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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29화 (29/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29화

테런은 뒷짐을 지며 반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가끔 말을 안 듣습니다.”

“예?”

“저 아이, 피르 말입니다.”

테런이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피르……. 아! 그 에스테스 공작가의 신수 말씀이시군요.”

로제타가 다시 푸른 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새의 깃털 색깔이 테런과 클라리사의 눈동자 색인 피콕 블루와 닮아 있었다.

“신수가 저렇게 생겼었군요…….”

오늘 밤, 달이 높게 뜨고 하늘에 구름도 한 점 없이 맑아서 신수 피르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저 푸른 새의 정체에 대해서 듣고 나니 그제야 새의 가장자리가 투명해, 그 뒤의 풍경이 어스름히 비치고 있다는 것도 보였다.

“크기만 남다른 게 아니라, 정말 영물이네요.”

로제타는 저 신기한 동물을 머릿속에 영영 기억해 두고 싶었다.

그래서 피르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물음을 건넸다.

테런만 의식하고 있을 때보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혹, 공작님께서 불러내신 건가요?”

테런이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민망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 녀석이 가끔 엇나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지금처럼 제게 말도 없이 인간계에 놀러 나옵니다.”

“놀러 나온다고요? 인간계에서 그럼 무엇을 하는데요?”

“저렇게 나뭇잎을 뜯어 먹습니다. 때로는 날기도 하고요.”

로제타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피르도 개구쟁이인가 봐요.”

“……‘도’?”

“아……. 저기, 그게……. 클라리사에게 읽어 주었던 동화책에서 봤는데, 실프라는 하급 정령이 장난꾸러기라고 한 게 기억이 나서요.”

로제타는 속으로 자신을 구박했다.

‘경계심을 좀 가져야지, 바보야!’

무심코 자신이 아는 실프의 모습을 생각하며 빗대어 말했다. 명백한 실수였다.

‘난 정말 바보, 멍청이, 덜렁이야.’

행여라도 그가 제게서 이상함을 느꼈을까 걱정이 되어 로제타는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 테런은 그 어설픈 말을 믿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반적인 정령은 사람들이 보지 못합니다. 힘이 약하니까요. 피르는 아니죠. 저 녀석은 최상위 정령이라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모습을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를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지금처럼 ‘안 보이는’ 상태로 나오죠.”

“정말요? 정말 지금이 ‘안 보이는’ 상태라구요? 하지만 저는 저렇게 잘 보이는데…….”

“‘보통’은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그 뜻인즉 물론 예외도 있다는 소리죠. 감이 좋은 사람은 정령을 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의 영애처럼.”

“감이요?”

“네. 쉽게 말해서 정령과 동화가 잘 되는 그런 체질을 타고 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이들은 대개 영혼이 맑더군요.”

로제타가 멍한 표정으로 테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슬그머니 달아오르는 열에 어색하게 하하하, 웃으며 손 부채질로 얼굴을 식혔다.

“클라리사로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칭찬을 한 번씩은 다 들어 본 것 같은데, 이건 또 색다르고 쑥스러운 칭찬이네요.”

말은 그러면서도 듣기 싫은 칭찬은 아닌 모양인지 입꼬리와 광대가 한껏 위로 올라가 있었다.

“최초의 에스테스의 선대께서 이 대지 위에서 피르와 맹약을 맺었습니다. 그 터 위에 에스테스 파크를 지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곳은 어떻게 보면 에스테스 공작가의 힘의 정수가 모인 곳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다른 곳보다 더 저 녀석의 모습이 훨씬 더 잘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요.”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그때 나뭇잎을 열심히 뜯어 먹고 있던 피르의 시선이 테런과 로제타가 서 있는 창문 쪽을 향했다.

‘날…… 보고 있어?’

로제타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에게로 향한 피르의 시선이 너무도 곧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피르가 저를 뚫어 버릴 듯 쳐다보는 것에 너무도 놀라, 몸이 조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신수는 일반적인 동물과는 다르잖아. 아마 그래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 거야.’

로제타는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피르가 자신의 계약자와 그 옆에 있는 로제타를 보고 ‘키이이이이.’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울었다.

“와, 듣기 좋다…….”

로제타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테런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가까이 가서 보시겠습니까?”

로제타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테런을 돌아보았다.

“정말요?”

“영애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렇다면…….”

로제타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테런은 그런 그녀의 행동이 이상해 되물었다.

“무슨,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로제타가 테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걸리는 점이라기보단 공작님께 허락을 맡고 싶어서요. 혹시 새로 사귄 친구도 함께 피르를 보러 가도 되나요?”

“친구?”

테런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되묻자, 로제타가 들고 있던 테디 베어의 한 팔을 들고 인사하듯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런 뒤 살짝 목소리를 바꾸어…….

“안녕하세요?”

짓궂은 그녀의 흉내에 테런은 그만 무장해제된 것처럼 웃고 말았다.

“같이 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친구분도 기꺼이 함께 초대하지요.”

아무도 오가지 않는 복도는 제법 어두웠으나, 희한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로제타와 테런의 웃음이 정말로 환했기 때문이었다.

* * *

로제타는 테런의 에스코트를 받아 정원으로 나왔다.

피르는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마치 두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아래에서 바라본 피르는 정말, 너무나도 컸다.

로제타는 두 손을 모아 제 입가를 가렸다. 그녀의 목이 끝도 없이 위로 젖혀졌다.

“세상에…….”

푸르고 고요한 밤.

정갈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신수는 보름달을 등지고, 쏟아지는 달빛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은은하고,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깃털은 보면 볼수록 매혹되었다.

키이이이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계곡과 계곡 사이를, 탁 트인 드넓은 평원을 막힘 없이 신나게 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원하고 맑다는 느낌을 주었다.

로제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현실이 아니라 꿈속의 어딘가, 혹은 정령계에 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로제타는 마치 홀린 듯, 점점 피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테런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보통은 피르를 보면 무서워하던데. 참 여러모로 특이한 여자군.’

그때 한없이 앞으로 다가가던 로제타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테런이 서 있는 쪽으로 반쯤 몸을 돌리고는 물음을 건넸다.

“만져 봐도 되나요?”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는 이미 기대와 흥분이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테런의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만질 기세로 오른팔은 이미 살짝 반쯤 뻗어진 상태였다.

그런 로제타의 모습에 테런은 가까스로 웃음을 삼켰다.

헛기침으로 짧게 목을 가다듬은 그가, 별안간 뒷짐을 지고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뭅니다.”

“네? 물…… 어요?”

앞으로 뻗어 나가 있던 그녀의 손이 끝에서부터 오므라지듯 말린다.

“진짜요?”

그녀가 놀란 토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테런은 결국 더 참지 못했다.

그는 무서운 얼굴을 풀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좋은 나직한 목소리가 잔잔히 공기를 흔들어, 로제타의 심장을 흔들었다.

“농담입니다.”

웃음을 멈춘 그가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로제타의 곁에 천천히 다가왔

“하지만 저는 물렸죠. 그것도 꽤 여러 번.”

그때 피르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키이이이이.’ 하고 길게 울었다. 테런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사뭇 냉랭했다.

테런은 저것 보라는 듯 로제타에게 눈짓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저 눈빛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저런 눈빛을 하고 있으면 사람 정수리를 콕콕콕콕 하고 쪼아 버립니다. 주로 저를요.”

마치 일러바치는 투였다.

로제타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실례되지 않을 만한 말을 고르고 골랐다.

“생각보다 신수와 사이가…….”

“뭐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테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때, 피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지 피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타이밍상, 테런이 한 말에 기가 차서 흘리는 한숨인 것만 같았다.

“그럼 공작님, 피르가 다른 사람은 안 무는 거죠……?”

“음, 네, 뭐. 최근에 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에라는 단서가 붙으면 물긴 문다는 거잖아!

로제타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테런이 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피르.”

나직하고 조용한 부름이었으나, 신수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머리를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테런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듯 천천히 배를 깔고 앉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얼굴마저 바닥에 납작하게 대기까지 했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피르의 얼굴이 제 옆에 천천히 눕자, 로제타는 긴장하며 숨을 멈췄다.

하지만 겁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의사를 표현하기라도 하듯,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에 뒤늦게 안심이 됐다.

그때 테런이 말했다.

“만져 보십시오.”

“……정말 안 물죠?”

당장이라도 만지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리면서도 로제타는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테런은 짓궂게 굴었다.

“만져 보시면 알겠죠?”

“짓궂으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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