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쁜 애 옆에 예쁜 애-28화 (28/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8화

뿔이 난 클라리사의 목소리에 테런이 곧바로 부정했다.

여동생의 심기를 건드려 봤자 제게 득 될 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그저 이게 무엇인지 물어봤을 뿐이란다.”

“언니는 말렸어요! 하지만 제가 고집을 부려서 언니의 책장에서 무단으로 빌려 온 것이라고요!”

“네가?”

“네!”

클라리사가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저는 에스테스 공녀인걸요! 안주인인 공작 부인이 부재하시는 동안 제가 가문을 관리해야 하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더는 동화책을 읽을 나이가 아니기도 하구요!”

“아…….”

테런이 깊은 탄식을 흘렸다.

지금 처음으로, 여태 미혼으로 산 게 잘못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혼자인 것을 고수하는 게, 이 작은 아이의 어깨에 짐을 얹어 주는 꼴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클라리사가 무리해서 어른이 되려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에, 테런은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카밀라 대부인에게 에스테스 공작가에 ‘안주인’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역설을 들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마음이 흔들렸다.

테런은 씁쓸한 티를 애써 감추며 다정스레 물었다.

“클라리사. 그럼 오라비가 결혼하면, 그 뒤부턴 동화책을 읽을 거니?”

클라리사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내보이다가 슬쩍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동화책은 재미가 없는걸요.”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 줘 보렴.”

“……알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 실용서들 말고, 이 책을 읽자.”

테런은 클라리사가 꺼낸 책들을 하나로 모아 로제타에게 건네주었다.

로제타는 서둘러 그가 내민 세 권의 책을 받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테런이 고른 동화는 〈파랑새와 비밀의 열쇠〉였다.

이 이야기는 에스테스 공작가의 신수 ‘피르’와 관련된 전설을 동화로 각색한 것으로, 왕국민의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파랑새는 오랜 시간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열쇠를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은 웃음을 잃어버린 소녀가 들고 있던 낡고 작은 보물상자의 자물쇠에 꼭 맞았습니다. 열쇠를 꽂고 돌리자 상자는 열렸고, 소녀는 그 안에 숨겨 두었던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파랑새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지막 구절을 읽은 테런이 조용히 책장을 덮었다.

클라리사의 두 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클라리…….”

“쉿!”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였다.

클라리사를 부르려던 테런은 그 소리에 서둘러 입술을 닫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제타가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그에게 속삭였다.

“깨우시면 안 돼요.”

테런은 알았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께서 깨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세요.”

“알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로제타가 테런에게서 동화책을 건네받았다.

“고맙습니다.”

테런 역시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한 뒤 천천히 몸을 숙였다.

오동통한 클라리사의 뺨에 가볍게 굿나잇 키스를 남긴 그가 조심스럽게 상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사이 로제타는 동화책을 책장에 다시 꽂아 놓고, 가지고 나갈 간이 촛대에 불을 옮겼다.

그런 뒤 클라리사의 방을 밝히고 있는 촛불들을 하나씩 끄기 시작했다. 물론 뒤꿈치를 들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으면서.

“공작님, 저흰 이만 나가도 될 것 같아요.”

“그러시죠.”

테런은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슬쩍 뒤로 빼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신중을 기한 탓일까? 순간 몸의 균형을 잃었다.

동생의 작은 몸 위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테런이 반사적으로 한쪽 팔로 침대 위를 짚었다.

그 바람에 침대가 출렁였다.

“우웅.”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클라리사가 뒤척이는 소리를 내더니, 이불 속에서 왼팔을 쑥 꺼내 눈두덩을 비볐다.

테런과 로제타의 표정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쳤다.

“우우웅.”

그냥 그대로 다시 잠들면 좋으련만. 클라리사는 기어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런 뒤 눈을 비비던 손을 내려, 침대 위를 짚고 있는 테런의 소매를 가만히 꼭 잡았다.

“오라버니.”

잠에 취한 목소리는 웅얼거리며 테런을 불렀다.

클라리사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반쯤 올라왔다.

눈꺼풀이 제법 무거운 모양인지, 그 이상은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테런과 똑 닮은 피콕블루색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다른 책도…… 읽어 주세요…….”

피곤해서 푹 자고 싶으면서도, 클라리사는 떼를 썼다.

테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로제타를 건너다보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권 더 읽어 줘야 합니까?”

그러자 로제타가 피식 웃고는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잠시만요.”

테런은 로제타가 클라리사를 보기 쉽도록 조금 비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로제타가 허리를 숙이자 테런의 눈앞에, 붉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테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로제타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침대에 누운 클라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클라리사. 이제 잘 시간이야. 다른 책은 내일 밤, 낭독회에서 읽도록 하자.”

“하지만…… 잠들면…… 오라버니가…… 가 버리는데에…….”

아하. 그러니까, 테런이 갈까 봐 이렇게 고집을 부려 억지로 깨어 있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부드럽게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런 뒤 허리를 더욱 낮추고는 클라리사의 귀에 대고 큰 비밀을 말해 준다는 듯 속삭였다.

하지만 목소리에 공기만 조금 섞였을 뿐, 음성의 크기 자체는 테런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걱정하지 말렴. 공작님은 내일도 에스테스 파크에 계실 거란다. 그러니 안심하고 푹 자도 돼.”

“정말, 요오……?”

“그럼 정말이지. 그렇죠, 공작님?”

로제타가 어서 대답하라는 듯 테런을 돌아보며 클라리사의 질문에 대꾸했다.

테런은 또다시 멍하니 로제타를 바라보고 있느라 대답할 틈을 놓쳤다.

“오라버니이…….”

로제타가 황급히 팔을 뻗어 테런의 손을 툭 잡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럼. 오라비는 내일도 있을 거란다. 아까 손가락 걸고 약속도 한 거, 기억나지 클라리사?”

클라리사의 눈꺼풀이 3분의 1만 남고 도로 감겼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졸린 목소리로 거듭 당부했다.

“가시면 안 돼요오.”

“물론이야.”

그제야 안심한 듯 클라리사가 완전히 눈을 감으며 옆에 놓인 곰 인형을 끌어안았다.

로제타는 그런 클라리사를 따뜻하게 바라보다가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럼. 내일 또 보자, 클라리사.”

곧바로 깊은 잠에 빠진 듯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제타와 테런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고생했습니다, 영애.”

“별말씀을요.”

로제타가 수줍게 웃다가 이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듯 잠시 망설였다.

혹시라도 다시 클라리사가 깰까 봐 목소리는 잔뜩 낮춘 채, 그녀가 쭈뼛대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아까 전에 공녀님께 말을 낮춘 것은…….”

테런은 개의치 않으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동생이 보내온 편지에, 사적인 자리에선 서로 말을 편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읽었으니까요.”

“그게…… 죄송합니다.”

로제타가 민망해하며 사과하자 테런이 나지막이 웃었다.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그러니 해 오셨던 대로 사적인 자리에선 예전처럼 하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제가 동석한 자리에서도 그렇고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클라리사의 방을 나선 두 사람이 가만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때.

키이이이이.

창밖에서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돌아갔다.

아주 희미해, 언뜻 바람이 부는 것 같았지만 분명 다른 소리였다.

키이이이이.

그사이 또 한 번 긴 울음이 들려왔다.

어쩐지 청아하고 맑은 그 소리에, 로제타는 홀린 듯이 테런의 옆을 벗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가 섰다.

바깥을 내다본 그녀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로제타의 초록빛 눈에 놀람과 경탄의 빛이 어렸다.

한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린 그녀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것도 잊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와, 진짜 크다…….”

집채만 한 크기의 푸른 새 한 마리가 에스테스 파크 한가운데 서 있었다.

새가 저 큰 몸뚱이를 움직이며 걷고 있음에도 쿵, 쿵 지반이 울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푸른 새는 정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원수의 꼭대기에 난 잎을 야금야금 부리로 쪼아 떼어 먹고 있었다.

“저놈이 또……! 내일 아침 정원사가 또 뭐라고 하겠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테런의 골치 아프다는 목소리에, 그제야 로제타가 옆을 돌아보며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자신과 테런의 거리가 상당히 가깝다는 생각이 들자 슬쩍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기척에 테런이 푸른 새에게서 시선을 떼고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로제타는 뭔가 멋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귓바퀴가 어느새 붉게 달아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