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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25화 (25/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5화

“저는, 지금보다 더 공녀님이 아이다워지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아이는 안쓰러우니까.

무심코 중얼거렸던 로제타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테런의 피콕블루색 눈동자가 저를 향하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주제넘은 말이었지요?”

“아닙니다. 틀린 말씀도 아니니까요.”

테런은 하녀에게 뭐라 뭐라 즐겁게 떠들어 대며 웃는 클라리사의 모습에 다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저 역시 저 아이가 안쓰럽습니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어, 일찍 어른이 되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모습이 마음에 걸립니다.”

클라리사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테런이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몸을 반쯤 틀어 로제타를 마주 보며 시선을 맞췄다.

“영애.”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로제타의 귓바퀴를 따라 감겼다.

정중한 테런의 목소리에, 로제타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돼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는 손끝을 꽉 쥐었다.

테런은 그런 로제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샅샅이 훑어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특히, 그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로제타의 머리, 정확하게는 머리카락인 듯 보였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오늘 로제타는 만찬회를 위해 드레스를 차려입으며, 옆의 머리카락을 땋아서 반 묶음을 한 상태였다.

그 바람에 평소와 달리, 얼굴선이 조금 더 드러난 상태였다.

‘혹시 안 어울려서 그런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침울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로제타는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른손을 들어 어느새 뻣뻣해진 제 뒷목을 슬그머니 매만졌다.

그런 뒤,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는 테런의 시선을 피해 괜스레 제 발끝만 바라보았다.

‘왠지 좀 부끄럽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조금 붉어져 있었다.

남자라면 이제 치가 떨리게 싫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바로 지금 제 눈앞의 저 남자.

‘너무도 다른걸.’

오늘 만났던 이시크나 다른 남자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한 남자다.

테런은 시종일관 로제타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아끼는 면모를 보여 주기까지 했다.

그것은 꾸며서 연기한다고 나올 수 있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외모는 무척이나 수려했고, 기품은 남달랐다.

로제타는 슬쩍 시선을 들어 테런을 마주 보았다.

‘그런데 에스테스 공작은 대체 왜, 나를 왜 저런 표정으로 보는 걸까?’

어딘가 조금 슬프고, 어딘가 조금 애틋한 그런 표정.

로제타는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더는 저 시선을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로제타가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테런을 불렀다.

“공작님?”

“……예?”

그 부름에 테런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로제타의 머리카락만 바라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옮겨 오더니, 이윽고 그녀를 바로 응시한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보며 수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절 부르시곤 말씀이 없으시기에요. 혹 중요한 것을 생각 중이신데 제가 방해한 것이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로제타의 상황 설명에, 테런은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목을 골랐다.

“죄송합니다, 영애.”

로제타가 보기에, 테런은 지금 조금 정신이 없어 보이는 상태 같았다.

그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혹, 바람의 힘을 쓰십니까?”

문득, 정원에서 봤던 반짝이는 빛 가루가 떠올랐다.

제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돌리다가 채 정리가 되지 않은 궁금증이 날것 그대로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로제타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그녀는 동요했으나, 그런 티를 내보이지 않고 되레 반문했다.

“네? 그게 무슨…….”

그러자 이번엔 테런 쪽에서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역시 그런 질문이 나갈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원래 하려던 말이 아니었나 봐.’

즉, 머리를 거치지 않고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일 테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굳이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는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윌셔스에서 바람의 힘은 공작님께서만 쓰실 수 있는 힘이죠. 그러니 제가 감히 어떻게 사용하겠어요?”

낭패감이 서려 있던 그의 얼굴에 빠른 속도로 실망감이 찾아드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정말입니까?”

재차 물어 오는 그의 음성은 목이 졸린 듯했고,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외면해도 될까.’

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는걸.

로제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네. 그 힘은 제 힘이 아니니까요.”

“그렇습니까.”

테런의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그렇게 힘이 빠진 음성으로 재차 중얼거렸다.

자신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그렇겠지요.”

로제타는 다시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하지만, 실프를 다룰 수 있다는 걸 밝힐 생각은 없어.’

실프는 로제타의 유일한 무기였다.

비록 하급 정령이라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미비했지만.

정령사로서 자질을 갈고닦고, 무엇인가를 더 배운다면 중급 정령까지는 소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로제타의 목표는, 클리프 남작가와 연을 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뿐이니까.

테런은 좋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였다.

특히나 클리프 남작 부인이 대외적으론 사생아를 거둔 마음 넓은 귀부인인 척 연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선 저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옆에서 봐 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살면서 마음이 많이 열렸다고 한들, 지난 15년간 눈치 보며 살아온 세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반년간 잠시 느슨해졌던 신경줄과 경계심을 다시 팽팽하게 당겼다.

‘바람을 다룰 수 있다는 걸 들켜서 좋을 것 없을 것 같아. 특히나 이능은 고유성이 중요하잖아.’

그래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미력한 힘이라도, 에스테스 공작가의 가주만 사용할 수 있는 바람의 힘을 일개 남작 영애인 자신이 쓴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품는 성격이다 보니, 아무리 테런이 클라리사의 오빠라 할지라도 신뢰하긴 어려웠다.

‘이제 만난 지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기도 하고.’

현재로선 그를 무작정 신뢰하기가 여러모로 무리라는 판단을 했다.

‘혹시라도 실프를 뺏어 가면 어떡해.’

로제타에게 실프는 지난 15년간 가족이자 친구였기에 더욱 애착이 컸다.

‘물론 실프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로제타는 외로우면 실프를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정령과 인간의 생각 구조는 좀 다른지, 로제타가 그냥 불러낼 때마다 실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도 없는데 왜 불렀어?’

‘같이 쿠키 먹자고. 이거 먹어 봐, 실프. 신전에 갔을 때 얻어 온 사과 맛 사탕이야.’

‘난 로제타의 소원을 아무것도 들어 주지 않았는데?’

‘안 해도 같이 먹자.’

‘안 돼. 대가율이 맞지 않아!’

때론 칼 같은 실프의 거절에 상처를 받았지만, 이젠 그러려니 했다.

실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로제타 자신은 그녀를 각별하게 여겼다.

끊어지지 않는 끈 같은, 뭐 그런 거랄까.

그리고 기본적으로 하급 정령일수록 힘이 부족하기에 인간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큰 부담이 된다고 책에서 봤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그저 함께 있어 달라, 무엇을 같이 먹자 같은 별것 아닌 용무로는 실프를 부르지 않았다.

클리프가의 모자를 골탕 먹일 때도 되도록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게 했다.

그건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로제타는 거짓말을 한 것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테런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턱을 살짝 아래로 당기며 잘근 아랫입술을 씹었다.

테런이 제발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하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걸까.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제가 별 실없는 질문을 다 했군요…….”

다행히 테런은 더 묻지 않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 짧은 새 소란함을 다스린 모양인지, 평온한 얼굴이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닙니다.”

로제타는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테런은 입술에 한번 힘을 주어 길게 늘이더니, 로제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한 그의 행동에 로제타가 깜짝 놀랐다.

“공작님? 왜 이러세요?”

“제 여동생을 진심으로 아껴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원래 좀 허약한 아이라 수도에서 살 적엔 외출도 쉽지 않았지요. 한데 클라리사가 보내온 편지를 읽자니, 영애께서 그 아이를 데리고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녀 주신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저도 즐거운 산책이었지요.”

로제타의 말은 클라리사를 대한 그 모든 순간이 그저 일로써 함께한 것이 아니라, 저 역시 그 시간을 함께 즐겼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테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생이 보내 주는 편지엔 항상 영애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오라비인 저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그 우선순위가 바뀐 것도 같아 조금은 샘도 났었죠. 그래서 항상 궁금했습니다. 클라리사의 좋은 친구가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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