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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42화 (42/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42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원치 않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로제타는 눈치껏 질문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해합니다. 때론 혼자인 게 편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테런이 로제타와 시선을 마주치며 입술을 길게 늘였다.

그녀의 배려를 눈치챈 듯 고마움을 품고 있었지만,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그는 피로한 듯 눈썹 근처를 잠시 거친 손길로 문지르다가 잠긴 목소리를 꺼내었다.

“영애가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는 제게로 향해 오는 로제타의 시선을 곧게 마주하며 조용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결혼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다른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낯간지러웠던 모양인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충, 전하시고자 하는 바는 알아들었어요. 원하시는 계약 결혼의 상대자가, 공작님께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 여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비슷합니다.”

로제타가 환하게 웃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무척이나 자신이 있었다.

‘날 죽일지도 모를 사람이란 생각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데, 사랑이라니.’

아무렴, 무리다.

굳이 다시 한번 짚자면, 테런이 요구하는 것은 ‘계약 결혼’이었다.

로제타는 굳이 자신이 멍청하게 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안락한 삶이 보장된다.

그런데 굳이 그의 마음마저 원하며 스스로 비참함의 구렁텅이로 뛰어들 필요가 있을까?

“계약의 내용에, 후계자의 문제도 포함이 될까요?”

둘러 말하고는 있으나, 내용인즉 계약 사항에 잠자리가 포함되냐는 뜻이었다.

그 질문에 테런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으실지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했다.

“부끄러운 일도 아닌걸요. 그리고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좋지 않을까요? 계약이잖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테런이 큰 손으로 제 입가를 살짝 덮었다가 떼어 내었다.

“다음 대의 에스테스는…… 클라리사의 아이 중 하나가 물려받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다면 가신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방법도 고려 중입니다만, 정확하게 정해진 건 없습니다.”

“바람의 힘이 양자에게도 계승이 되는 건가요?”

“아, 아뇨. 제 핏줄을 잇지 않는다면 바람의 힘은 제 대에서 끝나게 될 겁니다.”

테런의 목소리가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할머님께서 아시게 된다면 노발대발하실 내용이니, 비밀 유지 부탁드립니다.”

“아,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점은.”

로제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것은 테런이 택한 삶의 방법일 테니, 자신이 그것에 대해 쉽게 입을 댈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물었다.

“생각해 두신 구체적인 조건들이 있으면 혹시 여쭈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있는 모양인지, 테런은 로제타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한번 읽어 보시죠. 추가할 내용이 필요하시다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담담한 눈길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간 로제타는 차분하게 말했다.

“제게 무엇 하나 나쁜 조건은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녀에게 과분했으면 과분했지 불이익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이 호의를 누려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로제타는 종이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솔직히 나쁜 제안이 아니야. 오히려 후해.’

어디에 가서 무슨 일자리를 구한들, 이보다 조건이 좋은 것은 찾기 어려우리라.

테런이 내민 종이에는 에스테스 공작 부인이 된 후, 로제타가 져야 할 의무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었다.

만약 계약 결혼을 수락한다면, 매달 그녀에게 얼마의 돈이 지급될 것인지, 그녀의 명의로 몇 개의 부동산을 돌릴 것인지 등 로제타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경제적, 문화적 혜택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로제타는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기라도 하고 싶다는 것처럼 얕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가슴과 어깨가 작게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매우 중요한 순간이야. 결정을 잘 내려야 해.’

로제타는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속으로 말했다.

그녀가 클리프 남작가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결국 결혼밖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곧 죽어도 그들이 주선하는 남자들과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작 부인과 이시크가 함부로 반대하지 못할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

‘공작님이 클리프가에 청혼서를 넣으면, 그들은 감히 거절할 수 없을 거야.’

누가 뭐래도 테런은 윌셔스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작님과 결혼하게 된다면…… 원작과 달리 날 죽이지 않을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클라리사와의 관계가 돈독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꼭 무엇인가 다른 노력을 더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정말 이런다고 죽지 않을까.

그래. 그런 마음이 내내 로제타의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클라리사가 이 소설의 서브 여주인공인 이상 남자 주인공인 바론에게 버림받을 테고, 결국 테런이 흑화한다는 게 예정된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뿐만 아니라, 클라리사도 지킬 거야.’

이젠 자신에게도 동생 같은 그 아이가 쫓겨나듯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그 미래를 바꿔 주고 싶었다.

로제타는 점점 결심이 확고해졌다.

‘내가 원작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말이야.’

간병인 처지에선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적으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가족이 된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클라리사의 문제에 말을 보탤 수도 있으니까.

결심이 서자, 로제타의 입술이 매끄럽게 말려 올라갔다.

테런은 그 미소를 잠시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로제타가 들고 있던 종이를 천천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올곧게 펴고 테런을 바라보았다.

“제가…… 배움이 짧아 귀족 영애로서의 소양이 부족해요. 그래서 원하시는 에스테스 공작 부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그만큼 배움도 빠르더군요.”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그녀가 공작 부인이 되는 데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그 뜻을 알아들은 로제타가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말씀하신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조건을 두 가지 추가해 주셨으면 해요.”

“말씀하십시오.”

“첫 번째는 제가 두 번 다시 클리프 남작가의 사람들을 보지 않게 해 주세요.”

그쯤이야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테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로제타가 주저하듯 말을 하지 않고 있자, 그가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저, 그게…….”

로제타가 잠시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두 번째 조건은…… 일주일에 하루는 꼭 시간을 내어 함께해 주세요.”

테런의 표정이 일순 딱딱해졌다.

난감해하는 그의 얼굴을 엿본 로제타는 절로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서 변명하듯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세요! 공작님의 애정을 바라서가 결코 아니니까요!”

목소리까지 높여 가며 부정하는 그녀의 말에 테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제가 그런 조건을 내민 것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에요.”

로제타는 마른침을 모아 삼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작님과 남작 영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잖아요. 객관적으로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제 머리카락 색 때문에…… 출신 문제도 분명 입방아에 오를 거예요.”

로제타는 어깨 위에 내려온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잠시 위로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공작님께서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와 옆자리에 앉혔다고 할 테죠.”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말에 상처 받는 삶을 살아왔다.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기에, 타인의 말속에서 ‘아무나’라고 평가절하당하고 싶지 않았다.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결정된 혼사가 아니니, 되도록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시군요.”

“정확하세요. 물론 저와 단둘이 있는 것이 불편하실 테니, 그 시간은 클라리사도 함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테런이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망하셨나요? 생각한 것보다 잇속을 챙기는 것 같아서요.”

“그럴 리가요. 도리어 감탄했습니다.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짚어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기도 하고요.”

그제야 로제타가 안심한 듯 긴장으로 굳혔던 어깨를 내려트렸다.

“얼추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으니, 펜을 좀 빌려주시겠어요?”

로제타는 테런에게서 필기구를 건네 받았다.

종이의 하단에 서명하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그녀는 그대로 눈만 들어 올려 테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공작님. 우리의 계약 기간은 언제까지인가요?”

테런 역시 거기까진 생각 못 한 듯 잠깐 고민했다.

“영애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저로서는 길수록 좋지만요.”

“사실 저도요.”

로제타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그녀가 종이에 무엇인가를 쓱쓱 적기 시작했다.

『특약. 혼인의 유지는 기간이 없으며, 상호 합의하에 이혼한다.』

“좋습니다.”

“그럼 저 먼저 서명할게요.”

로제타가 먼저 서명을 마치자, 테런이 종이와 펜을 넘겨받고 뒤이어 유려한 필체로 사인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그가 기분을 환기하려는 듯 숨을 들이켜며 어깨를 쭉 폈다.

이야기가 길어진 탓에 어느덧 양초의 길이가 많이 짧아져 있었다.

테런은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힐끔 바라봤다.

열 손가락 모두 하얗고 곧았지만, 아무것도 없어 허전해 보였다.

그제야 테런은 그녀가 언제나 아무런 장신구도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무심결에 말했다.

“수도에 올라가면 약혼반지부터 준비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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