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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26화 (26/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6화

테런의 그윽한 시선에 로제타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비록 나이는 헷갈리셨지만요.”

로제타가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하자 테런도 따라서 피식 웃고 말았다.

“동생의 좋은 친구께 조만간 답례하도록 하죠.”

그 순간 로제타가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는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은 이미 사 오셨다고 하셨지 않나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거리가 가까워 본의 아니게 두 분의 대화를 들었거든요.”

테런의 입에서 ‘아…….’ 하는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로제타가 인형과 오르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까닭이었다.

테런은 민망한 듯, 콧잔등을 살짝 긁으며 입술을 떼었다.

“드려도 됩니까?”

“주신다면 기꺼이요.”

테런이 씩 입꼬리를 늘이며,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이따 가지고 가겠습니다.”

“어떤 인형을 골라 오셨을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네요.”

“큰 기대는 마십시오. 워낙 센스가 없는 남자라.”

“대신 따듯함이 있으시죠.”

로제타가 웃자, 테런이 따라 미소 지었다.

한데 딱 거기까지 말하고 대화가 어중간하게 끊겼다.

방금 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두 남녀 사이에 고였다.

로제타가 입술을 말아 물고 ‘음…….’ 하는 소리를 잠시 내며 눈을 굴렸다.

도저히 새로 대화를 이어 갈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공작님, 그럼…….”

“편히 말씀하십시오.”

“우선은 저도 좀 방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뵐게요.”

“그렇게 하시죠.”

테런이 로제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에 답하듯 로제타 역시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자신도 서둘러 씻고 싶은 부위가 있었다.

‘찜찜해! 무릎 찜찜해!’

제 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매우 빨랐다.

* * *

로제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테런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돌아섰다.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에스테스 파크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방으로 걸어갔다.

식사를 하는 동안 콜린이 사용인들에게 지시해 두었는지, 방 안에는 훈기가 가득했다.

테런은 재킷과 크로스오버 타이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불은 일부러 켜지 않았다.

빨리 씻고 다시 클라리사의 방으로 건너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방 안. 테런의 입술에서 또 한 번 거친 한숨이 가르고 튀어나왔다.

“조금만 더 같이 있었더라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실없이 웃었다.

정말 웃겨서 웃은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묵직한 마음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테런은 커다란 제 손으로 얼굴을 반쯤 덮었다.

“후우.”

자꾸만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로제타와 함께 있을 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이, 한순간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모조리 무너지는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심장이 떨어져 내려앉는 줄 알았지.”

테런이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라니.

하필이면 윌셔스 왕국에서는 극히 드문 머리 색이라 마음이 더 덜컹했다.

“파스트라의 피가 섞였나?”

파스트라는 먼 서쪽 땅, 윌셔스 왕국민들이 흔히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사막 국가에 사는 민족이었다.

더운 나라이다 보니, 윌셔스에 비해 옷차림이 비교적 가벼웠고 노출이 있었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윌셔스의 국민들은 살을 내보이는 것을 천박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파스트라는 좌식 생활을 하기에, 의자를 이용하는 윌셔스의 사람들은 바닥에 앉는 것 또한 미개하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 영애는 아마도 사생아겠지. 용케도 입적했군.”

윌셔스 왕국의 귀족 중에서 저 머리 색을 가진 가문은 딱 하나밖에 없었기에, 자연히 파스트라의 피가 ‘섞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앵지트 후작과 가스텔 영식에게 봉변을 당하는 로제타의 모습, 아니,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빈정거리는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녀가 그 아이와 겹쳐 보여서.

정말 우습게도, ‘감히’ 누굴 건드리냐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오늘 부쩍 감상적이군.”

쓸쓸하게 중얼거리던 테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얼굴이 짧은 새 부쩍 더 피로해 보였다.

아까 정원에서 바람의 정령이 날아다닐 때마다 떨어지는 빛 가루를 보았다.

익숙한 것이었다.

바람의 힘을 다루는 자신의 주변에는 언제나 떠다니는 것이니까.

정원에서 그 빛 가루를 보았을 때만 해도 신수인 ‘피르’가 제 허락도 맡지 않고 인간계에 나왔다고 생각했다.

최상급 정령부터는 소환자가 부르지 않더라도 제 의지대로 인간계에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수도에서도 그 빛 가루는 항상 테런의 주위에서 포슬포슬 내렸다.

갑갑한 것을 싫어하는 피르가 종종 인간계로 나와 제 곁에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게는 흔한 그 빛 가루가, 오늘 유독 그 마음을 건드리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붉은 머리와 빛 가루.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도, 나름 유기적인…… 오로지 테런만을 위한 추억의 암호.

“차라리 어두웠을 때가 나았지.”

정원에선 그나마 어둠이 그녀의 머리 색을 감춰 주었다.

하지만 환한 실내로 들어와 다시 그녀를 지척에서 보았을 땐, 그야말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식사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 붉은 머리에 시선이 가려 하는 것을 단속하느라 진이 빠졌다.

“머저리 같으니.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정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그는 자조했다.

테런의 깊은 한숨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침음이었다.

그는 방에서 나와 아무도 오가지 않는 복도에 서서 그렇게 한참을 눈 감고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테런이 심란한 속을 애써 삼켜 내고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진정한 머리와 달리, 그의 손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해.”

권태에 찌든 듯한 지독한 말과 달리, 테런의 목소리는 아련함을 품고 있었다.

제 손이 떨리는 그 모습을 무감각한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떨림을 감추려는 듯 손을 꽉 틀어 주먹 쥐었다.

“하필이면 이름도 비슷해선.”

괜한 원망이라는 것을 안다.

로제와 로제타.

둘 다 비교적 흔한 이름이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졸렬한 한마디라도 뱉어 내지 않는다면, 정말로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테런의 주먹 쥔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가 고개를 위로 젖히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른 눈이 간헐적으로 따끔거렸다.

“로제. 그만 널 잊어도 될까?”

갈수록 너무 힘들어.

진심 반 거짓 반인 말을 괜히 한번 소리 내어 본다.

그러면 제 투정을 듣고 서운함을 느낀 ‘그 아이’가, 오늘 밤 꿈에서라도 한번 찾아와 주지 않을까 하고.

3. 관계의 발아

목욕을 마친 로제타는 가운을 벗고 서둘러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욕조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전신에 훈기가 감돌았다.

혈류도 빠르게 돌고 있는 모양인지, 얼굴빛이 붉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요모조모 들여다보고 있었다.

타월로 물기를 닦아 낸다고 닦았으나 채 다 마르지 않은 붉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와 등허리에 닿아 옷을 살짝 적시고 있었다.

물기가 닿은 부분이 반투명하게 되어 속살이 비쳤다.

“이걸 어쩌지.”

여느 때처럼 클라리사와 하녀들만 있다면 그냥 가겠다만, 오늘은 테런이 있었다.

이대로 그냥 가는 건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상당히 난감한 일이 될 것만 같았다.

“숄을 두를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핑-! 소리와 함께 실프가 나타났다.

-로제타아아아!

“실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로제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 위에 실프가 둥둥 떠 있었다.

작은 정령을 올려다보며 로제타가 물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정령은 본디 정령계에서 산다.

그중, 계약을 맺은 정령은 계약자가 자신을 소환하면 인간계에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실프는 그녀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계에 나왔다. 벌써 두 번째였다.

로제타는 진지한 눈으로 실프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령이 내놓은 대답은 그녀가 기대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왔어!

따라왔다니? 자신을 따라왔다는 소리일까?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아까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인간계에 있었던 거야?”

실프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아가씨, 아까 말씀하신 쿠키를 가져왔어요.”

만찬회가 끝날 즈음 하녀에게 부탁한 것인데, 목욕이 끝날 시간에 맞춰 가지고 온 듯했다.

로제타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고, 하얀 도자기 접시 위에 탑처럼 쌓은 쿠키를 든 하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로제타의 주위에 있던 실프는 뽀르르 날아가 하녀의 머리 주위를 빙글 빙글 맴돌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꺄아! 세상에! 어머나! 마멀레이드 쿠키! 꺄아아아아!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실프의 모습에, 로제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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