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2화
석등의 빛이 닿지 않는 정원의 어두운 쪽에 있다 보니, 로제타는 남자의 외양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큰 키와 넓은 어깨. 달빛에 빛나는 미려한 턱선과 콧대만으로도 그가 범상치 않은 외모임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남자의 눈동자 색깔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그의 신분에 대해선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조금 늦으셨네요. 공녀님께선 손님맞이를 끝내고 곧바로 만찬장으로 들어가셨을 거예요. 신사분께서도 어서 현관으로 가시지요. 풋맨이 안내해 줄 거예요.”
로제타의 말에 남자는 뭔가 난처한 듯 말꼬리를 흐리며 턱을 쓸어내리듯이 만졌다.
“으음. 오늘 초대를 받은 건 아닌데.”
로제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남자를 만찬회에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방문객’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번거로우시겠지만 후일 다시 방문하심을 추천드립니다. 오늘은 공녀께서 에스테스 영지의 가신들과 교류하기 위해 석찬을 함께하는 날이거든요. 아마 공녀님께서 객을 맞이할 시간을 따로 빼시긴 어려울 것 같아서요.”
“참고하겠습니다. 혹, 그럼 레이디께서도 오늘 만찬회에 초대받으신 겁니까?”
‘어떤 의미에선 클라리사에게 초대받은 게…… 맞지?’
로제타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러시군요.”
그사이 바닥에 뒹굴던 두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그들이 멀찍이 사라진 걸 본 뒤, 로제타는 다시 남자를 돌아보며 미소 띤 얼굴로 무릎을 살짝 굽혔다.
“다시 한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곧 만찬회가 시작될 것 같아 이만 먼저 가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눈치도 없이 레이디를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군요.”
남자는 너무도 젠틀하게 대꾸했다.
미소 띤 얼굴로 걸음을 옮기려던 로제타가 잠깐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주저하던 그녀는 자신이 지나온 쪽을 돌아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저쪽에도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데……. 아까 그들과 한패라고 볼 수 있거든요. 지금은 쓰러져 있지만 깨어나면 해코지를 하러 오지 않을까 싶어서…….”
앵지트 후작과 가스텔 영식은 도망이라도 갔다.
하지만 이시크는 아직 저쪽에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가 몸을 추스른다면, 이미 돌아 버린 눈으로 만찬회장에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와서 정말 깽판이라도 놓으면 어쩌나.
그러면 클라리사에게 큰 폐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말고 들어가십시오. 제가 시종에게 말해 내쫓겠습니다. 레이디를 겁박한 자들은, 에스테스가 결코 환대하지 않으니까요.”
그 말에 로제타는 남자가 에스테스 공작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도 그럴 게, 에스테스에 대해서 잘 아는 듯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로제타가 미소를 지으며 정말 작별의 인사를 건네듯 인사했다.
그러자 남자가 로제타를 향해 살짝 허리를 굽히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신사가 레이디에게 의례상 하는 경애의 키스를 할 기회를 달라는 청이었다.
로제타는 잠시 주저하다가 저 역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가 가볍게 그녀의 손끝을 그러쥐었다.
“좋은 밤 되시길.”
“신사분께서도요.”
신사로부터 손등에 키스를 받아 본 적이 없던 로제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손등에 입을 맞춘 남자는 질척거리지 않고 산뜻하게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로제타는 손끝을 서둘러 말아쥐고는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리는 기분이었다.
* * *
로제타가 현관 쪽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집사 콜린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로제타를 보고 반색했다.
“아가씨!”
“콜린. 만찬회는 벌써 시작되었나요?”
혹시라도 전채 요리가 서빙되었다면 괜히 중간에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제 방으로 올라갈 생각에서 물은 말이었다.
하지만 콜린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공녀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그런 뒤 집사는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고는 로제타만 들을 수 있게끔 속삭였다.
“공녀님께서 로제타 아가씨께서 오시지 않으면 만찬회도 시작할 수 없다고 저희에게 으름장을 놓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서 만찬회장으로 들어가 클라리사의 고집을 꺾어 달라는 뜻이었다.
“알았어요.”
콜린의 안내에 따라, 로제타가 서둘러 만찬장에 입장했다.
“로제타 클리프 남작 영애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모셔요.”
공적인 자리라 그런지 클라리사가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클라리사가 로제타를 위해 마련해 둔 자리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석이었다.
* * *
한편, 로제타가 정원에서 만난 남자는 그녀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혀를 찼다.
“귀빈을 모신다면서 경비가 엉망진창이군.”
어린 동생이 머무는 곳이라 더욱 짜증이 치솟았다.
해이해진 기강 단속을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자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서, 남자는 나무와 꽃이 아닌 다른 것을 눈에 담았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허공에서 포슬포슬 떨어져 내리고 있는 환한 빛 가루를.
남자가 천천히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해서 들어 올리더니, 그 빛 가루를 잡았다.
“이건…….”
남자의 푸른 눈에 이채가 돌았다.
* * *
“클리프 남작 영애 입장하십니다.”
만찬회장의 문이 열리고, 집사 콜린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로제타에게 이미 착석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만찬회장에는 대략 50명이 앉아 같이 식사할 수 있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식탁이 설치되어 있었다.
가장 상석이라고 볼 수 있는 벽난로 쪽의 2인석은 불참석을 하더라도 가주와 안주인의 자리이므로 비워 둔다.
클라리사는 그 상석의 왼쪽 대각선 부분에 앉아 있었다.
5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로 모이자, 로제타는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튀고 싶지 않았는데.’
머리 색이 유별난 만큼, 오늘 최대한 눈에 띄지 말자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다 이시크 때문이야.’
하지만 정원에서의 일로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애써 태연한 척 입술을 열었다.
“제가 제일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싸늘한 침묵이 꼭 자신을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바로 클라리사가 앳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별말씀을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니 그리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영애.”
클라리사는 ‘언니’라는 호칭은 사적인 자리에서만 사용하기로 한 약속을 착실히 지키는 중이었다.
로제타는 어린 그녀가 대견해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주었다.
“양해에 감사드려요.”
“집사, 클리프 영애를 이쪽으로 모셔요.”
“알겠습니다. 공녀님. 영애, 이쪽으로 오시지요.”
로제타는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차락, 차락.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발끝에 드레스 자락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많은 시선이 달라붙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 혹은 빨간 머리에 대한 경멸과 멸시.
하나하나 다 마주하지 않아도 그 눈빛들이 품은 수많은 감정이 멍에처럼 무겁게 로제타의 어깨를 짓눌렀다.
로제타는 제 자리로 걸어가며 빈자리가 세 군데 있음을 눈치챘다.
이시크와 후작, 자작 영식의 자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행여 그들이 이곳으로 올까 봐 마음이 조금 불안했지만, 정원에서 만난 신사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여깁니다.”
마침내 로제타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그녀에게 내어 준 자리가, 바로 공녀인 클라리사의 바로 옆자리인 상석이었기 때문이다.
남작도 아니고 고작 남작 영애다. 그것도 사생아인.
만찬장의 귀족들이 왜 그렇게 고깝게 저를 바라봤는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서 앉으세요, 영애.”
클라리사의 가벼운 재촉에, 집사가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로제타는 조금 얼떨떨하고 부담스러운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클라리사가 일어났다.
그녀는 또래에 비해서도 키가 워낙 작아, 의자에도 받침대를 받쳐 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두 발로 선다고 하여도 식탁 선에 얼굴만 동동 떠다녔다.
“여기 오르시지요, 공녀님.”
서둘러 시종이 발 받침대를 내려놓자 클라리사가 그것을 밟고 올라섰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위로 쑥 올라와 적어도 명치 선까지는 보였다.
클라리사는 빈 유리잔을 들고 스푼으로 가볍게 세 번 쳤다.
“오늘 이렇게 제 초대에 응해 에스테스 파크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더 일찍 만나 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모두 아시다시피 제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지금에서야 자리를 마련했어요.”
“공녀님의 건강이 최우선이지 않습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맞습니다, 공녀님. 무탈하신 모습을 뵈는 게 저희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가신들이 돌아가며 대답했다.
그들의 말을 미소 띤 얼굴로 듣던 클라리사가 다음 말을 이었다.
“에스테스 파크의 요리사가 제 실력을 마음껏 뽐낸 정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두의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로제타는 클라리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어린데, 어쩜 저리 말을 똑 부러지게 할까.’
대견하고 기특했다.
클라리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콜린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만찬장 벽에 서 있던 시종들이 저마다 한 걸음 씩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들고 있던 와인 병을 귀족들의 빈 잔에 쪼르륵 따라 주었다.
아직 미성년인 클라리사와 소수의 영애, 영식들에게는 달콤한 포도 주스가 주어졌다.
클라리사는 다른 이들의 잔이 모두 채워진 것을 확인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유리잔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에스테스의 번영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