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6화
‘왠지 모르게 감질나는 기분이야.’
어색함과 간질거림 그 사이 어딘가의 감정에 로제타는 손끝이 아직도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밤, 잠시나마 테런의 품에 끌어안겼던 일도 떠올라 더욱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색해. 그러니까 무슨 말이라도 좀 해야겠어.’
잠시 말을 고르던 로제타가 이내 물었다.
“사실 클라리사와 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지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머리카락 말씀이시군요.”
테런 역시 로제타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채, 줄곧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던지 곧바로 대답을 해 왔다.
그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앞 머리카락 끝을 살짝 쥐고 비볐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클라리사도, 저도 둘 다 유전입니다.”
“정말요?”
“예. 저희 할머님이신 카밀라 대부인께서 젊은 시절 클라리사처럼 환하고 빛나는 은발을 자랑으로 여기셨지요.”
“그렇다면 공작님의 흑발은 에스테스 공작가의 유전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부계죠. 대대로 에스테스가의 가주들은 저처럼 흑발을 타고난다고 기록에도 남겨져 있습니다.”
그때, 토토와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돈 클라리사가 뿔이 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언니랑 오라버니! 저만 빼놓고 두 분이 무슨 말씀을 그리 정답게 나누고 계시는 거예요?”
왠지 샘이 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행이야. 클라리사가 와서.’
그렇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덜 어색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대답을 해 주었다.
“클라리사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정말요?”
두 눈이 동그래진 클라리사가 테런을 건너다보며 사실을 확인하듯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클라리사가 밤마다 이불을 걷어차고 자서 배앓이 한 적이 많다는 이야기를 해 드렸지.”
“오라버니!”
클라리사가 새빨개진 얼굴로 테런을 불렀다. 동그란 두 눈에는 힘을 단단히 주고 있는 터였다.
“숙녀의 비밀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떠벌리시면 어떡해요! 아! 물론 로제타 언니는 아무나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데 가선 그러시면 안 돼요!”
클라리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토토가 맞장구라도 치듯 ‘컹!’ 하고 크게 짖었다.
그 모습이 둘이 장단이 잘 맞는 것 같아 테런과 로제타는 얼결에 마주 보았다가 이내 잔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말동무도 왔으니, 전 이만 작업을 시작하러 가 보죠.”
테런이 무릎을 짚으며 가뿐하게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나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동생에게로 다가가 웃었다.
“그리고 클라리사.”
그가 손을 뻗어 클라리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오라비는 네가 숙녀보단 소녀로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한단다.”
그런 뒤 몇 번을 더 쓱쓱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테런은 공구함을 챙겨 들고 이 호숫가에서 가장 큰 나무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 있던 자리에서 제 오라비를 슬쩍 돌아보던 클라리사가 이내 로제타를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뭘 하시려는 걸까요?”
“글쎄.”
로제타는 테런과 약속한 대로 모른 척했다.
그러자 클라리사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돗자리 쪽으로 다가와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휴. 조금 더운 것 같아요.”
클라리사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팔랑팔랑 얼굴에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이 땀에 살짝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 묶어 줄까?”
“네! 좋아요!”
클라리사가 냉큼 대답하고는 로제타를 향해 등을 대고 앉았다.
로제타는 혹시나 해 챙겨 온, 어제 클라리사에게 선물한 리본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 묶어 줄까?”
“동그랗게요!”
클라리사가 냉큼 대답하며 자신의 머리 위에 꽉 쥔 조그마한 주먹 두 개를 올려 두었다.
양 갈래로 땋은 뒤 돌돌 말아 양 머리처럼 단단하게 고정해서 묶는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한두 번 묶어 준 것이 아니라는 듯, 로제타는 능숙하게 클라리사의 머리카락을 땋았다.
그런 뒤 공처럼 동글동글하게 말아 양쪽 정수리에 얹어 자리를 잡은 뒤, 각각 나비 모양으로 리본을 묶어 주었다.
목덜미가 드러나자 한결 시원해진 모양인지 클라리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원해졌으니까 토토랑 한 바퀴 더 돌고 올게요!”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네, 언니!”
씩씩하게 대답한 클라리사가 또 토토와 함께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이제 돗자리에는 로제타 하나만 남았다.
그녀는 멀어지는 클라리사를 웃으며 바라보다가 테런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새 톱질과 사포질을 마치고, 판자 두 개의 길이를 맞춰 보고 있었다.
그네 의자에 등받이를 만들 셈인 듯 보였다.
어린 동생이 탈 것이라 그런지 유독 더 꼼꼼하게 살피는 느낌이었다.
테런은 입술에 못을 살짝 물고, 열심히 망치질하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많이 더우신가 봐.’
간간이 불어오던 바람이 어느샌가 뚝 끊겨 있었다.
‘괜찮…… 겠지?’
로제타는 테런이 그네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실프.”
그녀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었다.
행여 테런에게 들릴까 봐 잔뜩 낮춘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하급이라고는 하나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는 일은 제법 위험 부담이 컸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결국 앞선 것은 이성보다도 감성이었다.
핑, 소리와 함께 실프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로제타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실프, 쉿!’
반갑게 로제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던 실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는 놀란 듯 덩달아 양손으로 제 입술 위를 꾹 누르듯이 덮었다.
오직 계약자만이 정령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일반인들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바람의 힘을 다스리는 에스테스의 가주인 테런에겐 그 모든 사항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애초부터 실프가 말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로제타는 속으로 부탁했다.
‘조금 더운데 시원한 바람을 불러 줄 수 있니? 이마에 땀방울이 마를 정도로만.’
실프는 여전히 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건 답례.’
로제타가 살며시 웃으며 피크닉 가방 안에서 엄지손톱만 한 각설탕 한 개를 꺼내 실프에게로 내밀었다.
단것을 보자마자 헤실, 풀어진 얼굴로 쪼르르 로제타에게로 날아온 정령이 얼른 각설탕을 받아 들었다.
대가에 손을 대는 순간, 계약은 성립되었다.
실프는 각설탕을 들고 곧바로 정령계로 사라졌고, 부드러운 바람이 어딘가에서 자연스럽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힐끔, 다시 테런을 바라보았다.
판자의 각도가 생각했던 것만큼 잘 맞지 않는 모양인지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었다.
‘눈치 못 챈 것 같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령이 사라지며 남기고 간 반짝이는 빛 가루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로제타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자신은 지금 테런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저 큰 덩치에, 같은 자세를 취한 어린 소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겹쳐 보였다.
‘……응? 방금 그거, 뭐지?’
소년의 모습은 흐릿한 잔상 같았다.
로제타는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지만, 영 성에 차지 않아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조금 전 그녀가 보았던 소년의 환상 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지랑이 같은 거였을까?’
얼핏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술렁였다.
로제타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왠지 숨 쉬는 게 부자연스러워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오던 그녀가 일부러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왜 공작님에게 기시감이 드는 거지?’
로제타는 심장이 꽉 죄어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해서 테런을 눈에 담았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일 뿐인데.’
실프가 불게 한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그의 앞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살랑거림에 따라 그녀의 마음도 자꾸만 따라서 술렁거렸다.
* * *
며칠 뒤, 에스테스 파크는 갑작스러운 방문자들의 등장으로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수도에서 테런의 보좌관인 긱스가 내려온 것이다.
그때 테런은 편안한 차림으로 클라리사, 로제타와 함께 티 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집사 콜린의 뒤를 따라 티룸으로 들어온 긱스는 미친 사람처럼 우렁차게 웃고 있었다.
“각하. 하하하하하하. 무척 편안해 보이십니다.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테런은 찻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제 보좌관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의 인내심을 과대평가한 모양이야.”
“하하하하하. 안 들립니다.”
“날 찾아 내려올 줄은 알았지만 진짜 빨리도 잡으러 왔군.”
긱스가 독이 오른 표정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저만 일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하하하.”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마치 호두까기 인형 같아 조금 무서워 보였다.
로제타는 약간 미친 사람 보듯 경계하는 눈길로 긱스를 바라보았고, 클라리사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긱스 경. 웃지 말고 그냥 원래대로 화를 내요. 표정이 이상해서 로제타 언니가 무서워하잖아요.”
클라리사는 새침을 떨며 따뜻하게 우려낸 레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목소리에 긱스가 테런에게서 시선을 떼고 곧바로 공녀에게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공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긱스는 클라리사가 자신을 향해 내민 자그마한 손등 위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가 떼어 내었다.
“긱스 경이 걱정해 준 덕분에 매우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약은 꾸준히 챙겨 드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로제타 언니가 잘 챙겨 주고 있으니까요.”
긱스의 시선이 클라리사의 옆에 앉아 있던 로제타에게 잠깐 가 닿았다.
그의 눈빛이 살짝 빛나는 듯싶더니, 이내 그녀를 향해 눈인사했다.
딱히 묻지 않아도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뵙는군요. 긱스 라스크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어요. 로제타 클리프라고 합니다.”
로제타는 얼결에 따라 그에게 묵례했다.
“자, 인사는 이쯤 해 두고.”
긱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주의를 환기하듯 손뼉까지 마주친 상태였다.
“대부인께서 꼭 전하라 신신당부하셨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