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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37화 (37/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7화

“할머님의 전언이 있다고?”

테런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긱스가 가슴을 쭉 편 뒤, 마치 변사처럼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말했다.

“대부인께서 두 분 모두, 당장 수도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저도요?”

클라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긱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있는 힘껏 얼굴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싫어요!”

그런 아이를 타이르듯 로제타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클라리사.”

“난 여기서 로제타 언니랑 살 거예요!”

클라리사는 예법도 잊고 의자에서 내려와 로제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수도엔 안 가요! 안 갈 거예요!”

긱스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수년째 에스테스 공작가에 봉사하며 공녀를 봐 왔지만, 그녀가 오늘처럼 떼를 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얼떨떨했다.

“공녀님. 그러지 마시고…….”

“안 갈 거예요!”

이때다 싶었는지 테런도 슬그머니 끼어들어 한마디 덧붙였다.

“……클라리사가 가지 않는다면 나도 올라가지 않겠네.”

“각…… 하……. 진짜 이러시깁니까.”

긱스가 매우 성난 눈길로 제 상관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테런은 그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쯤 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로제타였다.

‘이 남매는 대체…….’

그녀가 참으로 난감한 얼굴로 긱스를 바라보았다.

눈썹은 살짝 아래로 내려트린 상태였다.

“어, 음……. 제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순서일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언니가 왜요!”

테런과 클라리사가 동시에 말했다.

긱스는 만만한 게 테런이라는 듯 그에게만 눈을 흘기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정 그러시면, 레이디 클리프도 함께 수도로 가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네?”

로제타는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그런데 그녀가 답하기 전에 에스테스의 두 남매가 적극 찬성을 하고 나섰다.

“긱스 경! 좋은 생각이에요!”

“역시 자넨 유능한 보좌관이군.”

하지만 테런은 조금 아쉬운 분위기였다.

“클리프 영애. 답은 금방 주실 필요가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 주십시오. 되도록 천, 천, 히 말이죠.”

로제타가 답을 늦게 줄수록 그의 휴가가 길어지기 때문에 그러는 듯했다.

중간에서 난감해하던 그녀가 말했다.

“긱스 경.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긱스의 대답에 로제타가 고맙다는 듯 미소 지었다.

클라리사만 보자면 당장에 올라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에 올라가면 테런과도 함께 지내야 한다.

그 점이 못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로제타는 그에게 호감과 경계, 두 가지의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테런이 휴가차 내려온 것이라 ‘잠시’ 머무르는 것뿐이지만, 자신이 수도에 함께 올라가면 말이 달라진다.

앞으로 ‘쭉’ 그와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한시적으로 조심하는 것과 사는 내내 계속 조심해야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자신이 클라리사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으면, 테런 역시 로제타를 위협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막연하게 남아 있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마저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로제타가 걱정하는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수도로 올라가면…… 분명 말이 나오겠지.’

그녀는 입술을 살그머니 물었다.

윌셔스 왕국에서 붉은 머리는 야만인의 상징이다.

에스테스 파크에 오기 전, 로제타는 그 멸시와 차별, 그리고 호의적이지 않았던 눈초리들을 부단히 겪어 왔었다.

영지에서도 이럴진대, 수많은 말과 사람이 모인 수도에 올라가게 된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우선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말이 나올 확률이 다분히 높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자신의 존재가 클라리사와 테런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것이라면, 로제타는 그 점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걱정과 고민은 꼬리 물기를 하듯 점점 더 많은 망설임을 불러왔다.

‘그리고 에스테스는 바람의 가문이잖아.’

자신이 실프를 다루는 만큼, 이 힘을 숨기고 싶다면 테런과 되도록 부딪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터놓고 한번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람의 정령에 관해선 그 어떤 사람들보다 테런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으니.

하지만 늘 결론은 ‘관두자’였다.

‘괜히 나한테 관심 두게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

제게 괜한 경계심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테런에게 자신은 ‘클라리사의 간병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남고 싶었다.

최대한 눈에 덜 띄는 편이 마주칠 확률도 낮으니까.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진짜…… 왜 나한테 실프를 다룰 능력이 있는 거지?’

답을 얻을 수 없어서 꽤 오래 묻어 두었던 질문이 다시금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클리프는 그저 가신 가문일 뿐, 에스테스의 방계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의 수를 백 보 양보하더라도 클리프 남작의 반쪽짜리 핏줄인 자신보다 적자인 이시크에게 능력이 발현되는 편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 * *

로제타가 입술을 꾹 다물며 한숨을 삼켰다.

그날 에스테스 파크의 소란은 비단 긱스의 등장으로만 끝이 나지 않았다.

같은 날 저녁, 이시크와 남작 부인이 함께 에스테스 파크에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 클리프 남작 영식과 그의 모친이 뵙기를 희망합니다.”

로제타와 테런, 클라리사와 긱스 넷이 모여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우선은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로제타가 질끈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말 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두 사람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테런이 무어라 입을 떼기 전, 로제타가 먼저 말했다.

“모두 식사 계속하세요. 제가 만나서 처리할 테니까요.”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제타의 양쪽 뺨은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창피함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즉시 로제타는 수도로 올라갈 결심을 마쳤다.

‘그냥 평생 가슴 졸이며, 조심하면서 살지, 뭐.’

그편이 클리프 남작가의 얼굴들을 마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남작 부인과 이시크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로제타는 제게 모인 시선들을 견디듯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한번 물었다가 놓으며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제가 처리할게요.”

“괜찮습니다, 영애.”

로제타를 안심시키려는 듯 테런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는 냅킨을 반듯이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하고 계십시오.”

그런 뒤 테런은 로제타의 맞은편에서 식사하고 있던 긱스를 건너다봤다.

그는 일부러 테런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긱스?”

테런이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그 순간 긱스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는 애써 못 들은 척하며, 포크로 구운 감자를 쪼개 제 입에 욱여넣었다.

마치 지금 먹어 두지 않으면 먹을 기회가 없다는 사람처럼.

“긱스. 자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어서 일어나게. 같이 가야지.”

“혼자 가셔도…….”

“자넨 내 보좌관이잖나.”

긱스가 마치 욕을 하듯 입술을 마구 씰룩거렸다.

“수당 챙겨 주십시오.”

“물론이지.”

긱스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두 남자가 식당 출입문에 다다랐을 그때, 망설이던 로제타가 한 번 더 용기를 내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님!”

다시 뒤를 돌아본 테런의 눈에 로제타의 퍽 간절한 얼굴이 들어왔다.

“제발 저도 같이 가게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마주 잡고 있는 두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린 것 같아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테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클리프 영애.”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로제타가 옆에 앉아 있던 클라리사를 내려다보았다.

“클라리사. 혼자 두게 되어서 미안해. 되도록 금방 다녀올게.”

“전 걱정하지 마세요, 로제타 언니.”

클라리사가 로제타의 손을 꽉 한번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그 자그마한 손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은 로제타가 애써 입꼬리를 늘여 따라 미소 지어 주었다.

그녀는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테런과 긱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의 뒤를 따르며, 로제타는 숨을 골랐다.

‘그래. 온 것 자체는 별일 아닐 수도 있어.’

클라리사의 만찬회 날 테런이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가신 가문들은 마치 자기들끼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루씩 번갈아 가며 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기에, 이렇게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지금이라도 정원에 나가서 짱돌이라도 주워 와야 하나 고민했다.

그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참신하지도 않은 개소리를 지껄일 가능성이 컸다.

‘정말 질린다, 질려.’

진짜 제게 충분한 힘만 있다면, 둘 다 내쫓아서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아!’

걸음을 멈추자 그 기척을 느낀 테런이 뒤돌아봤다.

“클리프 영애?”

“저기, 공작님.”

로제타가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며 한껏 낮춘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희 가문 사람들을 뵙기 전에,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혹시 괜찮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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