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4화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는 여러 번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개를 직접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그 개가 짖는 소리가 에스테스 파크에서 기르는 동물이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 로제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스가 아닌 수레의 짐칸에서 들려왔다.
“토토는 오라버니의 개예요!”
클라리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몸 위에 덮었던 돗자리를 단숨에 젖히고는 반듯하게 앉았다.
어린 소녀의 눈이 반가움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토토!”
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귀여운 이름이었다.
똑똑한 녀석인 모양인가 보다.
그새 육포를 먹어 치운 토토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개는 금방이라도 클라리사에게 달려가고 싶어서 앞발까지 공중에 들어 올리며 난리 법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토토!”
“컹! 컹컹!”
“클라리사, 아는 개니?”
로제타가 물음을 건네자, 클라리사는 들뜬 표정과 목소리로 답했다.
“오라버니의 사냥개예요! 토토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예요!”
클라리사가 가슴을 쭉 펴며 으스대듯 자랑하는 투로 말했다.
로제타는 곁눈질로 한스를 살펴보았다.
그는 조금 긴장한 낯으로 손등으로 땀을 닦고 있었다.
‘호위 기사들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위험한 사람은 아닌가 보네.’
이곳까지 출입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에스테스 파크에서 일하는 사용인 중 하나라는 말도 맞을 것이다.
외부인이 허락이나 초대를 받지 않고 이곳까지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에스테스 파크 주변의 경계가 만만치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클라리사가 기대가 듬뿍 묻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언니, 토토에게 가 봐도 될까요?”
“물론이야. 오랜 친구를 만나서 기쁘겠구나.”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클라리사는 수레 짐칸에서 폴짝 하고 뛰어내렸다.
그런 뒤 도도도도 달려갔다.
“토토!”
클라리사는 덥석 개의 목을 끌어안았다.
얼른 안기고 싶어 낑낑거리던 강아지 역시 좋다는 듯 클라리사에게 제 얼굴을 치대며 혀로 볼을 살짝살짝 핥았다.
아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그 모습을 미소 지은 얼굴로 잠시 바라보던 로제타가 다시 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내내 로제타를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얼굴과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아, 저 그게…….”
한스가 뒷머리를 살짝 긁으며 뻘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토토는 나이가 많아서요. 은퇴했습니다.”
“은퇴요?”
로제타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다시 토토를 바라봤다.
개는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넘치는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힘이 아주 많이 넘치는 것 같은데요.”
“하하, 그렇지요.”
한스가 뻘쭘하게 웃었다.
그런 뒤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공녀님께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토토는 에스테스 공작님의 사냥개입니다. 그동안 잘 관리가 되어서 다른 개들에 비하면 힘이 매우 좋은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나이를 무시할 순 없어서, 더는 예전처럼 사냥감을 빠른 속도로 몰기도 힘들어했습니다. 게다가 무는 힘도 약해져 물고 먹을 따기도 힘들어졌지요. 사냥에 계속 데리고 나가면 오히려 토토가 다칠 확률이 더 커져서 재작년 가을 사냥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렇군요.”
이해했다는 듯 로제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토토는 현재 에스테스 파크에서 지내는 게 아닌가 보군요?”
“예, 저희 집에서 키우고 있습니다. 원래는 공작님과 공녀님께서 수도에서 생활하셨으니까요. 다만 활동성이 워낙 좋은 녀석이라, 공작님의 배려로 주 1회씩 호숫가 근처를 산책할 수 있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이미 아시다시피, 개가 뛰놀기 무척이나 좋은 곳이니까요.”
“동의해요.”
땅이 고르고, 지척에 수많은 꽃이 가득하다.
호기심이 많은 개가 산책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로제타와 클라리사가 매일 호수에 가는 것도 아니고 하다 보니, 아마도 그간은 마주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로제타는 한스와 토토에게로 향했던 모든 의심을 지워 냈다.
“꺄아, 토토! 간지럽다구!”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연신 토토의 뻣뻣한 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 그냥 클라리사와 로제타, 단둘이서만 피크닉을 가는 것이라면 이대로 두어도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테런을 초대하게 된 만큼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로제타가 클라리사를 불렀다.
“클라리사. 이만 가야지?”
“아…….”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클라리사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찾아들었다.
“네, 알겠어요. 언니.”
조용히 답한 클라리사가 토토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토토는 왜 클라리사가 자신을 더 쓰다듬어 주지 않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만 갸웃하며, 꼬리를 바쁘게 흔들었다.
클라리사는 토토의 목을 힘껏 끌어 안았다.
“잘 있어, 토토. 건강해야 해?”
도통 놓지 않는 동작에서 진한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로제타는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저렇게 아쉬워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잠시 고민하던 로제타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모르는 개도 아니고, 그냥 데려가면 되지 않나?’
테런도 퍽 아끼는 개일 것이다.
은퇴 후에도 사용인에게 직접 지시해 토토의 생활을 살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니 반가워하면 반가워했지, 싫어하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스.”
“예, 아가씨.”
“만약 한스가 괜찮다면, 토토를 우리가 데리고 갈까 해요.”
로제타가 양해를 구하기 위해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그 환한 미소를 마주한 한스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그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자, 로제타는 자신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 싶어 한 손으로 살짝 뺨을 만져 보기도 했다.
“한스? 그래도 괜찮을까요?”
한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로제타가 가볍게 재촉하며 물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한스가 얼이 빠진 사람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콧등에 콕콕 박힌 주근깨가 붉어진 피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예, 예. 그러십시오, 아가씨.”
그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토토를 묶어 둔 울타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재빠른 손길로 능숙하게 줄을 풀었고, 그대로 클라리사의 손에 리드줄을 넘겨주었다.
살짝 어두웠던 클라리사의 얼굴이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꺄악! 토토! 같이 놀 수 있대!”
“컹!”
“가자!”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클라리사의 모습을 보며 로제타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자, 클라리사. 이제 어서 가자. 토토도 함께 오르도록 해.”
“네!”
리드줄을 손에 꼭 쥔 클라리사가 조심스럽게 토토를 끌어당겼다.
토토는 버티지 않고 정말 너무도 순순히 클라리사를 따라 얌전히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움직이는 꼬리에서, 토토가 클라리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잘 앉았니?”
“네!”
“컹!”
클라리사와 토토가 짐칸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제가 나중에 본채로 토토를 데리러 가겠습니다.”
“고마워요.”
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준 로제타가 고삐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멈춰 서서 근처의 풀을 뜯어, 질겅질겅 씹어 먹고 있던 작은 말이 다시 말발굽을 떼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남자. 난 오늘 얼굴 처음 봤는데, 날 알고 있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로제타는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제 존재에 대해선 에스테스 파크의 사용인들에게 들었겠거니, 여긴 탓이다.
로제타와 클라리사가 탄 마차가 다시금 길을 떠났다.
그렇게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스가 애매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휴, 미치겠네.”
답답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려 제 머리카락을 벅벅 긁는 것은 덤이었다.
* * *
토토는 영리한 개였다.
한스와 둘이서 산책했을 땐 분명 혈기 왕성한 천방지축처럼 날뛰었고, 울타리에 매여 있을 때도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런데 리드줄을 클라리사가 잡자마자 금세 순해져서 마치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걷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면 클라리사가 다칠 것이라는 걸 잘 아는 듯 보였다.
“그럼 클라리사, 근처에서 놀고 있으렴. 말을 매어 놓고 금방 갈게.”
“네!”
클라리사와 토토가 내리고 난 뒤, 로제타는 풀이 많은 곳에 마차를 세워 두었다.
그런 뒤 에스테스 파크에서부터 챙겨 온 짐들을 하나씩 꺼냈다.
돗자리와 피크닉 바구니, 그리고 클라리사가 마실 사과 주스 한 병과, 테런의 몫임이 분명해 보이는 포도주도 한 병.
물건을 실을 땐 몰랐는데, 내리니 한 품 가득하였다.
“음, 생각보다 많네. 떨어트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문제는 음료들이었다.
유리병에 담겨 있다 보니 생각보다 미끄러워 여차할 경우 그대로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로제타는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그냥 여러 번 왔다 갔다 할걸.”
하지만 이제 와 내려놓기엔 거리가 상당히 애매하게 남은 터였다.
그녀는 유리병과 돗자리를 끌어안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근육에 지나치게 힘을 준 모양인지 손가락 끝이 마치 감전된 것처럼 찌르르하고 저리더니 순식간에 감각이 둔해졌다.
그리고 그때.
“으앗!”
물건을 쥔 건지 안 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둔해진 감각 탓에 로제타는 그만 병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어떡하나 싶어 서둘러 고개를 아래로 향한 그때였다.
“조심하십시오.”
불쑥 옆에서 팔이 하나 시야로 들어오더니, 떨어지던 와인병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