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39화
“어? 어, 그래……. 무, 물론이다마다.”
이시크가 기세에 떠밀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지금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평소엔 곧 죽어도 이름만 부르던 로제타가 꼬박꼬박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해 미칠 것만 같았는데, 저를 생각해 주는 말까지 하다니.
테런이 아래턱을 느릿하게 쓸듯이 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흠, 그래요. 그럼 어느 자리가 좋을까…….”
“마구간지기를 맡기셔도 오라버니는 성심성의껏 일할 것이랍니다.”
“잠깐만! 마구간이라니!”
이시크와 남작 부인이 얼굴이 벌게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로제타가 두 눈을 깜빡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머. 마구간지기가 뭐 어때서요? 마구간지기는 명예스러운 자리랍니다. 특히나 국왕 폐하의 마구간 지기는 작위가 백작 이상인 사람부터 맡을 수 있는 것인걸요?”
“그렇죠. 전통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직위였으니까요.”
적절한 타이밍에 테런이 끼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런까지 맞장구를 치자, 이시크와 남작 부인은 진짜 마구간지기가 좋은 직업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바보들.’
로제타가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윌셔스 왕국의 말은 가장 친숙한 이동 수단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궂은 일은 아랫사람이 하더라도 왕실 마구간의 총책임자는 역사적으로 백작가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만 맡을 수 있었다.
말에게 독초를 먹이거나 침을 놓으면 탄 사람이 낙마하며 부상을 당할 위험이 크기에, 귀족들 역시 자신이 마구간지기로 임명되면 그것을 명예 롭게 생각했다.
주군이 자신을 믿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시크와 남작 부인은 입으로는 교양, 교양 노래를 부르면서도 로제타보다 책을 안 읽다 보니 그러한 속사정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로제타는 당황한 두 사람의 모습을 통쾌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 지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 에스테스 파크엔 톰이라는 훌륭한 마구간지기가 있으니 굳이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물론입니다. 그는 무척이나 성실한 사람이니까요.”
“오라버니가 일할 만한, 어디 적당한 자리가 없을까요?”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질수록 이시크와 남작 부인 역시 절로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테런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오늘 그들이 에스테스 파크에 방문한 것은 딱히 구직을 위해서가 아니었지만, 어느샌가 로제타의 페이스에 휘말려 마치 면접을 보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로제타는 둘 다 내보낼 수 없다면, 적어도 이시크만이라도 멀리 쫓아 버릴 생각이었다.
테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다시 로제타에게로 닿았다.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씩 늘였다.
“마침 적당한 자리가 있을 법도 합니다.”
테런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긱스에게로 힐끗 시선을 주며 넌지시 물었다.
“클리프 영식을 남부 콘웰의 현장 책임자 보좌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나? 총책이 계속 일손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올려 온 것이 기억이 나는데.”
“매우 적절한 배치라고 생각합니다.”
긱스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콘웰은 남부 최대의 곡창 지대로, 왕국민이 소비하는 식량의 반 이상을 생산해 내는 지역이었다.
매 계절 곡식들을 나르는 수레가 드나들고 상인들이 드나들다 보니 길이 많이 망가졌다.
그 탓에 바퀴가 빠지는 등의 사고도 잦아 민원이 속출하는 곳이었다.
하여 이번에 대규모로 진행되는 도로 공사 사업 중 가장 많은 예산이 책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평평하고 반듯한 길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길을 다 엎고 있었지만, 농번기라 일손을 구하기가 힘들어 영 진척이 없었다.
‘고생 좀 해 보렴, 이시크.’
이시크가 콘웰로 내려가게 된다면, 직책은 콘웰 지부 총책의 보좌가 될 터였다.
그러나 그곳의 총책이 힘들고 궂은 일일수록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아랫사람이 따른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곡괭이를 손에 들고 온종일 땅만 파게 될 확률이 높았다.
“할 수 있겠나, 영식? 일이 꽤 고될 거야.”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이시크가 벌떡 일어나 테런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저 ‘보좌’라는 허울만 좋은 직책에 눈이 멀어 덥석 일하겠다고 덤비는 것이었다.
뭐든 속전속결로 밀어붙여야 사람의 혼을 빼놓기 딱 좋은 것.
테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러면 바로 임명장을 작성하도록 하지. 콘웰의 일손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 영식이 최대한 일찍 도착할수록 그쪽에 큰 도움이 될 걸세.”
“예, 알겠습니다. 각하. 바로 돌아가 이르면 오늘 저녁, 늦더라도 내일 오전 중으론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로제타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저 망할 놈을 치워 버릴 수 있게 되다니.
로제타는 테런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테런이 임명장을 써 주자마자 두 사람은 곧바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났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으나 로제타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옆에 섰더니 남작 부인이 슬쩍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드디어 네 오라비 앞길에 도움을 주는구나.”
쫓겨나는 것도 모르고.
로제타는 속마음을 감춘 채 미소 지었다.
이시크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비록 로제타를 데리고 남작가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수확은 얻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당장 1, 2년 사이에 로제타의 외모가 파삭 늙어 버리는 것도 아닐 테고, 일단은 에스테스 공작에게 눈도장부터 찍는 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이시크는 로제타의 결혼을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녀 덕분에 이렇게 공작과 안면을 트고 일을 얻었지 않나.
앞으로도 그녀가 중간에서 저에 대해 잘 이야기 해 주면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것은 물론, 장차 수도에 입성할 수도 있을 거란 기대가 생겼다.
로제타에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바라는 것은 거창하게도 많았다.
채권자들에게도 자신이 공작 각하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하달받아 수행하러 가야 하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그래도 돈을 달라고 하는 치가 있다면…….
‘뭐, 그런 건 어머니가 어떻게든 잘 막아 주시지 않을까?’
여차하면 집안일을 도와주는 가솔 몇을 해고하고 그들 앞으로 지급되던 돈을 돌려막으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이란 안일한 생각이었다.
“콘웰을 잘 부탁하오.”
“저만 믿어 주십시오, 각하.”
이시크는 테런과 악수를 나눈 뒤에야 비로소 의기양양한 얼굴로 남작 부인과 에스테스 파크를 떠났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야, 로제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만 스슥, 스슥 움직여 뻣뻣하게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이 사뭇 딱딱하고 경직되어 보여, 테런은 웃고 말았다.
로제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무척이나 창피했다.
“공작님. 저는 그냥…… 이시크를 멀리 보내기만 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런 요직에 앉히시다뇨……. 이시크는 그런 큰일을 책임질 수 있는 깜냥이 없는데…….”
테런이 웃었다.
고개를 살짝 내린 탓에 앞머리가 흐트러져 흔들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큰일은 안 맡겼으니까요.”
로제타가 무슨 말이냐는 듯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로 테런을 바라보았다.
“이시크 영식이 콘웰에서 맡을 주 임무는 아마도 몸을 쓰는 일이 될 겁니다. 거긴 지금 총책임자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매일 땅을 갈아엎고 있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제법 힘든 일일 겁니다. 아마 힘들어서 울지도 모르죠.”
아, 공작님은 다 계획이 있구나.
로제타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정말 창피하고…… 또 고맙습니다. 이 마음을 다 어떻게 전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감사의 인사를 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클라리사의 친구를 도울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간병인이 아니라 친구.
그 말에, 로제타는 조금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영애. 먼저 들어가 보시죠. 전 긱스와 남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뒤따르겠습니다.”
로제타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드레스를 살짝 옆으로 벌렸다. 무릎을 굽혀 약식으로 인사한 뒤,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녀가 먼저 자리를 뜨고 나서야 내내 뒤에 머물러 있던 긱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는 로제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테런의 옆얼굴을 슬쩍 한 번 바라보고는 넌지시 물음을 건넸다.
“웬일로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셨습니까?”
“그러게.”
그는 여전히 로제타가 떠난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클라리사의 간병인이라서 그런가.”
한 박자 늦게 덧붙인 말은 누가 들어도 일부러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댄 것만 같았다.
긱스가 안경을 올려서 쓰며, 한숨을 삼키듯 말을 이었다.
“클라리사 공녀님께서 저 영애를 무척이나 따르더군요.”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상냥하고, 사려가 깊지.”
“그리고 아름답기도 하시고요.”
테런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로제타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눈길을 돌려 긱스를 바라보았다.
피콕블루색 눈동자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 메말라 있었다.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건가.”
그가 내뿜는 서늘한 기운에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긱스는 개의치 않고 의견을 개진했다.
“저는 저 영애가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