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7화
실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하녀는, 로제타가 어찌 저리 즐겁게 웃나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걷던 것도 잊고 멈춰 섰다.
“테이블 위에 놓아 줄래?”
“아! 네, 아가씨. 그럴게요.”
“고마워. 나가 봐도 좋아.”
“좋은 밤 되셔요.”
다정한 밤 인사를 서로 주고받고 난 뒤, 하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제야 로제타가 화장대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실프는 접시 위에 턱을 괴고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로제타는 저 애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지만 더 골리지 않기로 했다.
“자, 여기.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그녀는 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쿠키 중 하나를 집어 정령에게 건넸다.
-꺄아아아아! 로제타 최고야! 진짜 진짜 고마워! 새콤달콤한 마멀레이드 최고야! 꺄아아아아!
뽀르르 날아오른 실프가 로제타의 뺨에 연속으로 쪽, 쪽 뽀뽀를 하고는 얼른 쿠키를 건네받았다.
정령은 쿠키를 양손으로 잡은 뒤 제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는 정신없이 방 안을 날아다녔다.
행복과 기쁨에 가득 찬 탄성을 내지르는 것은 덤이었다.
-꺄아아아! 쿠키! 쿠키이!
“그렇게까지 맛있어?”
-넘모 맛있어! 넘모 맛있어어어!
입가에 쿠키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실프가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 안에 든 것을 오물거리느라 발음이 부정확했는데 그 모습이 더 귀여웠다.
“그러게, 내가 몇 개 더 챙겨 준다니까? 가져가래도 그런다.”
그 순간 실프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그러면 안 돼……. 분에 넘치는 대가를 받으면 실프, 혼나는걸.
실프는 그 좋아하는 쿠키를 먹는 것도 멈춘 채,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로제타는 파티션에 걸쳐 둔 숄을 집어 들며 물었다.
“실프, 평소에도 많이 혼나니?”
-조금……. 많이 혼나.
음, 말인즉 빈번할 정도로 많이 혼난다는 소리구나.
로제타는 웃음을 참으며 어깨에 커다란 숄을 둘렀다.
“어서 마저 먹어.”
로제타의 제안에 실프가 다시금 한 입 냠, 쿠키를 베어 먹었을 때였다.
별안간 작은 몸이 움찔 떨리더니, 실프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보물 안 듯 들고 있던 쿠키는 그만 손에서 놓쳐 버려 아래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실프? 왜 그래?”
로제타가 걱정스레 묻자 실프가 정신없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로제타! 나 가 봐야 해!
“응? 벌써? 쿠키는 어쩌고?”
-지금 쿠키가 중요한 게 아니야!
로제타의 정신까지 쏙 빼놓을 기세로 난리 법석을 떨던 실프는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퐁,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뭐람? 왜 저러는 거지, 갑자기?”
알 수 없는 실프의 행동에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키이이이이이.
그때, 어디선가 가늘고 긴 울음소리가 얼핏 들려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 소리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창문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로제타는 숄을 더욱 앞으로 여미며, 화장대 거울에 한 번 더 저를 비춰 보았다.
말끔한, 그리고 아직 붉은 기가 조금 남은 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쓱, 만져 본 뒤 곧바로 방을 나섰다.
클라리사의 방은 바로 옆이었다.
들어가기 전 가벼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자신이 제일 늦게 온 모양인지 이미 침대 위에는 클라리사가 가슴팍까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고, 테런은 그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실례합니다.”
“아, 영애. 들어오시죠.”
테런 역시 씻고 온 모양인지,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셔츠 차림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로제타는 테런이 권하는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의자 위에 제 팔뚝만 한 갈색 테디 베어 하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이건……?”
“선물입니다. 클라리사의 친구에게 주는. 아니, 드리는.”
로제타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상체를 수그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인형을 들어 올렸다.
뽀글뽀글한 실과 천으로 만든 곰 인형은 목에 빨간 리본 하나를 멋들어지게 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공작님. 정말 마음에 들어요.”
“기꺼이 받아 주시다니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클라리사가 들뜬 목소리로 불쑥 끼어들었다.
“언니! 저도 그 인형 있어요! 이것 보세요!”
클라리사의 목소리에 로제타가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곰 인형이, 이미 클라리사의 옆자리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인형의 목에는 에스테스 공작가를 상징하는 푸른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우리처럼 짝꿍이네?”
로제타가 말한 ‘짝꿍’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지 클라리사가 까르르 웃었다.
로제타는 인형을 안은 채로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테런은 손을 뻗어 클라리사의 이마 위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지만, 몸은 노곤한지 클라리사는 작게 하품을 했다.
‘만찬회라는 큰일을 홀로 준비하고 치렀으니, 그간 쌓인 긴장이 모두 녹아내렸을 거야.’
로제타는 우애가 두터운 두 남매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자, 클라리사. 무슨 책을 읽어 줄까?”
테런은 클라리사의 침대 바로 옆에 있는 간이 책장을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그렇게 깐깐한 테스트를 거친 뒤 그에게 택해진 것들은 윌셔스 왕국에서도 아주 유명한 동화였다.
“〈노움과 이프리트〉? 아니면 〈마녀의 사과 수프〉와 〈파랑새와 비밀의 열쇠〉도 괜찮은데, 어떤 게 좋니? 클라리사.”
테런이 쭉 읊어 주는 책 제목을 듣고 있던 클라리사가 새침을 떨었다.
“아유, 오라버니도 참.”
그녀는 볼에 바람을 넣고 부풀리더니, 이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전 요새 그런 거 안 읽어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라는 듯 테런이 두 눈을 끔뻑였다.
“그러면?”
“이런 걸 읽죠.”
클라리사가 팔짱을 풀더니 냉큼 몸을 돌렸다.
그런 뒤 침대 시트 사이에 숨겨 둔 책 몇 권을 냉큼 꺼내어 착, 착, 착 테런의 앞에 한 권씩 내려놓았다.
테런은 클라리사가 제 앞에 늘어놓은 세 권의 책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책 제목을 읽어 보던 그가 갑자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손등으로 몇 번 훔치기까지 했다.
“아, 왜 이렇게 눈이 침침하지?”
하지만 그렇게 눈을 닦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 비치는 책의 제목들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테런이 복잡한 마음으로 클라리사가 내민 책들을 하나로 포개어 들어 올렸다. 그런 뒤 맨 앞에 있는 책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101가지 기술〉.”
그리고 다음 권.
“〈내탕금 쪼개는 방법〉.”
마지막 한 권.
“〈세상에 왕자는 없다〉……?”
테런은 책을 든 손을 내렸다.
아니, 툭, 떨어졌다가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그중에서 오라버니가 마음에 드는 책, 아무거나 읽어 주세요!”
클라리사는 선심 써서 책 선택권을 넘겨준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과연 어떤 책을 고를까, 기대하는 초롱초롱한 어린 동생의 눈빛을 피하며, 테런은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클라리사가 책을 꺼냈을 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을, 로제타를 향해 되도록 담담하게 물었다.
“클리프 영애. 이게 다 뭡니까?”
그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저, 그게 말이지요…….”
로제타가 눈을 굴렸다.
하지만 마땅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음…… 책이지요.”
“그래요. 책이죠.”
테런은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음. 제가 구체적으로 질문을 드리지 않았군요.”
테런은 잠시 말을 골랐다.
“클라리사가 밤에 어째서 동화가 아닌, 이런 실용서? 음. 실용서라고 해도 좋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일반서를 읽고 있습니까?”
로제타는 난감했다.
모두 자신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 책이 왜 클라리사에게 있느냐.
로제타의 방에 놀러 온 클라리사가 ‘언니는 평소에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요!’ 하면서 책장 탐험을 하였고, 책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저 세 권을 골라 빌려 갔다.
「언니는 정말! 이렇게 멋지고 어려운 책까지 읽으시는군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훌륭한 분이세요!」
그때 저를 우러러보던 클라리사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저 책들을 산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101가지 방법〉은 이시크와 남작 부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다 못해 잘근잘근 밟아서 다져 버리고 싶다는 마음에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산 책이었다.
〈내탕금 쪼개는 방법〉은 클리프 남작가에서 도망칠 비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산 것이었고…….
‘그리고…….’
로제타는 테런이 손에 쥔 책 중,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슬쩍 보았다.
〈세상에 왕자는 없다〉.
이건 뭐 그냥, 솔직히 제목이 멋져 보여서 샀을 뿐이었다.
‘음, 셋 중에서 왜 저 책을 샀는지 제대로 설명해 드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네? 이걸 어쩌지?’
테런의 입장에선 황당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그가 보이는 반응이 이해는 갔다. 섭섭하지도 않았다.
고작 여덟 살짜리에게 잠자리 독서로 읽어 주기엔 셋 다 적합하진 않았으니까.
테런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로제타의 눈앞이 캄캄하던 그때, 클라리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지금 로제타 언니에게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