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4화
* * *
“손님방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돌아가시는 길이 먼 분이나, 과음하여 거동이 힘드신 분은 오늘 이곳에서 푹 주무세요.”
클라리사의 만찬회는 성공적이었다.
초대된 손님들은 만찬회를 꼼꼼하게 준비한 클라리사를 칭찬했으며, 테런은 그런 제 여동생을 대견하게 봤다.
초대받아 온 손님 중 반은 마차를 타고 돌아갔고, 반은 공작가에서 내어 준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모두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제야 로제타도 안도를 하며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혹시라도 이시크와 앵지트 후작, 가스텔 자작 영식이 만찬회에 나타나 아수라장을 만들지는 않을까 내내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테런이 정원에서 약속해 주었던 대로 내쫓은 모양인지, 세 남자는 만찬회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차가 모두 떠나고 난 뒤에야, 테런은 클라리사와 함께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배웅하는 무리엔 로제타를 비롯해, 머물고 가는 귀족 몇몇도 함께였다.
그래서 테런은 로제타가 하녀들과 함께 자신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어느덧 다른 손님들은 각자 배정받은 손님방으로 흩어졌고, 클라리사의 옆방을 사용하는 로제타만이 두 사람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본의 아니게 남매가 나누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런데 말이다. 클라리사.”
“네, 오라버니.”
“로제타 양은 어디에 있니?”
제 이름이 들리자 로제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테런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제 여동생에게 물음을 건넸다.
“아, 혹시 벌써 잠자리에 들었으려나? 하긴 시간이 벌써 아홉 시니.”
잠자리? 아홉 시?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왜 따지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테런의 손을 잡고 중앙 계단을 오르던 클라리사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자신들을 따라오는 로제타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테런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로제타 언니는 왜요?”
“언제나 너와 함께 놀아 주는데, 오라비가 되어서 감사 인사는 좀 해야지. 좋아할까 싶어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인형과 오르골을 사 왔는데……. 혹 로제타 양은 인형을 좋아하니?”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던 로제타가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날 클라리사와 동년배라고 생각했구나.’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느라 로제타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한편 테런의 말에 클라리사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응?”
“긱스 경이 오라버니께 로제타 클리프 남작 영애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나요?”
“올렸을걸?”
“안 보셨어요?”
“음……. 너와, 사람 보는 눈이 그 누구보다 정확한 콜린과 줄리아가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결정한 일이라 따로 확인할 생각을 미처 못 했구나. 게다가 너도 알잖니. 오라비가 도로 정비 사업으로 요새 좀 정신이 없는 것을 말이야.”
그래. 원작에서도 그랬다.
테런은 로제타가 클라리사를 학대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로제타가 클라리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정말 잘했기 때문에.
테런은 그 단 한 번의 무관심으로 벌어진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으며, 수없이 자신을 욕했었다.
원작의 내용을 상기하자 로제타의 마음이 다시금 무겁게 가라앉았다.
테런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두근댔다.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정원에선 왜 그렇게 심장이 뛰었던가 했더니.’
‘콩닥’이 아니라 ‘벌렁’이었나 보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죽일 사람을 알아보고 반응한 것인가 싶었다.
로제타는 진정시키려는 듯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눌렀다.
‘게다가 마을에서도 도박장 환전소에 들렀던 모습을 보였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테런이 그녀를 도박장에 들락거리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첫 번째 만남과 두 번째 만남, 모두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불량배를 거칠게 제 압하던 일이 떠올라 테런이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로제타는 과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공포심과 경계심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눈을 굴려 조심스럽게 테런을 관찰했다.
클라리사에겐 한없이 다정한 오빠였다.
에스테스 파크에 사는 동안, 사용인들로부터 그가 만점짜리 고용주라는 후한 평도 이미 많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정말 날 죽일까?’
이미 원작과는 다른 노선을 탔는데 그래도 날 죽일까.
괜히 혼자 울적해진 기분이라 로제타의 표정이 흐려졌다.
‘뭐 일단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그녀가 한숨을 들이켜며 심란한 제 속을 다독였다.
그사이, 클라리사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자 테런 역시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으며 덩달아 멈춰 섰다.
“왜 그러지, 클라리사?”
“오라버니. 인사하세요.”
클라리사가 잡고 있던 테런의 손을 놓고 몇 계단 다시 내려가 로제타의 옆에 섰다.
“이 여성분이 바로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만나 뵙고 싶어 했던 로제타 클리프 남작 영애셔요.”
테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여성분이?”
클라리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로제타는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로제타 클리프라고 합니다, 공작님. 공녀님의 배려로 에스테스 파크에서 반년째 머무르고 있어요.”
“아, 이런…….”
테런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그 큰 손으로 제 입가를 덮고 난처한 눈빛으로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러길 잠시, 이내 정중하게 로제타를 향해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테런 아셔 에스테스입니다. 줄리아가 있으니, 간병은 하녀장이 할 거라고 생각해서 막연하게 레이디 클리프를 클라리사와 비슷한 나이일 것이라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부디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길.”
로제타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괜찮습니다.”
제 오라비 테런이 로제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클라리사는 마음을 풀었다.
그녀는 다시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 테런의 손을 다시 잡았다.
세 사람은 다시 클라리사의 방으로 향했다.
클라리사는 테런을 올려다보며 새초롬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특별히 오늘, ‘한밤의 낭독회’에 오라버니를 초대해 드리겠어요.”
“한밤의 낭독회?”
그게 뭐냐는 듯 테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두 남매의 뒤를 따라가던 로제타가 조용히 말해 주었다.
“클라리사 공녀님께서 잠들기 전까지 저와 하녀 몇몇이 돌아가며 책을 읽어 드리고 있어요.”
한마디로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라버니더러 저가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테런은 웃음을 참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낭독회도 열고. 우리 클라리사가 점점 숙녀가 되어 가는구나.”
나이는 여덟 살이지만, 아기 때부터 남매의 할머니인 카밀라 대부인이 클라리사를 끼고 온갖 교양과 예법을 가르쳤다.
그러한 이유로 클라리사가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게 곧잘 많았고, 행동거지 역시 그러했다.
그 애어른 같은 모습이 테런도, 로제타도 마음이 많이 쓰였다.
‘사이가 좋은 남매라더니, 클라리사가 정말 공작님 앞에선 아이처럼 구는구나. 다행이야.’
아무 데도 기댈 데 없이 혼자 어른이 되어야 했던 저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로제타는 생각했다.
손을 잡고 걸어가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두 남매를 부러운 눈길로 보던 로제타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언제나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클라리사의 방에 따라가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래선 안 될 듯했다.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던 테런, 클라리사 남매의 걸음도 멈췄다.
“언니? 왜 그러세요?”
“그게 저…….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갈까 해요. 오늘 한밤의 낭독회엔 공작님께서만 참석하시는 걸로 하는 게…….”
“무슨 소리세요, 언니!”
로제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라리사가 팔짝 뛰었다.
“언니도 오셔야지요!”
“나, 아니. 저도요?”
“네!”
클라리사가 뭘 그리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 로제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테런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그녀가 암묵적으로 자신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테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로제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작고 어린 친구, 클라리사에게 미소 지어 줄 수 있었다.
“네, 공녀님. 그렇게 할게요. 우선 방으로 돌아가서 목욕하시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세요. 한 시간 뒤에 방문하겠습니다.”
“네, 언니!”
“그럼 오라비도 그 시각에 맞춰 방문하마. 가 보렴, 클라리사.”
테런이 손을 놓아주자 클라리사가 웃는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녀의 손을 잡고 제 방으로 향했다.
그녀와의 거리가 제법 멀어지자, 테런은 나란히 선 로제타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하게도 보모 역할까지 겸하게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공녀님께서 절 따라 주시니 저 역시 함께 지내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로제타가 웃으며 대답하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공녀님 앞에선 보모라는 말씀은 사용하지 마세요. 아이 취급한다고 싫어하시니까요.”
테런이 피식 웃었다.
“아직 아이인데 말이죠.”
“제 말이요. 조금 더 나이에 맞게 생활하셔도 될 텐데, 가끔 무리해서 어른이 되려 하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자신이, 그렇게 컸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때 클라리사가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두 사람을 향해 한쪽 팔을 붕붕 흔들었다.
그런 아이에게 로제타와 테런, 둘 다 웃으며 손 인사를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