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8화
* * *
에스테스 파크의 응접실.
이시크는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편하게 기대어 앉아 차를 들었고, 그 옆에 앉아 있던 남작 부인은 초조한 듯 제 아들을 쪼아 댔다.
“이시크. 정말 이래도 되는 거니?”
“아니면 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이시크의 말에 남작 부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로제타 그 망할 것이 우리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를지가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각하를 찾아뵈러 온 것 아닙니까? 각하와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요. 이성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필시 저희의 사정을 이해하고, 로제타가 아니라 저희의 손을 기꺼이 들어 주실 겁니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
이시크와 남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자 테런과 긱스, 그리고 로제타가 차례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본 순간 이시크의 얼굴이 구겨졌다.
로제타 역시 불신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시크는 행여 로제타가 중간에 끼어들어 어깃장을 놓을까 봐 내쫓으려고 했다.
“너는 좀 나가 있거라.”
“클리프 영애는 내 손님이니 영식이 퇴실 여부를 논하지 않아도 되네.”
하지만 로제타가 뭐라 답도 하기 전에 테런이 막아섰다.
이시크가 조금 민망한 듯 콧잔등을 긁자 테런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나를 보고자 했다고?”
“예,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시크 클리프라고 합니다.”
“앉지.”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이시크와 남작 부인이 자리에 앉았다.
이시크가 재킷의 깃을 앞으로 쭉 잡아당기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오늘 각하를 뵙고자 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것을 드리고자 입니다.”
짧게 헛기침을 한 뒤, 이시크가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저건 뭐지?’
로제타의 눈이 새치름해졌다.
테런이 눈짓을 하자 긱스가 중간에서 건네받아, 대신 봉투를 열었다.
“무엇인가?”
“음. 반환 요청서군요.”
“뭐?”
테런의 이맛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반환 요청서라니? 에스테스에서 클리프가에 무엇을 빌렸기에?”
반대의 경우도 아니고. 테런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이시크가 가져온 저 말도 안 되는 문서의 골자는 대략 이러했다.
‘가문의 재산’인 로제타를 에스테스 파크에서 장기간 데리고 있으니 어서 빨리 반납해 달라는 내용과 더불어, 그간의 대여비를 지급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시크기에 가능한 뻔뻔함과 무모함, 그리고 멍청함을 여실히 나타내는 일이었다.
“저 아이가 이곳에 머무르는 바람에 혼사가 좀처럼 진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로제타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고, 테런은 그런 그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결혼 계획이 있으셨습니까?”
“아니요. 절대요.”
테런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이시크를 바라보았다.
“본인은 그렇다고 하는데.”
“귀족 자제들의 혼사는 본인의 의사보단 가문의 뜻이 더 중요한 법이지 않습니까.”
뻔뻔한 대답에 테런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시크는 그가 가주이니 제 말뜻을 잘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테런 역시 결혼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던 만큼, 이 문제에선 전적으로 로제타의 편이었다.
“영식과 나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시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테런이 제 상황을 이해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화가 잘 풀리겠다, 그런 기대에 그는 남작 부인과 웃는 얼굴로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뒤이어진 테런의 말은 그들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 버리는 것이었다.
“성향은 너무나도 다른 것 같군.”
“예? 그게 무슨…….”
“내게도 그대처럼 여동생이 있지만, 그대처럼 사람을 사물 취급하지는 않네. 클리프 영애를 좋게 봤던 터라, 그대에게도 조금 호감이 있었는데, 무척 실망감이 들어.”
테런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쪽으로 다리를 꼬았다.
그런 뒤 무릎 위에 깍지를 낀 손을 올리고는 넌지시 이시크를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영애를 돌려 달라고 했던가?”
“예? 예, 그렇습니다.”
“그 말, 상당히 무례한 표현임은 알고 있나? 그대가 한 말인즉슨 나와 내 동생이 클리프 영애를 이곳에 억지 감금하고 있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그래도 눈치가 다 죽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시크는 대화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겁지겁 변명했다.
“아, 아뇨. 각하!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전 그저 저 아이가 도통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고 안달이 나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에 테런이 또 싸늘하게 피식 웃었다.
“에스테스 파크의 경비를 강화해야 겠군. 클리프 남작가 사람들이 이토록 영애의 신변에 대해 걱정하며 안달하는지 내 미처 몰랐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시크가 당황해서 입술을 짓씹었다.
어째 말을 거듭할수록 말리는 기분이었다.
땀이 나는 모양인지 그가 흉하다는 것도 잊고 손등으로 제 이마를 닦았다.
남작 부인이 더는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듯 이시크의 허벅지를 꽉 꼬집어 비틀었다.
그러자 이시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말에 반박이라도 하고 싶은 얼굴들인데.”
“아…… 뇨. 당치도 않습니다, 각하.”
“그럼 저 허무맹랑한 말들이 적힌 종이는 없애 버려도 되겠지?”
테런은 이시크에게서 대답도 듣지 않고 긱스에게 눈짓했다.
이시크와 남작 부인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긱스가 눈치껏 종이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때, 로제타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공작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이시크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정중한 태도였다.
로제타는 짧게 숨을 들이켜며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듯 테런이 제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 수 있어. 얼른 치워 버리자.’
사실 응접실에 들어오기 전, 로제타는 테런에게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하나 했었다.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어요.」
「말씀하십시오.」
「이시크를…… 제 오라비를 혹시 먼 곳으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의 말에 테런과 긱스가 눈빛을 교환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로제타는 제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부족한 이야기를 덧대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남작 부인과 이시크는 저를 신분 상승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해요. 아마 오늘 찾아온 것도 절 데리고 가기 위해서일 거예요.」
「도구, 라고요?」
「네. 돈이 많거나 신분이 높은…… 그런 가문에 절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어요. ‘결혼’이라는 제도에 꽁꽁 묶어서요.」
테런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자 로제타는 안달이 나서 조금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오라비를 보낼 수 없다면, 제가 떠나고 싶어요. 정말,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으니까……. 이따 남작 부인과 이시크가 절 데리고 가겠다고 하면…… 그 순간만 모면하게 도와주실 순 없으실까요?」
「떠나신다고요?」
「계속 에스테스 공작가에 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요.」
그녀의 절박한 얼굴을 눈에 한번 담은 테런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영애의 부탁대로 클리프 영식을 먼 곳으로 보내 드리죠.」
로제타는 응접실에 들어오기 전, 테런으로부터 들은 그 대답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심란한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테런이 그 약속을 지켜 줄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매달릴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짧게 숨을 들이켠 그녀는 이시크와 남작 부인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뒤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한 말을 꺼냈다.
“너무 노여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아마 이시크……, 오라버니가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닐 거예요.”
웬일로 저 망할 것이 제 편을 들어 주지?
아니, 그전에 편들어 주는 게 맞나?
조금 헷갈리는 문장이긴 했다.
이시크가 갸웃하는 사이 로제타가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가 저보다 나이만 많지 사회생활이라곤 딱히 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녀는 벼르는 눈빛으로 제 앞에 앉아 있는 이시크와 남작 부인을 슬쩍 보다가, 시치미를 떼며 테런에게 말했다.
“집안의 장남이다 보니 남작님과 남작 부인께서 과보호를 좀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상식적으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을 조금 모른답니다. 그래도 악의는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
“저런.”
테런의 목소리가 사뭇 연기 톤이었으나 이시크와 남작 부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테런과의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극도로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장차 클리프 남작가를 책임져야 할 후계자가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하다니. 그것은 매우 큰 일이지 않습니까?”
로제타가 보란 듯 눈썹을 아래로 내려트리며 말했다.
“매우 안타깝게도…… 그동안은 ‘제 능력’에 맞는 일을 찾지 못했거든요.”
중의적인 뜻으로 한 말이었다.
첫 번째는 가지고 있는 능력이 없다.
두 번째는 가진 능력에 비해서 콧대만 높아 분에 넘치는 일자리를 고른다.
“그래서 번번이 일할 기회가 찾아와도 흘려 버렸지요.”
로제타가 웃으면서 계속해서 이시크를 깎아내렸다.
“그렇다고 무작정 수도에 올라가 공작님께 자신을 등용해 달라고 말씀도 드릴 수 없었어요. 제 오라비는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거든요.”
“영식이 겸손한가 보군요. 전 인재는 언제나 널린 마음으로 등용하는데.”
겸손이 아니라, 사실은 제가 가진 능력을 과대평가해 허접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 것이지만.
“그래서 말인데…… 외람된 청이지만, 이번 기회에 좋은 자리를 주선해 주신다면, 클리프가는 앞으로 더더욱 공작가에 충성을 다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답니다.”
로제타가 이시크를 건너다보며 넌지시, 압박하듯 물었다.
“그렇지,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