프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로제타! 로제타! 그러면 있잖아! 지난번에 대가로 줬던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잔뜩 올렸던 쿠키를 줘!
“알았어.”
로제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아깐 경황이 없어 제대로 말 못 했어. 그 남자들 눈에 흙 뿌려 줘서 고마워.”
-그쯤이야! 누워서 꿀 먹기인걸!
실프가 거들먹거리며 젠체했다.
“밤에 부를게.”
-알았어!
퐁 소리와 함께 실프가 정령계로 돌아갔다.
그 타이밍에 맞춰, 누군가 정원수의 잎사귀를 걷어 내더니 로제타 쪽으로 돌아왔다.
“오, 영애. 여기에 계셨구려.”
이시크가 데리고 온 두 남자, 앵지트 후작과 가스텔 영식이었다.
실프를 만나는 동안 잠시 풀어졌던 로제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런데 이시크 영식은……. 아! 혹 우리를 위해 자리를 피해 준 건가?”
70대 노인인 앵지트 후작이 끌끌 혀를 차는 목소리로 웃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들은 이시크의 부재를 다른 쪽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아니라고 말하려고 입술을 열었다가, 그냥 다물어 버렸다.
말도 섞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저들을 무시하고 바로 공작저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려는 로제타를, 남자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허, 어딜 가시려고?”
가스텔 영식이 로제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웃……! 아파요, 이거 놓으세요!”
“그럴 수야 없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가스텔 영식이 로제타를 붙잡고 있는 사이, 앵지트 후작이 로제타의 앞을 막아섰다.
“다들 이게 무슨 짓이시죠? 어서 길을 터 주세요.”
로제타가 애써 힘껏 손을 털어 내며 말했다.
간신히 풀린 손목은 무척이나 얼얼했다.
아픈 곳을 반대쪽 손으로 움켜잡으며 로제타가 날카롭게 남자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앵지트 후작과 가스텔 영식은 그저 비웃듯 피식거릴 뿐이었다.
“영애 얼굴 하나 보자고 여기까지 먼 걸음을 하였는데 그냥 보내면 그게 뭔 헛수고겠나.”
“거, 노친네가 욕심만 많아선. 쯧.”
“어허,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이 예의 따위는 말아 먹었구나!”
후작과 가스텔 영식은 서로를 견제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저음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가만 듣고 있자니 하나같이 다들 저열해서 원.”
명백한 비난의 말.
그 말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두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냐!”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로브와 모자, 온통 검은색으로 중무장한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또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먼지와 나뭇잎들이 강풍에 실려 와 세 남자에게 위협적으로 달라붙었다.
그것들을 떼어 내기 위해 소란해지는 사이, 장신의 남자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명예와 수치를 아는 자라면, 더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이만 돌아들 가도록. 쯧, 남자 망신 다 시키는군.”
‘남자 망신’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앵지트 후작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그는 노쇠하여 이제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욕은 왕성해 젊은 후처를 찾고 있었다.
그러니 남자 망신이란 그 말은 후작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열쇠였다.
후작은 에스테스 파크에 초대되어 온 사람들 중, 공녀를 제외하고는 저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크게 화를 내며 반말을 내뱉었다.
“어디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하필이면 주위가 컴컴해, 일찌감치 노안이 온 후작으로서는 제게 시비를 걸어온 남자의 외모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가스텔 영식은 영애들이라면 모를까 같은 남자의 얼굴 따윈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라 마찬가지였다.
앵지트 후작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크게 휘둘러 남자를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장신의 남자는 너무도 가뿐하게 그 지팡이를 피했다.
그 바람에 앵지트 후작의 몸이 앞으로 쏠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던 가스텔 자작 영식의 다리가 별안간 꺾였다.
장신의 남자가 소리도 없이 그에게 접근해, 무릎 뒤를 힘껏 걷어차 다리가 풀린 까닭이었다.
로제타를 덮치려고 했던 두 남자가 바닥에서 뒹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를 도와준 남자는 가볍게 손을 털며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 내며 말했다.
“혼자 처리할 수 있었어요.”
도도한 그녀의 말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최근의 에스테스에선 고맙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군요.”
유머러스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로제타는 자신이 무례했음을 곧바로 인정했다.
“실례했습니다. 계속된 봉변에 감정이 격앙되어, 도움을 주신 분께도 험한 말을 하게 되었군요. 부디 신사분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려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녀의 사과에 남자도 한층 더 유해졌다.
“별말씀을. 그저 일전에 받은 대가가 조금 과했기에, 남은 분만큼의 도움을 더 드렸을 뿐입니다.”
“네? 그게 무슨…….”
로제타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꼬리를 흐리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것, 말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도와드린 답례로 제게 주셨던 칩인데.”
“네? 칩이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하려던 그때, 로제타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때, 절 도와주셨던……!”
남자를 알아보기 무섭게 로제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세상에 제가 그때 드린 게 칩이었나요?”
“역시 모르고 주셨군요.”
“어머……. 정말 죄송해요.”
로제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날 저를 도와준 남자에게 금화를 하나 건넬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급하게 꺼내다 보니, 미처 정산하지 못한 노란색 칩을 꺼낸 모양이었다.
칩 이야기를 꺼낸 건, 로제타의 긴장과 경계를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는 듯, 남자는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사실 긴가민가했었습니다. 하지만 들을수록 목소리가 그날 만났던 레이디와 같은 것 같아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그리고 오늘도 너무 감사드려요.”
로제타가 예의를 차리자, 그 역시 고개를 까닥하며, 예법에 맞게 대꾸했다.
“그런데…… 귀하께선 클라리사 공녀님의 초대를 받고 오신 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