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2화
* * *
수도의 에스테스 공작저.
긱스는 이를 갈며 홀로 집무실에서 서류와 싸움을 하고 있었다.
테런이 도망친 지, 오늘로 나흘째.
아마도 지금쯤이면 에스테스 영지에 도착해 그토록 애틋한 여동생과 상봉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배알이 꼬였다.
“각하. 어디 한번 돌아오시기만 해 보십시오. 제가 기필코 각하를…… 결재 지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후, 후후후.”
그는 약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스산하게 웃었다.
긱스는 제 부하들이 1차로 검수해 올린 보고서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빠르게 주판을 튕겼다.
“이 정신 나간 자식들. 그렇게 숫자를 유의하며 보라고 했건만. 뭘 어떻게 계산하면 500헥타르의 땅 포장 예산이 7천 골드밖에 안 된다는 거야?”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도로포장 사업에 필요한 예산을 재검했다.
부하 직원들이 있음에도 긱스가 특별히 더 바쁜 이유는 그가 중간 관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켕한 눈으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긱스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 대부인께서 여, 여기까지 어, 어쩐 일로…….”
긱스는 인사하는 것도 까먹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밀라는 긱스의 무례를 탓하지 않고, 대신 집무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꼬락서니하고는.”
그 신경질적인 소리에 긱스는 쭈그러들었다.
“뭘 그리 멀뚱하게 서 있기만 하는가? 어서 환기나 좀 시키게. 공기가 탁해.”
“예! 대부인!”
카밀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긱스가 후다닥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모조리 다 열었다.
바깥에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지, 창문을 열자마자 서로 앞다투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서류들이 그 강한 기류에 휩쓸려 한데 뒤섞였고, 팔랑팔랑 날아다니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 내 서류.’
긱스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지금 저 서류들을 주워 카밀라의 시린 눈빛을 받느니, 그냥 차라리 나중에 고생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움직이지 않았다.
“자네 혼자 있는가? 테런은 어디에 있지?”
“아…….”
긱스가 말꼬리를 잠시 흐렸다.
마음속에서 두 감정이 서로 치열하게 다퉜다.
일하다 말고 도망갔다고 일러바칠까, 아니면 그래도 그간 함께해 온 정이 있으니 둘러대 줄까.
고민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각하는 나만 홀로 이 불구덩이 일 지옥 속에 내버려 두고 휴가를 가셨는데! 내가 지킬 의리가 어디 있어!’
긱스의 눈에 복수심이 이글이글 불탔다.
그는 비장하게 대부인에게 일러바쳤다.
“각하께선 영지에 내려가셨습니다. 나흘 정도 되었습니다.”
카밀라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말인즉, 날 만난 뒤 곧바로 도망갔다는 게로구먼?”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클라리사 아가씨의 얼굴을 못 본 지 오래되셨다고, 저쪽.”
긱스가 오른팔을 들어, 집무실에 난 창 중,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것을 정확히 가리키며 일러바쳤다.
“저쪽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리셨습니다.”
“멀쩡한 문 놔두고 왜 나가도 저리로 나간단 말인가?”
카밀라 대부인의 입에서 거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망할 손자놈이 기어코 도망을 쳤구나. 내, 이놈이 이럴 것 같아서 와 본 것인데.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어.”
예의와 예법을 중시하는 그녀는, 언제나 사용인들과 테런의 보좌관들 앞에서는 그를 ‘가주’라고 지칭하며 아무리 손자라 한들 그에게 말을 높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예의 따윈 전부 집어치운 것으로 보아, 적잖이 화가 났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결혼할 아가씨를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오히려 이성으로부터 더 멀어지다니.”
카밀라 대부인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짚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내가 가서 인석을 잡아 오든지 해야지.”
카밀라는 테런의 이번 도주를 ‘결혼할 여자를 찾을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100일이라는 유예 기간을 받아 간 것 역시, 시간을 질질 끌다가 그때쯤 되면 어영부영 말을 덮을 생각에서였던 듯싶었다.
카밀라는 이를 갈았다.
테런을 수도로 송환하는 즉시, 자신이 일찌감치 눈여겨보고 점찍어 두었던 괜찮은 가문의 영애들과 맞선을 보게 할 것이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고얀 놈. 아주 딴생각을 못 할 정도로 빡빡하게 일정을 잡아 맞선을 보라고 할 테다. 그럼 그 녀석도 지쳐 누구 하나는 잡고 ‘결혼하겠습니다.’라고 하겠지.”
혹시라도 제게 불똥이 튈까 가만히 있던 긱스가 슬그머니 말을 붙여 왔다.
“저기, 대부인.”
카밀라의 사늘한 눈이 긱스를 향했다.
긱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제가 각하를 모셔 와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서류를 품에 꼭 안은 긱스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수도와 영지를 오가는 일이 전혀 녹록하지는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데도 지원한 이유는…….
‘나도 집무실 밖으로 벗어나고 싶어!’
단순히 그 이유 하나였다.
‘매일 밤 촛불에 의지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 젊은 나이에 벌써 노안이 온 것같이 침침하기도 하고.’
계속 이곳에 혼자 처박혀 있는 것보단, 몸이 고달픈 게 나을 것만 같았다.
그사이 카밀라가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살짝 위로 치켜들었다.
“좋네. 긱스 라스크. 당장 에스테스 영지로 내려가 내 망할 손자놈을 끌고 오게.”
“예, 대부인. 분부 받들겠습니다.”
존중의 의미로 카밀라에게 허리를 숙이며, 긱스는 생각했다.
귀 잡아서 끌고 오면 안 되냐고.
하지만 그건 참았다.
어차피 팔은 안으로만 굽으니까.
* * *
만찬회 이튿날. 에스테스 파크는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클라리사와 로제타가 아직 기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 다 어제 큰 행사를 치른 나름의 후유증이라면 후유증으로 푹 잠들어 있었다.
사용인들도 자신들이 모시는 예쁜 아가씨들의 잠을 행여나 방해할라, 최대한 숨죽인 채 조용히 움직였다.
그래도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인지, 둘 중 클라리사가 먼저 일어났다.
“우웅.”
그녀는 하녀가 일찌감치 걷어 놓은 커튼 너머로 밝은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눈이 부셔 잠에서 깼다.
아직 덜 뜨인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제 오라비가 엊저녁 선물로 준 푸른색 리본을 단 테디 베어를 품에 꼭 안고 옆방으로 걸어갔다.
똑똑.
고사리 같은 손으로 노크를 했지만, 안은 조용했다.
“으응?”
클라리사는 여전히 졸린 얼굴로 문 앞에 서서 또 한 번 노크했다.
똑똑.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클라리사는 문손잡이를 돌려 살짝 문을 열었다.
그런 뒤 망설임 없이 로제타의 침대로 다가가 영차, 영차 그 위로 올라갔다.
“언니이.”
로제타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클라리사는 로제타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는 살살 흔들어 깨웠다.
“언니이. 일어나세요.”
“으음. 클라리사?”
그 손길에 깬 로제타가 덜 뜬 눈으로 돌아누우며 클라리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리 오늘 피크닉 가기로 했잖아요.”
“응, 아, 그래. 그랬지.”
하지만 로제타의 눈은 뜨일 줄 몰랐다.
간밤, 테런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긴 산책을 했던 터라 몸이 노곤했다.
지난밤의 로제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묘하게 들뜨고 흥분했었다.
비록 그 감정의 발로가 그것이 피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클라리사가 재촉하듯 또 한 번 로제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5분만 더 잘까, 클라리사?”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로제타가 팔을 뻗어 클라리사를 휘감듯 안았다.
그리고 힘주어 아래로 당기자 클라리사의 작은 몸이 그대로 못 이기는 척 침대 위로 풀썩 넘어졌다.
까르르, 귓가에서 터지는 웃음소리가 마치 새의 지저귐처럼 듣기 좋았다.
제 품으로 파고드는 클라리사를 더욱 꽉 안아 주며, 로제타가 다시 눈을 감았을 때였다.
“각하!”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각하, 정말 너무하십니다! 이리 좀 와 보십시오!”
울먹이며 설움을 토해 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원사 필립의 것이었다.
로제타뿐만이 아니라, 클라리사의 눈도 이미 번쩍 뜨여 있었다.
“무슨 일일까?”
“오라버니가 뭘 잘못한 걸까요?”
로제타와 클라리사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바깥의 소란은 계속됐다.
그때, 아무도 듣는 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속닥이며 먼저 제안했다.
“구경 갈까요?”
“그럴까?”
두 소녀가 짓궂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들은 미소를 띤 채 서로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에서 후닥닥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