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1화
* * *
그녀가 안내된 곳은 응접실이 아니라 테런의 서재였다.
책상에 앉아서, 긱스가 수도에서부터 가지고 내려온 서류를 차근차근 살펴보며 급한 건부터 결재하고 있던 테런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군요.”
“좋은 밤이에요, 각하. 절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바쁘시면 이따 다시 찾아뵐까요?”
“아뇨.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영애의 방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럼 두 분, 천천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긱스가 서재 문을 닫으며 테런을 한번 쳐다봤다.
두 남자가 무슨 사인을 주고받는 것 같은데 로제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등 뒤로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로제타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서재에 테런과 단둘만 남자, 로제타는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도통 걸음을 떼지 못하고 출입문 쪽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테런이 소리를 내어 권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 네…….”
그제야 로제타가 주저하다가 테런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먼저 카우치에 앉고 나서야 그가 뒤따라 앉고는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팔꿈치를 무릎 위에 괸 뒤, 양쪽 검지를 툭, 툭 두드리는 모습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로제타는 더더욱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밝을 때 이야기를 나눠 볼까 싶었지만, 그러면 클라리사가 깨어 있을 때라 솔직하게 대화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지금 모셨습니다.”
“괜찮습니다.”
클라리사를 떼어 놓고 할 이야기라는 게 대체 뭐지?
로제타는 영,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마주 보고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런은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퍽 어려운 말이라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먼저 물었다.
“공작님, 어쩐 일로 보자고 하신 건지…….”
“그게 말입니다.”
한 번 더 주저하다가 테런이 한숨을 토하면서 동시에 말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영애의 거취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모시고 왔습니다.”
내 거취?
순간 무슨 말인가 했다가 이내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클라리사와 함께 수도로 올라가는 것 말씀이시군요. 함께 올라가려고 합니다. 오늘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그 부분은 크게 마음을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짐을 얹어 드리기 위해 클리프 영식을 파견 보낸 것은 아니니까요.”
혹시라도 로제타가 부담을 느낄까, 테런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또 정중했다.
그런 그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기에 로제타는 긴장을 조금 풀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아뇨. 도움을 받았다고 떠밀리듯 결정한 게 아니에요. 저 역시 클라리사의 옆에 있는 것이 정말 좋고 행복해서 내린 결정이거든요. 그러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테런이 그러냐는 듯 입매를 팽팽하게 늘여 당기며 고개를 짤막하게 끄덕였다.
주저하던 그가 숨을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영애께 제안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무슨 제안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로제타는 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꺼풀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테런을 바라보았다.
그를 길게 봐 온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테런답지 않았다.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딘가 초조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떨구자 콧대에 음영이 졌다.
그 바람에 얼굴에서 더더욱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잠시 뒤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혹, 영애께 그러실 생각이 있다면, 간병인이 아니라 다른 관계로 동행하심이 어떨까요.”
“다른 관계라 하심은,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제 약혼녀로서요.”
“네?”
로제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에 비례해 슬그머니 입술도 벌어졌다.
너무 생각지도 않은 말을 들어 버린 탓에, 그녀는 오른손으로 제 입을 막는 것 말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곧게 시선을 마주쳐 오는 테런의 눈빛에서 로제타는 그가 진심으로 꺼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테런이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쓰게 웃었다.
“어, 음, 저기…….”
로제타는 혼란한 얼굴로 입술만 벙긋거렸다.
“정말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머릿속이 지금 너무나도 새하얘져서요.”
“추려서 듣는 것은 제 몫으로 하죠. 부담 없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테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술 끝을 늘였다.
하지만 미소 띤 입매와 달리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그게 저…… 저희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맞습니다. 하지만 전 영애가 저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이해관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영애는 결혼을 원치 않으시죠?”
“맞아요.”
로제타가 더없이 신중한 태도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집안으로부터 결혼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죠.”
“그러다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그 압박 하나만큼은, 정말로 ‘결혼’이라는 것을 해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목소리가 침잠했다.
“그렇다면 그 형식뿐인 결혼,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동료애 같은 감정으로 말이죠.”
로제타는 제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해 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공작님 말씀은…… 일종의 계약 결혼을 권하시는, 뭐 그런 건가요?”
“정확합니다.”
그가 힘주어 대답했다.
결혼하기로 결심은 했어도 아무나와 할 수 없었다.
애정, 사랑, 관심을 갈구할 텐데 저는 그러한 것들을 배우자에게 안겨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테런의 안에는 이미 어린 소녀가 자리를 잡고 앉아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에 또 심장이 꽉 조여 들며 손끝이 저릿해져, 테런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제타의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더욱 심란했다.
로제가 자랐으면, 정말 딱 저랬을 것만 같아서.
‘왜 눈 색깔도 같아서는.’
괜한 원망을 스스로 삼켜 내었다.
떨리는 숨을 짧게 들이켠 뒤 그는 심란함을 다스렸다.
어찌 됐든, 결혼할 것이라면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런 사람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고.
“영애의 힘든 사정을 알면서도 이러한 제안을 하는 저를 얼마든지 비난하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로제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하는 중인 듯 반듯한 눈썹이 미간과 함께 모여들었고, 붉은 입술은 꽉 다물어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테런은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마음에 자꾸만 양가적인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로제타가 매몰차게 거절했으면 하다가도, 저렇게 긴 고민 끝에 받아들여 주었으면 했다.
그 자신도 로제를 보는 것인지, 로제타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눈앞의 그녀에게 죄책감이 들었고, 그 감정을 숨기고 싶다는 듯 살짝 시선을 내려트렸다.
“만약 저와의 결혼을 결심하여 주신다면, 평생 영애를 부인으로서 존중하며 살겠습니다.”
말인즉, 여자로는 보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로제타는 세상에 이렇게 멋없는 청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존중받는 삶’.
그 한마디가 로제타의 마음을 건드렸다.
이 세계에 온 뒤, 클리프 남작가에서 얼마나 멸시당하며 살아왔던가.
더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말은, 적어도 로제타에게 있어선 꿀을 바른 듯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선뜻 계약을 수락하겠노라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계약 결혼을 하려는 거지?’
그 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외람되지만…… 허락하신다면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어요. 제안해 주신 계약에 관한 대답을 돌려 드리기 전에 말이죠.”
“편히 말씀하십시오.”
테런의 허락을 얻었음에도 로제타는 좀처럼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힘들어했다.
테런은 굳이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 주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골라도, 조금은 실례되는 질문이라.”
로제타가 민망하다는 듯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웃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작님께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가 궁금해졌어요. 저야, 절 팔아 넘기려는 가족들 때문에 진저리가 나서 그런 것이지만…… 공작님은 그런 것도 아니시잖아요.”
테런을 봐 온 것은 극히 짧은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가 제 사람을 아낀다는 사실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클라리사를 대하는 모습에서, 그만의 가정을 꾸려도 가족들을 아끼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제타가 걸리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었다.
“혹시, 이뤄질 수 없는…… 음. 다른 신분의 여성분을 마음에 깊이 담으셨나요?”
계약 결혼 후, 행여 자신이 그의 정부(情婦)를 감당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물려받을 게 거의 없는 한미한 귀족가의 삼남이나, 사남 정도면 모를까.
테런 같은 대귀족들의 혼사는 개인의 일이라기보다는 가문과 가문의 결탁이었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테런이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신분 차이가 나는 사랑을 하고 있기에 허울뿐인 아내를 구하는 게 아닌 건가 싶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하지만 테런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로제타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부정했다.
“걱정하시는 여자 문제 같은 것은 절대 없습니다. 맹세코.”
그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긱스에게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일만 하느라 긱스와 늘 붙어 있었으니 말이죠.”
“그러면 대체 왜…….”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며 질문하자, 테런의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딱딱해진 눈매와 얼굴에는 곤란함이 배어 있었다.
말을 고르듯 잠시 고개를 떨군 그가 한참 만에 내놓은 대답은 이러했다.
“그저, 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상당히 제멋대로인 데다가 이기적인 면도 있어, 옆의 누군가를 살뜰하게 챙겨 줄 수 없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