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쁜 애 옆에 예쁜 애-40화 (40/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0화

“그러니까 뭐가.”

“각하의 짝으로 말입니다.”

테런의 미간이 좁아졌다.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모르는 척하고 싶으신 거겠죠.”

긱스가 한숨을 삼키며 그를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깐 공녀님께서 계셔서 말씀을 못 드렸지만, 사실 각하께 드려야 할 대부인의 전언이 하나 더 있습니다.”

테런은 굳이 듣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뻔히 알 것만 같은 기분이라 묻지 않았다.

“수도로 올라가는 즉시 맞선을 보게 되실 겁니다.”

“아니 왜? 내게 100일의 시간을 주신다고 분명 말씀하셨는데.”

“그거야 각하께서 수도에서 도망치지 않으실 상황에 해당하는 말씀이셨겠죠.”

테런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엄지로 눈 앞머리를 꾹 눌렀다.

“아까 보아하니, 클리프 영애께서도 원치 않는 결혼 강요로 꽤나 골치 아픈 입장이신 듯했습니다.”

“그래서?”

“뜻이 맞는 두 분이 결탁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테런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긱스를 바라보았다.

“결탁?”

“예.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나더러 클리프 영애와 결혼하라, 뭐 그런 건가?”

“정확하게는 계약 결혼이죠.”

“계약?”

테런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결혼이라는 단어에 거부감부터 느끼는 테런의 성격을 뻔히 알고 있는 긱스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대부인께서는 각하께 신부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지,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맞다.

테런이 하도 결혼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제 거의 자포자기한 카밀라는 그에게 그저 결혼만 하라고 말했다.

긱스는 그 점을 노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클리프 영애가 적격이지 않겠습니까? 클라리사 공녀님께서 따르시고, 각하께서도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고 계시니까요.”

처가가 될 가문이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까 보니 뭐 그 정도야 제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가문의 안주인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클리프 영애가 이 허무맹랑한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

테런이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조금이나마 고려하고 있는 티를 내자 긱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아마 바로 거절하지는 않고, 적어도 고민은 할 것 같습니다.”

테런이 계속해서 망설이자 긱스가 답답하다는 듯 눈매를 좁히고,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덧붙였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일단은 물어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였다.

테런과 긱스가 서 있던 곳 바로 위층의 발코니에서 작은 검은 그림자가 쑥, 난간 아래로 사라졌다.

* * *

평소보다 늦은 시각.

로제타는 클라리사의 약을 챙겨 들었다.

“클라리사. 자기 전에 약 먹자.”

자기 전에 먹는 약은 낮에 먹는 약보다 쓴맛이 더욱 강해, 클라리사가 특히나 싫어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약 먹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는 편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오늘은 로제타가 내미는 약 봉투를 순순하게 받아 들고 단번에 털어 넣었다.

“으윽, 써.”

“잘했어. 자, 이제 침대에 누울까? 자기 전까지 책 읽어 줄게.”

클라리사가 꼼지락거리며 침대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린 그녀가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눈을 굴리더니 로제타를 불렀다.

“언니.”

“응? 클라리사, 왜 그러니?”

로제타가 막 책장을 펴 들려고 하며 대꾸했다.

“언니. 혹시 결혼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뭐?”

“결혼하실 거예요?”

“아니? 딱히 지금은 생각이 없는데.”

“그러면 연애는요?”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로제타는 들고 있던 책장을 덮어 허벅지 위에 내려놓으며 미소 띤 얼굴로 되물었다.

“왜? 클라리사, 좋아하는 남자 생겼니? 연애 상담 해 줄까?”

“제 얘기가 아니라, 언니 얘기예요!”

클라리사의 얼굴이 사뭇 비장했다.

아까 그녀는 2층 발코니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에스테스 파크의 층고가 제법 높아 테런과 긱스가 나누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핵심적인 단어는 들렸다.

로제타라는 이름과 결혼.

이 눈치 빠르고 영리한 소녀는 그 두 단어만으로도 테런과 긱스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제 오라비인 테런이 할머니인 카밀라 대부인으로부터 시시때때로 결혼 압박을 받고 있다는 기저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내 얘기라고?”

로제타가 영, 감을 못 잡겠는지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떠 보았지만, 클라리사의 심각한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뭐에 꽂혀서 이러는 걸까?’

클라리사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작고 왜소하지만 조숙하고, 야무지고, 철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고가 어른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그래서 가끔 자기 혼자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진도를 빼낸 뒤 흥분한 상태로 말을 하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그런 상태인 것만 같았다.

“네! 만약 연애하실 거라면 꼭 제게 먼저 보여 주셔야 해요. 제가 싫다는 남자랑은 연애도, 결혼도 하면 안 돼요.”

로제타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으음. 어떤 남자가 싫은데?”

그 순간 클라리사가 세상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오라버니 같은 놈이요.”

방금 뭐라고? 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로제타가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클라리사의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아이는 저세상 환멸 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왜 이래.

‘너희 남매 사이좋지 않았니?’

당황한 마음을 감춘 채, 로제타가 물었다.

“우리 클라리사. 갑자기 오라버니가 왜 싫어졌을까? 공작님이 클라리사를 서운하게 했니?”

클라리사가 누운 채로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아뇨! 오라버니는 좋아요!”

“그런데?”

“언니의 짝으로 오라버니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이불을 꽉 쥐고 있는 작은 주먹에 힘이 불끈 실려 있었다.

로제타는 생각했다.

클라리사가 진짜 왜 이럴까.

‘내 짝으로 안 된다는 말은…… 내 신분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남작가의 사생아니까.

뭐, 딱히 언감생심 공작 부인 자리를 욕심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테런에게 거리를 두고 싶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반대하는 말에 조금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대답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로제타보다 클라리사가 더 빨리 입을 열었다.

“언니가 너무 아깝단 말이에요.”

“……뭐?”

“제 오라버니는 너무 바쁜 사람이에요.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면 여자를 외롭게 만들게 분명해요!”

로제타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되물었다.

“그러니까 날 걱정해서 안 된다고 하는 거니?”

클라리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언니가 외로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걸요…….”

그런 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을 덧붙였다.

“일 때문에 너무나 바쁜 오라버니를 자주 만날 수 없는 것은 슬프고 외로웠어요. 저야 피를 나눈 남매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언니는 안 돼요.”

클라리사는 조금 전보다 더 심각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도에 살았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바론 전하를 만나러 왕궁에 들어갔어야 했어요. 그런데 바론 전하는 매번 바쁘다고 절 혼자 알현실에 놔두고 오지 않으셨어요.”

달래듯 클라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로제타의 손길이 멈칫했다.

‘뭐라고? 애를 불러 놓고 코빼기도 안 비쳤다고?’

로제타의 눈이 딱딱해졌다.

남자 주인공이고 뭐고, 바론이 진짜 싫어졌다.

‘감히 내 새끼를 울려?’

클라리사가 풀 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제가 싫으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매번 바쁘단 핑계로 오지 않으시는 것도요……. 전 왕궁에서 너무 눈치가 보여서 공작가로 돌아오면 엉엉 울었어요.”

로제타가 목소리를 낮춘 채 속닥였다.

“그런 놈 때문에 울지마, 클라리사. 네 눈물이 아깝잖니.”

로제타가 간도 크게 윌셔스 왕국의 왕세자에게 ‘놈’이라고 부른 것을 듣고 클라리사가 배시시 웃었다.

“지금은 안 울어요. 언니랑 함께 매일매일 정말 행복한걸요.”

복용한 약에 잠기운을 불러오는 성분이 들어 있는 탓인지, 클라리사의 큰 눈이 껌뻑거리며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쁜 사람은 안 돼요. 바쁘더라도 언니를 보기 위해서, 언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일부러라도 시간을 꼭 내주는 사람을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투가 점차 느릿해져 가고 있었다.

“전, 언니가…… 행복하면…… 좋겠…… 어요…….”

쏟아지는 잠기운을 견뎌 내며, 아이는 따뜻한 마음을 끝까지 전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

로제타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응. 클라리사. 약속할게. 꼭 행복해지겠다고.”

그녀는 잠든 클라리사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클라리사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방을 나선 로제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긱스 경?”

클라리사의 방 앞에 서 있는 긱스를 보고 놀란 탓이었다.

그가 로제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클라리사를 보러 오셨나요? 이걸 어쩌죠? 막 잠들었는데…….”

로제타가 눈썹을 아래로 내려트리며 제가 다 미안하다는 듯 얘기를 하자, 긱스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영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대답에 로제타의 얼굴에 더욱 놀란 표정이 번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저를, 말씀이세요?”

“예.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각하께서 영애를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공작님께서, 저를요?”

토끼 눈을 뜬 로제타가 이내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