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1화
‘가슴이 왜 이러지?’
그녀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호흡을 멈췄다.
테런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마치, 그에게 폭, 안겨 있는 모양새도 그녀를 당황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좋은 향기…….’
테런에게서 풍겨 오는 향에, 로제타는 왠지 조금 멍한 기분이 들었다.
향수와는 결이 달랐다.
희한하게도 꼭 산속에 와 있는 것처럼 청량한 향기가 그녀의 주위를 감돌았다.
“영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직한 테런의 부름에, 그제야 로제타는 제정신이 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서둘러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 손을 테런의 가슴팍 위에, 손끝만 대듯이 가만히 대고는 살짝 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괜찮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자, 그 말뜻을 알아들은 테런이 너무도 순순히 품 안에서 그녀를 풀어 주었다.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담담한 목소리.
로제타는 이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것은 오로지 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조금 민망했다.
“공작님께서 잡아 주신 덕분이지요.”
잠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던 로제타가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조금 민망하네요. 너무 철없는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요.”
“자유로워 보여서 좋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서너 걸음 정도의 거리가 벌어졌다.
테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제타의 시선도 덩달아 위로 올라갔다.
하늘 위로 솟구쳤던 피르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박아 놓은 것만 같이 별이 총총히 빛나는 푸른 밤하늘만 시야에 가득 찼다.
그때,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테런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은 바로 빛 가루였다.
하지만 빛 가루는 마치 눈처럼, 체온에 녹기라도 하듯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런이 빈손을 주먹 쥐며 다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피르도 정령계로 돌아간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왠지 모를 아쉬움이 짙게 남자 로제타는 괜히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광경들이, 마치 한순간의 꿈인 듯 모두 사라져 있었다.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겠지요?”
별 기대도 없이 물은 질문이었다.
“물론입니다.”
테런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로제타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테런은 그런 그녀를 정면에서 바라보다,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들어갈까요. 밤공기가 찹니다.”
하지만 로제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공작님 먼저 들어가세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테런이 어째서냐는 듯 다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달이 환한 덕분인지, 이 밤에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양 볼이 아직 발갛게 달아올라 있음을.
로제타는 들뜨고 흥분한 듯, 조금 높아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산책하면서 조금, 열을 식혀 볼까 해요. 오늘 밤이 너무 꿈만 같아서, 금방 잠자리에 드는 일이 무척이나 아쉽고 또 아쉬워서요.”
“그럼 동행하겠습니다.”
로제타가 당황한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올려 바로 내저었다.
“아뇨! 그런 수고를 끼칠 순 없어요. 수도에서 내려오시느라 피곤하시기도 하잖아요.”
테런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오늘 밤 달빛이 좋아 놓치면 두고 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약 체질도 아니고 말이죠.”
로제타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저 역시 산책하고 싶다는 핑계를 일부러 대어 주자, 그녀가 수줍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배려에 감사드려요.”
테런이 그녀를 향해 오른쪽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겠다는 의미였다.
“잡으시죠.”
로제타는 주저하다가 살짝, 손끝만 그의 팔뚝 위에 올렸다.
“제가 불편하십니까?”
“그런 게 아니고…….”
로제타가 부끄럽다는 듯 말을 살짝 흐리다가 이었다.
“사실 제가 에스코트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 그럴 기회가 이때껏 없었거든요.”
결혼 적령기의 미혼 영애가 에스코트 받는 게 익숙하지 않다?
어떤 뜻으로 한 말일까.
테런은 잠시 곁눈질로 로제타의 표정을 살폈다.
애써 담담한 척하지만, 그 이면에 어린 감정이 씁쓸함이라는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되었다.
랭우드 후작가를 제외한 모든 붉은 머리는 윌셔스에서 그런 존재였다.
‘부정함’과 ‘천박함’의 산물.
사실 로제타의 경우 클리프 남작 부부 아래로 입적한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빨간 머리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아마 사교계 데뷔도 시켜 주지 않았겠지.’
그러니 에스코트를 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미혼 여성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솔직하기가 쉽지 않은데.’
보통은 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허세를 떨거나 익숙한 척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는 여러 의미로 로제타가 아까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런은 로제타가 조금이라도 덜 민망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짝 돌려 말했다.
“그저 어두워 넘어지실까 봐 잡아드리는 것뿐입니다.”
그 말에 로제타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생뚱맞은 대답을 했다.
“아! 오해 안 해요!”
테런은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싶었다.
로제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진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웃는 얼굴로 말을 덧붙여 설명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에스코트, 그냥 제게 호의를 보여 주시는 거잖아요. 잘 알고 있어요. 절대 공작님의 호의를 호감으로 착각하지 않는답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
테런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리 많이 티 나진 않았지만, 살짝 뚱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테런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로제타는 해맑은 목소리로 질문을 건네 왔다.
“그런데 공작님. 내일은 뭐 하실 예정이신가요?”
“쉬러 온 것이니만큼 딱히 정한 건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함께 피크닉 가시지 않을래요?”
“피크닉 말씀입니까?”
“네. 만찬회가 끝나면 클라리사와 에스테스 파크 뒤에 호숫가로 나들이를 가기로 오래전부터 약속했거든요.”
음. 테런이 짧게 말을 골랐다.
그 모습을 기꺼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로제타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피곤하시면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그저 함께하시면 클라리사가 조금 더 좋아할 것 같아서요.”
생각을 마친 테런이 입술을 길게 늘이고는 대답 대신 물음을 던졌다.
“나룻배도 탑니까?”
“네? 나룻배요?”
“클라리사가 보내온 편지에, 클리프 영애가 열심히 노를 저었으나, 호수 한가운데서 힘이 빠져 돌아가지 못하고 구조되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나서 말입니다.”
“그 아이, 참 별 이야기를 다 했네요.”
로제타가 민망한 듯이 웃음을 흘리고는, 이내 선심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피크닉에 오신다면, 좋아요. 제가 또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노질을 해 보겠어요.”
“그것참, 기대되는군요.”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꽤 많은 대화를 긴 시간 나눴다.
깊은 줄만 알았던 밤이 속절없이 흘러 끝나가는 것도 모르고.
* * *
클리프 남작 부인은 성난 표정으로 쿵, 쿵 발을 굴리며 걸었다.
“악! 아프다고!”
그녀의 표정은 마치 마귀처럼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야이 씨, 이 돌팔이야! 살살하라고!”
이시크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운 소리가 더욱 심해졌다.
차라리 아까 실려 들어왔을 때처럼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신음만 흘리는 게 훨씬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적어도 신경질은 덜 났으리라.
문을 닫아 놓은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제 성질대로 마구 내지르는 이시크의 목소리에 남작 부인은 더욱 화가 뻗쳤다.
“이시크! 시끄럽다! 목소리 낮추지 못하겠니?”
남작 부인은 노크도 생략하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갑작스런 남작 부인의 등장에 바지를 벗고 카우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치료를 받고 있던 이시크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어머니, 좀!”
그는 재빨리 오른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담요를 끌어와 제 하체를 덮었다.
“멍청한 놈. 머저리 같은 놈. 이 등신아!”
남작 부인이 체면도 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설을 지껄였다.
“로제타 그것의 머리채를 끌고 돌아오겠다더니, 그년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혼절까지 해서 공작가 시종들에게 업혀 와?”
돌아올 적에 창백한 얼굴로 신음만 흘리던 놈이, 어느새 살아나 기세 좋게 마구잡이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 그 얘기는 그만 좀 하십시오!”
“창피한 줄은 아니? 으이구, 이 화상아. 어찌 갈수록 네 아버지의 못난 점만 그리 쏙 빼닮니!”
남작 부인은 정말 마음만 같아선 저 등신 같은 아들놈의 등짝을 속이 풀릴 때까지 내려치고 싶었다.
그녀는 이스크의 방에 온 용건을 뒤늦게 밝혔다.
이곳에 오기 전, 집사로부터 건네받은 상환 독촉장을 이시크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소리 질렀다.
“또 날아왔다! 내가 진작에 노름 끊으라고 하지 않았니! 이제 대체 어쩐단 말이냐! 앵지트 후작도, 가스텔 영식도 방금 전 인편을 보내서, 아까 있었던 일이 불쾌하다며 더는 로제타를 사지 않겠다고 했다. 완전히 발을 뺐단 말이다!”
이시크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하. 그 망할 놈들이. 내가 그토록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비위를 맞춰 주었더니. 의리도 없는 자식들.”
이시크가 살벌한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이제 어찌할 거니? 네가 진 그 막대한 노름빚! 다 어쩔 셈이야! 이깟 남작위 팔아도 다 못 갚을 돈이란 말이다!”
남작 부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가, 이내 오른손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어 물기 시작했다.
“어머니. 귀 아픕니다. 소리 좀 그만 지르십시오.”
“내가 지금 속이 안 터지겠니? 이 상황에서 넌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 있단 말이냐!”
“다 방법이 있으니, 그만 열 좀 내십시오.”
“방법?”
남작 부인이 손톱을 씹다 말고 한쪽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위로 치켜들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씩, 미소 지은 이시크가 다시 제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표정을 구긴 뒤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멀쩡히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인데, 로제타 그년 때문에 다 틀어진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 그 계집에게 다시 제 분수와 위치를 깨닫게 해 주어야지요. 그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테니까요.”
이시크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감히 제 고간을 두 번이나 걷어찬, 분수를 모르는 이복동생을 더는 참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뭐, 어쨌든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앵지트와 가스텔이 아니더라도 로제타에게 관심을 보이는 놈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호구 같고 돈 많은 놈에게 팔면 됩니다.”
“한데 로제타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올 방법이 없지 않니?”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허약하고 마른 계집 하나 머리채 잡고 끌고 오는 일이 뭐 그리 힘들고 어렵다고요.”
이시크가 살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