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3화
* * *
클라리사와 로제타가 1층으로 내려오자,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같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정원사 필립은 사다리를 타고 정원수를 살펴보며 씩씩거리고 있었고, 테런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검술 연습이라도 한 건지, 간단한 셔츠 차림에 목검을 들고 있었다.
수련으로 격하게 움직여 더운 모양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셔츠 앞섶이 3분의 1가량 풀어져 있었고,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테런은 손으로 눈 앞을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그 바람에 반듯한 이마와 높은 콧대, 날카로운 턱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필립?”
정원사의 사다리 근처로 다가간 테런이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햇빛이 눈이 부신지 살짝 눈매를 찡그렸는데 그마저도 멋들어졌다.
두 여자는 일단 끼어들지 않고 현관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사다리 위에서 정원사가 꼭대기의 잎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각하! 어젯밤에 또 피르 님을 부르셨습니까?”
“난 부르지 않았네.”
“왜 자꾸 제가 세심하게 공을 들여 손질해 놓은 정원수를 뜯어 먹게 놔 두십니까!”
“내가 먹은 것도 아닌데 날 혼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럼 제가 감히 피르 님께 뭐라고 하겠습니까?”
테런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 지금 피르를 불러 주지. 직접 이야기해.”
“각하!”
하지만 정원사가 울 듯한 음성으로 소리를 높이자 테런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주의시키겠네.”
가만 보니, 테런이 일방적으로 필립에게 혼나고 있었다.
남작가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장면이라 로제타는 잠시 멍해졌다.
“공작님께서 자주 혼나시니?”
“네.”
여상한 대답이었다.
“아……. 그렇구나…… 공작님께선…….”
로제타가 잠시 말을 골랐다.
지금 저 모습을 과연 뭐라고 설명해야 좋은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음. 사용인들과 격의 없이 지내시는구나.”
그녀의 말에 클라리사가 뭘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건 비밀인데요, 언니.”
“응?”
클라리사가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이자, 로제타가 그녀의 키에 맞춰 허리를 숙이고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클라리사가 제 오라비를 한 번 슬쩍 건너다보고는 로제타에게 속닥거렸다.
“격의가 없다는 것도 맞긴 한데, 주로 오라버니가 혼나요.”
“……뭐?”
“대체로 오라버니가 뭘 잘못하는 것 같거든요.”
테런을 지극히 따르면서, 희한하게도 평가는 낮다.
그때마다 클라리사의 온도 차가 상당해 로제타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필립과 대화를 마친 테런이 현관에 나와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곧장 그쪽으로 다가온 그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잘 잤니, 클라리사? 그리고 영애. 좋은 아침입니다.”
테런이 쓰게 웃으며 로제타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공작님.”
로제타 역시 그의 인사에 화답하듯 무릎과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민망한 모습을 보였군요.”
“별말씀을요. 아랫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지내는 소탈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답니다.”
“큼. 지나치게 후한 평가는 민망합니다.”
주먹 쥔 손을 앞으로 가져와 헛기침을 한 테런의 모습에 잠시 미소 짓던 로제타는 잊고 있던 게 기억났다는 듯 클라리사를 돌아보았다.
“아 참. 클라리사. 어제 네가 일찍 자느라 미처 말하지 못했단다.”
“무엇을요?”
“오늘 피크닉에, 공작님도 함께 가시면 어떨까?”
로제타가 먼저 운을 떼자, 테런이 뒤이어 클라리사에 조르듯 말했다.
“오라버니도 초대해 주겠니?”
클라리사의 푸른 눈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응! 좋아요! 같이 가요! 얼른 준비하고 내려올게요오!”
대답하기 바쁘게 클라리사는 로제타의 손을 놓고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테런과 로제타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에스테스 파크 저택 뒤편의 호수라고는 했으나 워낙 부지가 넓어 이동하기 위해선 마차를 타야 했다.
로제타는 몇 개월 전 정원사 필립이 만들어 준 작은 수레의 마부석에 올랐다.
수레는 달구지처럼 생겼는데, 바로 앞에 작은 말 한 마리가 매어져 있었다.
호숫가로 자주 놀러 가는 로제타와 클라리사를 위해 만들어 준 간이 마차인 셈이었다.
짐칸에는 요리사가 준비해 준 샌드위치와 과일, 치즈가 든 피크닉 가방과 돗자리, 그리고 클라리사가 올라타 있었다.
“정말 두 분이서만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집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어차피 주변에 호위 기사님들께서도 함께하실 건데요. 뭘. 그리고 가깝기도 하고요.”
로제타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클라리사의 주변에는 언제나 호위 기사가 함께했다.
다만 위급 상황이 아니면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테런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어린 제 동생이 검을 착용한 기사들의 곁에서 위축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마을로 외출할 때는 모습을 드러내어 동행하지만, 이렇게 근처로 외유를 나갈 땐 호위 기사들은 대개 모습을 감추고 클라리사와 로제타를 따랐다.
“그럼 모쪼록 즐거운 피크닉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따 뵈어요.”
로제타가 짐칸을 슬쩍 돌아보고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네에!”
클라리사의 해맑은 대답에 로제타는 웃으며 하네스를 가볍게 흔들었다.
순한 말은 그 신호에 순순히 걸음을 떼었고, 이내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도 같이 가시면 좋은데.”
“곧 따라오신다고 하니 너무 아쉬워 말자.”
로제타는 테디 베어를 품에 안고 울적해하는 클라리사를 달랬다.
원래는 테런도 함께 출발하려고 했으나 수련하며 더러워진 몸을 씻느라 조금 시간이 더뎌졌다.
심지어 그사이, 가신이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고 하여 그까지 만나고 오면 출발이 더욱 지체될 것만 같았다.
이미 준비를 다 마친 클라리사는 금방이라도 출발하고 싶어 근질거리는지 몸을 들썩였다.
로제타는 아주 잠깐 고심한 끝에 자신이 먼저 클라리사를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에스테스 파크 뒷문을 막 나서자, 싱그러운 초목의 냄새가 코 끝으로 밀려 들어왔다.
‘공작님한테서도 비슷한 향이 났는데.’
무심코 생각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머. 나도 참.’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라 로제타는 고삐를 한 손으로 옮겨 쥐고, 빈 손으론 제 뺨을 지그시 눌렀다가 떼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저 앞에 있는 낮은 키의 수풀이 들썩거렸다.
‘응? 뭐지?’
이상함에 로제타는 마차를 멈추고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언니? 왜 그래요?”
“쉿. 잠시 조용히 있어 보렴, 클라리사.”
로제타가 입술 위에 검지를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누워서 돗자리로 몸을 가리고 있을래?”
“언니…….”
“괜찮을 거란다. 언니 믿지? 내가 괜찮다고 하기 전까진 절대로 몸을 일으켜선 안 돼. 약속할 수 있겠니?”
클라리사가 테디 베어를 품에 꼭 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로제타가 시킨 대로 짐칸에 누워 돗자리로 제 몸을 가렸다.
그것을 확인한 로제타가 다시 몸을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수풀이 들썩이는 곳을 바라보던 그때!
“컹!”
수풀 사이에서 불쑥 털북숭이 머리 하나가 빠져나오더니 신이 난 듯 짖었다.
“컹! 컹!”
“……어라?”
갈색과 검은색 털이 뒤섞인 커다란 개, 에어데일 테리어가 붉은 혀를 내어놓고 헥헥거리고 있었다.
“컹, 컹!”
그리고 테리어의 뒤를 이어 또 무엇인가가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으앗! 야! 잠깐만, 넘어지겠다고!”
테리어가 한 목줄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온 것은 조금 어리숙하게 생긴 남자였다.
로제타는 다시금 몸에 힘을 주며 긴장했다.
경계의 빛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고삐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누구신가요? 여긴 에스테스 공작가의 사유지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리드줄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 힘에 부치는 모양인지 휘둘리고 있었다.
“앗, 네, 아하. 이놈아 잠시만!”
로제타가 눈을 찌푸렸다.
개만큼이나 저 남자도 상당히 정신 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잠시만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그러세요.”
로제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양손으로 리드줄을 붙잡더니, 힘껏 개를 끌고 근처에 세워 둔 울타리까지 끌고 갔다.
“잠깐 좀 쉬자, 이놈아. 어휴.”
남자는 리드줄을 울타리에 칭칭 둘러 단단하게 묶었다.
그마저도 쉽지는 않아 시간이 좀 걸렸다.
개는 로제타의 무릎을 조금 넘는 크기였다.
해맑은 성격으로 보아 해치거나 위협을 하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간신히 매듭을 묶어 놓은 뒤, 남자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앉아!”
그러자 사냥개가 엉덩이를 바닥에 척 하고 붙이고 앉았다.
“잘했어.”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더니 바지 주머니를 뒤져 육포를 꺼내 개에게 주었다.
그런 뒤에야 남자는 모자를 벗고는 가슴팍에 올리며 살짝 상체를 구부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한스라고 합니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마구간 지기인 톰 아저씨의 보조로 일하고 있습니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개를 키웠던가요?”
로제타가 기억을 더듬듯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