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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35화 (35/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5화

힘줄이 불거진, 딴딴한 팔뚝.

로제타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자신을 도와준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테런이었다.

순간 로제타는 숨을 들이켰다.

“공작님.”

바지에 셔츠 하나. 그는 편하고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계십니까?”

“여러 번 오가는 게 귀찮아서요.”

로제타가 민망한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셨군요. 잠시만 실례합니다.”

테런은 너무도 능숙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로제타가 든 물건들을 하나씩 뺏어 자신이 들기 시작했다.

“제가…… 들 수 있어요.”

“압니다.”

어떻게 들으면 무뚝뚝한 말.

하지만 로제타는 그 짧은 말속에 숨겨진 테런의 배려를 엿볼 수 있었다.

그가 물건을 하나씩 가져갈수록 로제타의 손이 비었다.

그녀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일을 반복했다.

손이 저려서인지, 아니면 민망해서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겐 버거울 정도로 많았던 짐을 테런은 너무도 가뿐히 들었다.

어느덧 로제타에겐 곱게 접힌 돗자리 하나만 남았다.

그것마저 테런이 가져가려는 듯 팔을 뻗자, 로제타는 두 손으로 돗자리를 꼭 쥐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건 제가 들게요. 아뇨, 들게 해 주세요.”

테런은 이것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듯 비장하고 결연한 로제타의 표정을 잠시 바라봤다가 이내 픽 웃었다.

그런 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테런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로제타가 따랐다.

곧 두 사람의 걸음 속도가 비슷해지더니, 나란히 걷게 되었다.

돗자리를 양팔로 꼭 끌어안은 채로 로제타가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더 오래 걸리실 줄 알았어요.”

“아.”

테런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막상 가 보니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더군요.”

그 뒤 로제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테런이 혼자 이야기를 꺼냈다.

변명 같지만, 왠지 말을 꺼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탓이다.

“가신이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네?”

로제타의 목소리가 살짝 튀었다.

“좋게 말하자면 일종의 맞선인 셈이죠.”

로제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잊으신 건가요?”

테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약속은 잡지 않습니다. 혼자다 보니 종종 이렇게 급습하듯 주위 사람들이 선 자리를 만들곤 합니다.”

“그건 제법 무례한 일 같은데요.”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비어 있는 ‘에스테스 공작 부인’이라는 위치가 얼굴에 철을 깔게 할 만큼의 어떠한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테런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속삭였다.

“사실 수도에서도 할머님께서 하도 맞선을 보라고 성화를 부리시기에 이곳으로 도망쳐 내려온 겁니다.”

그가 살짝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로제타가 슬쩍 웃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실례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테런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자조 어린 감정을 읽어 내었다.

“영애도 그렇습니까?”

“음. 어쩌면 제 상황이 더 안 좋을 수도 있죠.”

로제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감정을 감추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방어 자세였다.

이 에스테스령의 사람들은 누구나 ‘사생아 출신 남작 영애’인 로제타의 불운한 상황을, 그리고 그녀의 열악한 입장을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공작님에겐 더더욱 보이고 싶지 않아. 스스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아.’

로제타는 그렇게 얼굴을 살짝 내려트린 상태에서,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꾸며 내어 말했다.

“매일같이 남작가로 돌아오라고 성화를 부리시죠.”

정말, 별것 아닌 가벼운 문제라는 듯이.

테런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로제타가 받고 있는 결혼에 대한 압박의 정도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금 더 캐물어 볼까 하다가 이내 입술에 힘을 꾹 주어 다물었다.

로제타가 지키고 싶어 하는 자존심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테런은 말을 돌렸다.

“그런데 오늘 이 피크닉에, 저 말고 초대받은 존재가 하나 더 있었군요.”

너무도 자연스러운 전환이었다.

로제타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제 오랜 친우가 제 여동생과 뛰어 놀고 있군요.”

클라리사와 토토는 커다란 호수 주위를 까르르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아, 토토 말씀이시군요. 이곳으로 오는 길에 산책을 나온 토토와 마주쳤어요. 클라리사가 너무 반가워해 도저히 떼어 놓을 수가 없겠더라구요.”

“잘하셨습니다.”

로제타는 테런이 칭찬에 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런의 보좌관인 긱스가 들었으면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울부짖었겠지만.

저 멀리에서 클라리사와 토토가 테런이 온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뛰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한쪽 팔을 붕붕 흔들며 ‘오라버니!’, ‘컹컹! 컹컹!’ 하고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로제타의 시선도 그들에게로 향했다.

수면에 닿은 햇살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래서인지 클라리사와 토토의 모습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추억 속의 한 장면처럼.

‘추억이라니. 난 어릴 적에 이렇게 평화로웠던 기억이 없는데.’

그런 그들을 향해 조심해서 놀라고 소리친 테런이 다시 로제타를 돌아보았다. 그는 웃는 낯이었다.

“가신과 만남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오길 잘했군요. 이렇게 반가운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어느덧 돗자리를 펼칠 나무 근처에 다다랐다.

테런은 이 호숫가에서 두 번째로 큰 나무의 그늘에 들고 온 짐을 내려놓았다.

“이쪽에 자리를 펴도록 하죠.”

“저기 저 나무의 그늘이 조금 더 크지 않을까요?”

“저 나무에 따로 할 게 있어서요.”

테런이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죠.”

로제타가 들고 온 돗자리를 펼치던 그때, 그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돗자리를 펼친 뒤 로제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 테런이 가지고 온 물건들이 보였다.

두꺼운 나무판자 하나와 튼튼해 보이는 줄, 그리고 공구함이 있었다.

테런은 로제타의 짐처럼 그것들을 한 번에 들어 올려,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저건 왜 들고 온 거지?’

의아함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 모양인지, 테런이 싱그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것’의 정체가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네, 살짝.”

“클라리사가 보낸 편지엔 항상 이 호숫가가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나룻배를 타는 것도 좋은 놀이지만, 다른 추억도 곁들일 수 있다면 더 좋겠죠. 예를 들자면, 그네 같은 것 말입니다.”

“좋은 생각이세요!”

생각보다 로제타가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자, 테런은 순간 이것을 잘 챙겨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검지를 세워 제 입술 위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클라리사에겐 비밀로 해 주십시오. 어차피 지척에서 작업할 것이라 옆에서 보고 있으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아주 찰나라 할지라도 궁금해하는 표정을 보고 싶거든요.”

“기꺼이 협조할게요.”

로제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리사의 푸른 두 눈이 궁금증을 품다가 이내 초롱초롱하게 빛날 것을 생각하니, 그녀 역시도 덩달아 들뜨는 기분이었다.

“에스테스 공작가의 남매분들은 비밀이 참 많으시군요.”

“클라리사에겐 어떤 비밀이 있습니까?”

“그게……. 아 참.”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어 무심코 대답해 줄 뻔했다.

제 실수를 깨달은 로제타가 서둘러 입술을 꾹 다물고는 테런을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대답을 끌어내는 데 너무 능숙하세요.”

“이런. 들켜 버렸군요.”

테런이 가볍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씩 당긴 입꼬리가 시원해 보였다.

게다가 편안해 보이는 눈매는 절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게끔 했다.

자꾸 그쪽으로만 가려 하는 시선을 단단히 단속한 로제타가 술렁임을 다스리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꾸며 내었다.

“죄송하지만 클라리사가 제게만 말해 주는 비밀이라 하였으니, 공작님껜 말씀드릴 수 없겠어요. 이해해 주시겠죠?”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궁금증이 일어도 꾹 참겠습니다.”

그러던 중, 로제타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직접 하시려고요?”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계시는군요.”

로제타는 잠시 말을 골랐다.

하지만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는 듯 포기한 얼굴을 하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것도 하실 수 있는진 몰랐어요.”

“그러실 만합니다. 대개는 하지 않으니까요.”

테런은 로제타가 민망함을 느끼지 않도록 동의했다.

어느새 돗자리 근처로 다가온 그가 잔디 위에 공구함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전 좀 별난 구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잡다한 생각이 들 때 사색에 잠기는 것보다 몸을 움직여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걸 좋아합니다.”

로제타는 테런을 슬그머니 눈에 담았다.

얼굴 어디에도 그늘이 드리웠거나 하는 기색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방금 한 말은…… 지금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뜻인 것 같은데.’

하지만 속이 시끄럽다는 사람치고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멀끔했다.

‘공작님은 고민거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신가?’

테런은 로제타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돗자리 위에 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헐겁게 손깍지를 낀 팔을 편하게 올렸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쉴 요량인 듯했다.

로제타와 테런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둘 다 호숫가 저편에서 뛰어노는 클라리사와 토토를 눈에 담고 있었지만, 신경은 오롯이 옆에 있는 서로에게 쏠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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